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진주 마진마을과 재령이씨가 고문서 학술대회

황와 2022. 10. 7. 22:23
22.10.7 10:00 -18:00 경상대학교 남명회관에서 진주재령이가 마호당종가 고문서 학술대회 참석하다./264
 좌장 : 허권수 박사,
발표자 : 고려대 안승준 한국고문서학회장, 이민재 이혜정 신이나, 부산대 김승룡, 심재우 함영대,정수환, 허원영, 이미진,
토론자 : 이흥식, 유현재,윤석호,전병철, 오세현, 최은주
사회 :  강정화 정수환
접수 :  이병수
참석자 :  마호당 종손 이영,  이창환, 이동영, 이병택, 이동춘, 이상호, 이병목, 이병복, 이병만, 이병구, 이상규, 이정섭,
               이웅환, 조문규 등  약 30명 참석
특색 :  마호당종가 보관 문적류 경상대학교 기증 후 첫 학술발표대회
           1만 2천점 가량의 문적에 대한 내용, 종류, 보관상태, 20세기 지식인 굴천 일해선생 생애 탐구 등
           과거준비를 위한 서적류, 동림조성과 임송 산송 자료, 노비매매 자료, 토지 매매 자료 
           마호당과 마진마을의 진흥역사를 살려 볼수 있다.  

 

마호당 종가 

 

마진마을은 1630년대 입향조  성재선생의 2자 도산공의 다섯째 아들이 마호당 중자 인자이시다.

마진동네의 마호동 너른 땅에 입지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마호당 종가는 큰 재산을 축적한 소암공 이덕관이 천석군으로 수많은 노비를 거느리는 유농으로

평소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적선한진 집으로 소문이 나 동학란에도 피해없이 지났고

6.25동란에도 오지라 난의 피해가 없었기에 문적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중인(1623-1655)과 울산김씨(1621-1681)

 아들 이보(1651-1708)과 영산신씨(1649-1688)

 손자 이덕관(1688-1757)

 증손자 이한철(1716-1783), 이한익(무과급제, 기장 웅천현감)

 현손 이재훈(1743-1811)

5세손 이국우(1761-1803)

6세손 이인모(1790-1855),

7세손 이희좌(1811-1860)   

8세손 이언기(1831-1880)

9세손 이현도(1863-1918)

10세손 이승호(1884-1941)

11세손 이병희(1911-1990)

12세손 이영(1941-)

대를 이어 이룩한 종가이다.

 

종가 의 종택은 대밭이 둘러싸인 북산 남수의 밝은 대지에

마호당 종가가 안채 사랑채 경남민속문화재자료 지정되어 있다.

 

마진마을의 개관

 

마진리는 남강이 감돌아 서쪽에서 남쪽에서 목계천과 합류하고 

동쪽으로 흘러가는 지형으로 이루어져

남쪽 절벽 제월대에는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 소도산은 배산이고 남강은 임수로 

배산임수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아 양택지로 따뜻한 마을이다.

그러나 사방이 막혀 산물의 이동은 강가 뱃사공으로 도강하고 

뒷산쪽으로 고개를 넘어서 통행하는 절박지였다. 

1969년에 남강댐이 준공된 후 강변 모래사장을 마진제 제방을 쌓고

홍수에서 벗어나 경작이 가능했으며 

강변 안덕에 동림을 조성하여 방수림과 방풍림으로 

금림계를 만들어 보호하고 가꾸었으나 

20세기에 들어 전주이씨와 재령이씨, 창녕성씨와 재령이씨간 

마을 숲관리 송사가 벌어져 지방관과 중앙까지 송사가 벌어져 

그 송사자료가 고스란히 문적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마진리 주요 건물은 주로 재령이씨 재실이 대부분으로

입향조의 도산재, 용호재, 경원당, 마호당, 덕연재, 주화당, 호상분암,

소봉재, 첨모재,제양재, 석류재, 삼성재, 매호서당이 있고 

진양강씨 재실이 압산재와 모의재 두 곳 있을 뿐이다. 

또 마진초등학교 폐교 자리가 있고

제헌공부자의 효자정려비각과  여막천이 있다.

완산최씨 열녀비도 있다.  

