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초이튿날은 단할재 할배의 시삿날
고향의 선조 단할재공 묘소를 찾아
우리 사의공파 삼형제 내 차로 모셨다.
찻간부터 우리 종족의 보사를 열거하며
모순된 종사 오류된 보사 하나 하나 설명하신다.
우리 형제는 영원한 학생이다.
들을 학생이 있고 가르칠 주제가 있으니
벽사 훈장은 조근조근 가르치신다.
참 아름다운 고전사 전수다.
택지동 찾아 도착하자마자
새벽밥 먹고 출발한 김포종인들 도착한다.
연락없이 도착한 방손들 참여에
병옥 택수 회장 주인으로서 고마움 서로 전한다.
지수 청원리 웅환 병화 재홍도 왔다.
묘소에 올라가니 새로운 칡넝쿨이 새파랗게 돋았다.
종원들 함께 뽑고 제물 준비 진설하니
묘제법 옛날 시사 같다.
제사 집사분정한 후 진행했다.
많은 인원은 아니라도 성의있는 제관이 늘어서니
석축에 늘어서 진다.
묘제 홀기 없어도 순서대로 엄숙히 진행했다.
도포 준비해 입고 지내니 산가가 하얗다.
집사분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헌 : 이택수(문헌공파 김포종친회장)
아헌 : 이동영(추원재 회장)
종헌 : 이병목(대종회 사무총장)
축 : 김포 종인
참례자 : 동춘, 병화, 웅환, 재홍(서울사무국장)
문헌공파 종인 : 병옥 고문 외 6분
시사 지내고 음복주 돌리며
진설 음식 나누니 산천 맛은 더 맛나더라
마치고 나서 단할재공 묘소를 찾는데 공헌한
고 이병택 형님 밭가 묘소를 지나치며
다정한 옛 모습 감사 인사드렸다.
진성 삼거리 치돗가 민속식당에서
김포에서 오신 주종인과
함께 동참해준 방후손들 일일이 소개하며
정겨운 식사 나누었다.
오늘 가장 색다른 재령족보사에 대한 이야기
모두 열심히 듣고 모순된 이야기 나누었다.
벽사 형님 후예에게 특별히 전하는 숙제를
우리 종인들 4사람에게 넘긴다고 하신다.
숙제 맡은 과제가 어깨에 큰 부담이 된다.
오늘 가장 중요한 행사 현장학습 기회
벽사 종문은 의미있게 금석문을 열기 시작한다.
옛날 겨우 풀뿌리 나무껍질 먹고 살던 피난민들
고려가 망하자 공민왕 부마족으로
중앙도성에 살지못하고 피해서 내려온
우리 상선조의 본거지는 지방이 아니었으리.
그 피난민들이 목숨 살기 위해 숨었고
많은 세월동안 이름 내밀지 못했으리.
벼슬길에 나간 상선조님들 모함에 유배되어 돌아가시고
그중 고려유민의 종족을 드러내서 모은공 할배는
고려동을 세우고 망복절의를 지키며 정절가로서
애국충절을 함안땅에 남기셨다.
그때 그 어지럽고 모질게 가난했던 역사적 난민들이
전국각지에 흩어져 기록없이 입으로 종사 전해내려오다 보니
각지 항렬도 차이가 나고
지역 향토와 더불어 살다보니
우리 고유의 예절 행의도 변하였으나
곧은 품성은 지금까지 재령이가의 본성으로 남아있었다.
일가라면 만나면 바로 소통하는 반가움
우리 성씨만의 자랑일 것이다.
그런데 대동보 족보사를 이야기하며
각지역 우리 원로들이 이해 충돌로
금석문을 제시해도 알아듣지 않고
대동보를 일부 지역은 배격하여 초단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자료원인 상선조 묘갈명을 탐구해 보자고 한다.
옛날 종이 비싸고 구할 수 없었으니 죽간에다 썼고
기록으로 남길 수 없으니 족보를 만들지 못하였고
말로서 전해져 왔으니 조선 말기쯤에 와서야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이 일반성씨들의 보편적인 씨족사다.
왕귀족만이 그들의 역사를 기록해 왔을 따름이었다.
오늘 3곳에서 현장학습이 이루어졌다.
1. 단할재 묘비명 탐독 (16대손 이연근 근기, 1987년 3월 23일 근수)
-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 택지동 묘역내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대성들 속에 살아남은 조상들
그들의 피눈물 나는 역사를
다른 곳에 살았던 일가들도 그 사정 몰랐고
그 기록 인정하려 하지 않았단다.
