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임인년 설날 차례지내고 성묘하고

황와 2022. 2. 1. 22:07

                                             22.2.1설날 차례지내고 고향 선조성묘했다./264

                                             일정 : 8시 : 차례지내기- 10시 숙모집 - 성묘(수의동 6대조, 질매재 양생부모,

                                             뒷뫼 고조부,증조부모, 조부모, 숙부)-군북ic-의령-유곡-박진교-남지 장모)-14:30마산

 

설날도 설날 같지 않다.

성남 사는 외아들 코로나로 못내려오고 나니

우리 내외 스스로 조촐히 준비했다.

아내는 벌써 체력 소진되어 목이 쉰다.

대강 준비하라해도 그게 잘 안된다.

준비하다가도 오후엔 잠이라도 한숨 잔다.

자꾸 힘이 없어지는 아내가 애처럽다.

그래도 자기 할 일은 맡기지 않고 꼭 자기가 한다.

남자의 처신까지도 배려하는 모습이 고맙다.

 

아침 일어나자마자 젯상 펴고 병풍 세우고

제기상자에서 제기 꺼내서 닦았다.

제물 차려 부부 함께 조촐히 제자지냈다.

무릎 아픈 아내가 꿇어앉아 잔술 치는 것이 안스럽다.

난 헌관이라 술잔까지 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증조부모, 조부모님 먼저 모시고 

다음 양부모, 생부모님 다음에 모신다.

내가 증조부이하 소종중 종손이니 

내 정성 다해 나를 위해 제사드린다.

올해는 자식과 손자가 없으니 허전하다.

제발 코로나 사태 빨리 해결하고 

안전한 사회가 이루어 지도록 빌어본다.

아내는 아들 손자 건강하고

사업 번창하도록 먼저 빌고 

자기 목 아픈 것 낫게 해 달라고 조른다.

그 기도가 꼭 이루어지길 나도 빈다.

제사 후 떡국 한 그릇 나이 더해 먹고 

아내를 집에 혼자 떨구고 

고향 성묘를 향해 달렸다.

 

 

숙모댁에 동생과 최서방네 가족이 모였다.

생질 정원이가 벌써 설흔이란다.

이제 박사코스 대학원 진학 중 성학을 기댔다. 

숙부님 제삿날 오늘 제11주기 날이다.

빨리 나선다고 왔는데 

이미 제사는 끝나고 음복식 먹고 있었다.

제사 참례비 숙모님께 전하고 

점심 삼아 밥을 다시 먹고 

함께 설 인사 세배드리고 

건강한 것만해도 모두 고맙다.

숙모님은 코로나 3차 맞고 

어지럼증세로 새벽 4시에

119에 실려 한일병원에 입원했었단다.

이제 겨우 정신 차렸단다.

 

성묘를 위해 내 차에 삼형제 담아 나섰다. 

먼저 수의동 6대조 할배 산소부터 간다.

집현면 장흥리 수의동 3십리 길이다.

그 황재 할아버지 유월장하신 대선비였고

유일로서 진주지에 그 문·행·절이 올랐었고

직와 할아버지께서 육필로 남긴 황재집 원고를

내가 4년전 책을 발간하여 배포한 인덕 선조이시다.

나는 이 할아버지의 얼을 닮고자

황와(篁窩)라는 호를 지어 사용한다.

수의동 골짜기 깊숙히 들면 좌우 청룡 백호가 감싸 안고 

안산이 낮게 가리며  수구 흘러가는 길이 숨어서 

매우 좋은 명당지이다.

유월장하면서 30리 먼 길

조기와 문상객이 줄을 이었다고 적혀있다.

가운데 등줄기 가파른 오르막길 

평산신씨 묘소 지나  조금 위에 앉은 조용한 자리

사방 송림이 에워싸고 있다.

그 등줄기 수많은 묏자리 흔적 총총하다.

삼형제 모여 성묘했다.

원래 큰집 동생이 종손인데 

오늘은 큰집 식구들 모두 코로나 PCR검사 받느라 불참했다.

월아산 넘어오면서 질매재 아래

양부모님과 생부모님 산가 다정스럽다. 

양아버님 흔적 족보에만 확인하지만 

6.25동란 때 지수학교 불타서 졸업학적이 없어졌는데

2022년 1월18일자로 지수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 명단에

'이인호' 휘함 올렸다고 보고 드리고

일찍 개화하여 집안과 나라의 인물 되라고

훈장 아버지는 한문공부 안시키고 삼십리 어린 통학하고 

일본으로 문물 더 보태라고 보냈는데

21살 청년으로 도일 후 3년만에 

일본 나고야에서 찍은 사진 하나 남기고

베를린 올림픽 열리던 그해

1936년 음력 2월 27일 산재 사망하여 

일본국으로부터 통지서 받고

할아버지 어머니 함께 도일하였더니 

시신은 이미 화장하여 연유도 없이

잿항아리로 안고 귀국하여 묻힌 그 양아버지시고 

양어머니 굼실댁은 진양정씨 휘 정계순은

정호주 훈장의 망내 딸로

청맹과니 충절사 우곡 정온 선생의 후로

첫딸 낳고 장자 며느리로서 아들 없어 

나를 양자로 삼아 정성껏 길러주신 고마운 어머니다.