 

마호당 고문서의 현황과 특징은 경사자집부로 나누어 

558종 968책이 기증되었는데 

사서삼경, 예서류, 교과서 전기 지리서  유가행실도 천문산역서, 

과거를 공부한 과계류, 남명문인문집류,

진주지역 문집류, 간행본, 거창 합천 함안지역 실기

장서인 장서기 등 총 11961건이 경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마호당 전적의 보존상태는 잘보존하였기에 70%는 양호하고

30%만 보존처리하였다고 한다.

 

향촌사족의 학술과 경제적 저변으로 

마진마을의 동림조성과 갈등 사테는 

남강변 하천언덕에 조성한 방수림과 방풍림으로 금림으로 동계를 만들어  지키고 있었는데 

이명범이 나무를 벌목함에 동회를 개최하고 고발하니 쟁송이 벌어져 

지방관 조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수금되기도 하였다.

또 남강변 숲을 장릉의 제사지낸는 향탄지로 편입하여 

논란이 많았고 진주목사와 왕실 순조에게까지 알려져 논란이 많았으나

대홍수후에 동림으로 다시 반환하게 되었고

재령이씨와 창녕성씨간 산의 경계지 길등으로

순조에게까지 상언되어 처벌을 받는 결과까지 초래되었는데

그 소송자료가 고스란히 문적으로 전하게 되어

조선후기 쟁송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조선후기 진주지역의 토지매매 특징을 

마호당 종가에서 재산을 늘여간 기록을 조사하던중

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 문화류씨 종가와 비교 하였던바

토지매매문서 701점을 분석한결과 매매되었다가

그 토지를 나중에 재매입하는 식으로 확충해 나간 결과이다.

 

마호당의 재산중 중요한 재산이 노비다.

마호당의 노비 경영은 분재기를 통해서

자식들에게 고루 분배되거나  

농사인력으로 확충되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마호당 노비가 가장 많을 적엔

159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많은 식구들 굶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유지 관리 어려웠을까 

호구문서 분재기 자료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있고

매매문서 분재 규정 등 남여 구별없이 똑같이 분재하다가

후기로 갈수록 장자에게 상속되는 비중이 높아지고

대신 조상을 모시는 제사 등은  장남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20세기 대표할만한 위인은 굴천 이일해 가계이다.

조부 매천 이수안과 아버지 정산 이현덕과 더불어 3세 문집을 낸 선비였으며

12살적엔 할아버지를 따라 거창 면우 곽종석 산생을 찾아 인사하고

회봉 하겸진을 스승으로 만나 한시를 단련하여

전국각지를 여행하며 교류하여 교유를 넓히고 

40대엔 정인보의 추천으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비서로 2년간 활동하였으며

알본여행과 영남 방문

6.25동란시에서 부산에 우거하다가 

5,60대엔 고향 마진으로 복귀하고 

설악산을 구경하며 7,80대엔 고향마진에서 말년을 보내며

집안 종중 재사에 수많은 글을 남기셨으며

이병각 병철 형제와 교류하며 한시를 읊고 교류를 넓혔다.

20세기 한학자로 마진을 알린 대표적인 학자이셨다. 

 

10분의 발표자와 토론자가 단상에서

고문서를 칭송하는 행사속에 

가치롭게 잘 활용되어 조선후기 가문의 발전사와 생활사 연구에

쓰여지고 활용되기를 모두가 바라며 새로운 방향으로 연구되길 기원했다.

발표자와 참석자가 함께 기념촬영하여 그 의의를 기록하였고

밤늦게 참가한 연구자와 참석자를 위해 

간담회로 대학앞 한식당에 모여

마호당 종손으로서 발표에 감사드리고 

함께 어울려 종인들 든든한 기분으로 밤길 돌아왔다.

서울사무국장도 함께 동행하며 

그 종중사적 의의를 서울까지 알려 달라고 했다. 

 

좌장 허권수 박사의 인사말
발표자(상)  참석자(종인)(하) 기념촬영
학술대회 서책 자료
학술발표 및 토론자 배열
마호당 종손(황색두루마기 이영)
간담회에서 종손 감사인사

 

간담회

 

경상대학교 개척문

 

기념촬영 단상 발표자 단하 참석자(종인)
발표자 토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