그 증방자료가 금석문인데
그것도 인정하지 않는 지역때문에
대명천지 역사시대인 지금도 그걸 곡해하고
통합 융합하려 않고 있으니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픔이 있다.
그래서 기록에 남아있는 것 만이라도 인정하자고 하소연한다.
김포 문헌공파 종인들이 하소연하는 괴리감이다.
비문 읽으며 설명하는데 모두 솔깃하게 듣는다.
우리 상선조들은 재령땅에서 분가하여
개성 주변에서 벼슬하거나 왕의 친척으로 살다가
지방으로 피난 내려오다가
밀양 함안 경북등지로 정착한 것이 아닌가에
증빙물이 없으면 믿지 않던 완고함으로
자기 일족만 지키려는 의식이 완연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재령이씨 족보의 간결함은
타성들이 존중하고있다는데
그건 바로 정직함에 있다고 한다.
꾸며 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아는 것은 자세히 기록해서 잇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는데 있단다.
예로서 연비가 족보에
사재령공이 안렴사를 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우리 족보는 그걸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단다.
즉 세 연원지는 단할재 묘비명 내용을 인정해 주는 것이니
단할재 할아버지의 따님이 진양강씨 창녕공 위덕과 혼인한
정경대부인 이씨이니까 그 묘비명을 가서 확인하고
세번째 할머님의 남편 강우덕 공과
아들 영의정 맹경공과 집의 숙경공의 신도비문을 둘러보면
그 기록을 알 수 있다고 하여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둘러보자고 하여 내가 앞장서 안내하였다.
열심히 경청하니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너무나 엄숙했다.
반야재에 들러 진양강씨와 우리 재령이가의 관계도
옛 연비가로 도움 주고 받은 권문세가였음을 확인하였다.
강씨 종산 바로 옆에 우리 집안 종산이 있음은
그들이 우리에게 배려해 준 결과였음을 알렸다.
2. 정경대부인 재령이씨 묘 및 창녕현사 강우덕 묘소 참배 및 묘비문 탐독
- 진주시 진성면 가진리 반야동(배망골)
나를 따라 배망골 진양강씨 박사공파 묘원으로 갔다.
묘원의 배치 도해를 흑석에 새겨두어 찾기가 쉽다.
먼저 할머니 묘소에 성묘하고
비석탐구에 글씨들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옛날엔 비석에 이끼가 거칠게 끼어
무슨 글짜인지 알기 어려웠으나
누군가 탁본했는지
비면을 깨끗이 닦아두어서
글씨를 판별하기 쉬웠다.
우리 선조의 역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성씨가 여기 언제부터 산 건지
또 어찌 여기에 들어온건지는 알수 없었다.
단지 정황상 추척으로 짐작할 따름이나 그게 바른 결론인 것 같다.
우리 사의공파 일족이 여기 정착한 것은
동산공과 성재공 선조가 진양강씨와 정혼하였기에 입향조이다.
동산공 묘소도 진양강씨 묘원 다음 등대에 있고
성재공의 어머니 문화류씨 할머니 묘소도 그 등대 위쪽에 있다.
3. 창녕현사 강우덕, 영의정 강맹경, 집의 강숙경 삼부자 신도비
-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 옛도로변(월아천 동산교옆)
길가에 선 진양강씨 신도비도
주변에 이렇게 머리 큰 용두는 없었던지라
어릴적 강 정승 비석거리라고 불렀다.
집의공 단기만 있었다가
최근에 아버지와 영의정 형까지 세워서
당시 명문족벌가 진양강씨 박사공파의 3부자 공적을 알리고 있다.
비앞 언덕 아래 당시 우리 엄마가 일군 정구지 밭이 있었는데
그 앞에 심은 어린 느티나무에 기대어 놀다가 떨어져
이마를 깨서 굼실댁 양어머니께서 놀라
피나는 상처에 된장 발라주던 모습 떠오른다.
그때 그 느티나무는 다릿가 휴게목으로 대목으로 잘 자라더니만
비석 세울 때 방해되어 강씨종중에서 베어 없앴다.
부 : 창녕현사 강우덕(정경대부인 할머니 부군) 신도비(전면)- 진산 하동근 찬
장자 : 숭록대부 진산부원군 영의정 문경공 강맹경 유허비 - 광주 노상직 근찬
차자 집의 수헌 강숙경 신도비 - 문소 김황 찬, 제헌국회의원 강달수 근서
오늘 단할재 조상 시제는 좋은 답사공부를 한 셈으로
참여한 일족 모두 가장 뜻 깊은 하루였다고 감사해 한다.
부디 벽사 종문이 오래 건강하심을 챙기는 것이
내 임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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