 

바로 옆에는 생아버지와 어머니 내외분 묻혔으니

아버지는 훤칠한 키에 힘이 장사였다고 하고 

사회성 넓어 동네에서도 이름난 장정이었으나

인민군에게 잡혀 보국대 전선 보급 등짐지다가

방어산 전투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생물학전 호열자에 감염되어 

자랑하던 모습 동란 중 간호하던 할아버지보다 

먼저 안타까움 안고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마져도 보름만에 따라 가셨으니

온집안 망조 든 모습이었을 게다.

생어머니 다못골댁은 진양하씨 하경좌 훈장의 셋째딸로서

훈장끼리 서로 사돈을 정하여 

얼굴도 보지 않고 혼인한 양반집안의 피를 가졌기에

우리 삼남매의 피는 아버지 큰 체구를 닮고 

어머니의 넉넉한 사설과 지혜를 닮은 것 같다. 

생어머니 산소로 산줄기 용맥이 지난다고 

좋은 자리라고 풍수지리 선생이 이야기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 남매

교사 약사로 직장 잘 가지고 무사하고

동생네 조카 창훈 KBS 장해인 아나운서되었고 

그 누이 지은이는 수학박사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그렇다. 

정성스레 성묘하였다.

 

뒷뫼 대밭뒤로 올라가서 

이미 이장한 증조부모님

나의 종주가 되시는 영서 할아버님 휘 이수영 

진동의 김령김씨 시성댁 할머님 휘 김시동

가난한 농촌 선비댁 살림에 그 어진 성씨 보고

할머니 시집오면서 논 한마지기, 소 한마리 몰고 와

동산 중촌리 조산가 옛터 삼간 집에 사시면서

어진 성품으로 집안을 일구시니 

그 때문에 우리 가문 땟거리를 잇게 되고 

내외분 할아버지는 향년 75세,

할머니는 79세까지 장수하신

가장 사랑스런 내외분이셨다고 들었다. 

 

곁에는 나의 조부모님 산소 

직와처사 휘 이현지 할아버님은

진동 외가 외삼촌 유학자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나중에 처남되는 씰미 성태진 학자와 교류하면서

집안과 동네 아이들 가르치는 훈장이셨던 할아버지

온고한 학풍으로 인근을 출입하고, 

아들 모두 학자집안 훈장과 혼인하게 하였으며,

집안의 대표 어른으로 가풍을 일깨우신 선비였었다.

증산댁 창녕성씨 휘 성인녀 할머니는 

씰미 창녕성씨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여 

덕성스런 성품으로 성내지 않고 조용히 집안을 다스리니 

언제나 훈기 도는 가풍을 이어주셨다.

그러나 중간에 어린 두 아들을 요절로 잃고 

또 건장한 첫째는 일본에서 네째는 동란중에 

잃었으니 그 부모맘 어찌했을꼬! 

그 좌절 속에 겨우 우리가 살아 남아 오늘에 이르렀다.

고마운 혼백에 정성을 다해 성묘했다.

 

다음은 숙부님 산소 앞에서 꿇어 앉는다.

어려운 집안 다 돌아가신 형님들 

외아들로 남아 집안의 무거운 짐 지고 

결혼전 이미 다 파산되어가는 가세

다시 재건하고자 오로지 남은 집안 지주로

홀로된 두 형수들과 조카들

그리고 다시 생겨나는 자식들 건사하며

정착하여 재생하고자 분발하셨다. 

6.25 참전용사로 

초기 마을 농협 간사에서 조합장까지

진주 유향에 출입하며 유도회장과 장의 맡고

진성향리 장례 호상 지백으로 도움 주고

11년전에 돌아가신 아까운 어른이다.

아직 숙모님은 살아남아서 온갖 질병에 늙어간다.

집안의 선현으로 심부름하다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깝다.

엎드려 삼형제 성묘하였다.

 

대밭뒤 고조부 죽헌처사공 할아버지

큰집에서 종손이 관리하는 묘소다.

황재 할아버지의 성품과 행도를 닮아 

학문을 하는 향토 유학선비로

비갈명을 동암 종조께서 써서 남겨진 할아버지다.  

유학 학문 풍조를 이어주신 고마운 할아버지로

할머니는 뒷뫼 정상에 계신 벽진이씨이시다.

비석을 세워 묘갈명을 자랑해야 할텐데

그게 우리 후손들 숙제다.

숙제를 안고 성묘하였다.

 

고향을 돌아 귀가하는 길

군북 IC에서 차 줄을 섰다.

거기서 궤도 수정 군북 IC로 의령으로 나가 

적포가는 길로 세간리에서 영산 방향으로 

자전거길 만나 박진교 건너서 

남곡에서 성사고개 넘고 

상대포에서 용산리 경좌 외로운 와가(臥家

장모님 만나러 갔다.

약 40년간 함께 우리 아이들 손자 키워주고 

함께 모신 생활 고마워

정성으로 모시고 싶어도 그저 그런 사위였다.

박카스 한 병 잔에 따라놓고

고마움 성묘했다. 

 

 

내 일 다 마치고 가볍게 돌아오니

자동차 줄마져도 술술 잘 풀린다.

고마운 마음이 세상을 편하게 한다.

밤에는 사위와 딸 세호 절하고 간다.

세호 3학년 졸업 축하해 주고 

가슴에 안으니 내 팔이 짧다.

어느새 나보다 키가 1cm 더 크다.

우람한 학생 벌써 고등학교 간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