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가족사랑기

내 아버지께서 나온 지수공립초등보통학교 1회

황와 2022. 1. 18. 15:25

                                                                     22.1.18 지수초등100주년 가념행사 팜프렛이 부쳐져 왔다. /264

 

 

아버지 흔적을 찾는 양자는

어느 구석진 곳에서나 유적유물

인우전담(隣友傳談)이라도 들으러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그 흔적은 없었다.

나는 진성면 동산리 직와(直窩 李鉉祉) 할아버지의

네째 아들인 자(자)가 선중(善仲 휘 이승호) 아버지와

진양 휘 하연수(河連水) 다못골댁 어머니 사이에

두 번째 아이 장남으로 태어 났으나 

다음해 여년생 동생이 태어나면서  

나는 젖도 떼지 못한 채

백부 자가 선부(善夫 휘 李寅浩)의 양자로 지정되어

큰 엄마 진양정씨 휘 정계순(鄭桂順) 양어머니 손에

동네 여인들 젖동냥과 밥물 얻어먹으며

금지옥엽 종손으로 양육되었다.

그 양아버지는 내가 출생하기 10년전인 1936년에

향년 스물 하나에 이미 돌아가셔서 얼굴도 몰랐고 

집안 어른들이 칭찬하는 말만 듣고 

대를 잇는 종손이라 특권처럼 자랐다.

궁핍한 농촌 선비 집안 

할아버지께서는 향토대표 선비로서

동민 자녀들을 가르치는 훈장이셨고

한문을 알아야 식자가 됨을 알고

자손들에게 한문 서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했으며

사랑방에는 매일 글 읽는 소리 낭랑히 듣고 자랐다.

그런 옹고집스런 유학자 선비가 

첫아들에게는 신학문을 익혀 현달하는 기회를 준다고

일제 치하에 새로 생겨나는 신학문 교육기관을 찾아 

동진주에 지수공립초등보통학교가 맨처음 생겨났기에 

진성 동산에서 지수 승산까지 걸어서 삼십리길

신식 공부로 집안 번영을 바라며 유학시켰다.

매일 어린애가 나무내강 나루를 건너서 

등건 시성고개를 넘어 민등들 지나 승산까지 

지수초등 저학년에 통학하였으니

너무나 무리한 학업이었다.

지수초등학교는 6.25동란 중 불 타서

모두 없어졌기에 학적을 찾을 수 없었고, 

구인회, 이병철, 조홍제 회장과 함께 다닌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 재벌급 동창들과 더불어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특히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 수도이기에 더 그렇다. 

내 양아버지 곱상스런 모습 옛사진에 담겨있고  

양어머니 진양정씨 우곡(隅谷 鄭溫)선생 후손 굼실댁 정계순

훈장 사돈끼리 정혼하여 열넷, 열여덟에 결혼하셨으니

아버지가 집으로 오지 않고 처갓집(사봉 우곡)으로 가서

며칠간 집에 오지 않아 소동이 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아버지 지수공립초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겨우 호구하는 빈농 가세에 

외지 중등학교로 진학할 형편이 안 되어 

졸업 후 집에 잠시 농사일 돕다가 

새 희망 찾아 당시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가  

이미 일본에 가서 자리잡아 사는 큰집 족숙들과 어울려 

일자리를 찾다가 노무자로 건설 현장에 투입되어

한 삼년 신혼생활 일본에서 누이를 낳고 잠시 살다가

아버지는 혼자만 나고야에 남고

어머니와 누이는 고국으로 돌아왔다더라.

이미 그때 대동아전쟁을 준비 중인 때라 

일본 본토나 우리 조선 땅이나 모두 

남자는 탄광 또는 군수산업체로

또는 군인으로 차출되어 훈련 나가고

여인들도 동네마다 동사 마당에 모여

전쟁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하던 때였으므로

내 양엄마가 당시 가장 강단있다고 훈련생 향도에 뽑혀 

제식훈련을 지휘하고 보고하는 등 

가장 똑똑한 여성지도자였다고 들었다. 

그러나 일본 본국으로부터 갑자기 전보를 받고

할아버지와 엄마가 현해탄 건너갔더니

높은 건설현장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하여 

이미 화장까지 끝난 후라

잿상자만 안고 현해탄 건너 왔다더라.

그때 어머니 나이 스물 다섯 청상

한없이 울고 불고 했다더라.

집안의 기둥 되라고 일찌기 신식공부

삼십리길 통학하며 용감히 키워놨더니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온 종손

집안은 온통 희망을 잃고 낙담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산 자는 살아야 하기에 

할아버지는 남은 자식들 손자들 이끌며

학자로 덕망있는 훈장으로 

논밭 갈고 개똥 줍고 밤마다 논두렁 물귀 돌보며

선조 시제와 유림행사 집안 대표로 출입하고

종손 자부 어머니는 청상이지만

집안 세력을 종부로서 보고 배운대로 질서를 잡아 

사랑채가 있는 선비집을 드나드는 손님들로

매일 손님 한 둘은 자고 가니

그들 식사대접 개다리소반 들고 나르기

정작 어머니는 때를 굶는 것도 다반사였고

매달마다 있는 조상 봉제사에 정성 다하니

그 효열(孝烈) 소문 나서 집안 모두 두려워하였다.

시부모 건강하고 동서들 자식들 친척들 

베 짜서 옷 만들어 입히고

자정 베틀에서 내려오면 낭낭한 조생원전 소설 읽고 

행의와 가례 문첩이 우수한 굼실댁이셨다. 

우리 가족 내력이 지수초등학교와 연관된다.

난 양자로서 부모님의 준수한 품위를 보고 들으며

내가 자랄 때 몸소 정성으로 날 길러주신 은덕에 

섬기지 않을 수 없는 위대한 부모님이시다.

이제 사그라져 버린 옛 이야기

그러나 아버지의 모교 지수초등학교가 고맙다.

 

                                              2022, 1.18 고애자 이동춘 전서(傳書)

   

왼편 첫내외분이 양부모님(안은 아이는 외동딸 병춘 누이) 나머지는 모두 큰집의 재일 종친가족들, (일본 나고야에서 1935년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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