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조선환여승람(함안군편) 재령이씨 기록

황와 2020. 6. 1. 22:58

조선환여승람 고서적 속에 담긴 우리 재령이씨 선조들의 기록을 읽어보고 함안 선조의 올곧게 산 역사와 향기를

우리 자손들이 느끼게 하는 자료들이라 이를 안내하니 조상 학습에 도움되기 바랍니다.

                                                                  2020.5. 30

                                               재령이씨창원종친회 회장  이동춘 드림

 

 

 

 

 [고적(古跡)]

 

계모당(繼謨堂) : 자미정(紫薇亭) 서쪽둔덕에 있다.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옛 여사(廬舍)이다.

                     여러 차례 고쳐지었지만 주춧돌은 한번도 바꾸지 않았다. 

 

[원사(院祠)]

 

인구원(仁衢院) : 가야면 인곡에 있고 모은(茅隱) 이오(李午)를 모셨다.

도림원(道林院) : 함안면 대산리에 있고, 한강 정구, 모촌(茅村) 이정(李瀞), 황암 박제인, 황곡 이칭을 모셨다.

도계원(道溪院) : 함안면 파수리에 있고, 갈촌(葛村) 이숙(李潚), 참의 조익도, 인원군 이휴복, 무숙공 박진영을 모셨다.

산음사(山陰祠) : 산인면 산익리에 있고 모계(茅溪) 이명배(李命培), 흘봉(屹峰) 이빈망(李贇望)을 모셨다.

 

[단묘(壇廟)]

 

경도묘(景陶廟) : 산인면 모곡리에 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다녀간 곳이다. 

호금단(湖錦壇) : 가야면 인곡동에 있고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이 다녀간 곳이다.

인곡별묘(仁谷別廟) : 가야면 인곡동에 있고 갈촌(葛村) 이숙(李潚)을 모셨다.

 

[수비(竪碑)]

 

이 숙 비(李潚 碑) : 산인면 송정리 봉명정(鳳鳴亭)에 있었다. 지금은 가야읍 인곡동으로 이전하였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가 비문을 지었다.  

 

[정려(旌閭)]

 

권 씨(權氏) : 참의를 지낸 이재록(李載祿)의 부인이다. 정렬편에 나와 있다. 정려각은 산인면 모곡리에 있다.

이 씨(李氏) : 좌윤(左尹)을 지낸 이인기(李仁基)의 부인으로 정렬편에 나와 있다. 정려각은 산인면 모곡리에 있다.

                참의 정현덕(鄭顯德)이 기문을 지었다. 

 

[명묘(名墓)]

 

이   오(李   午) : 절의 편에 나와 있다. 묘는 군 서쪽 인곡동 경좌에 있다. 이묘는 몰자비(沒字碑)가 세워져 있다.

이개지(李介智) : 절의편에 나와 있고, 묘는 법수면 황사리 덕산 을좌에 있고, 문정공 허침(許琛)이 묘갈명을 지었다.

이중현(李仲賢) : 명환편에 나와 있고,묘는 군 서쪽 인곡동에 있으며, 우의정 허침이 묘갈명을 지었다. 

이계현(李季賢) : 유일편에 나와 있고, 묘는 산인면 모곡리 자좌에 있으며, 학서(鶴棲) 류태좌(柳台佐)가 묘갈명을 지었다.

이   무(李   珷) : 원종훈 편에 나와 있고, 묘는 산인면 삼장봉(三壯峰) 자좌에 있다. 

이경성(李景成) : 효자편에 나와 있고, 묘는 산인면 삼장봉 자좌에 있고 삼릉(三稜) 이구환(李龜煥)이 묘갈명을 지었다.

이몽종(李夢鍾) : 문행편에 나와 있고, 묘는 산인면 목과동 갑좌에 있다.

이홍종(李洪鍾) : 유행편에 나와 있고, 묘는 대산면 근기촌 사좌(巳坐)에 있다.

이빈망(李贇望) : 학행편에 나와 있고, 묘는 함안면 대사동에 있고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묘갈명을 지었다.

이의망(李倚望) : 유일편에 나와 있고, 묘는 산인면 입곡리에 있고, 소암(所庵) 이병원(李秉遠)이 묘갈명을 지었다. 

이두망(李斗望) : 효자편에 나와 있고, 묘는 산인면 신당리 을좌에 있고 학서 류태좌가 묘갈명을 지었다. 

 

[루정(樓亭)]

 

자미정(紫薇亭) : 산인면 모곡리에 있고 모은 이오가 서식한 곳으로 손수 자미화를 심고 아직도 남아있다.

율간정(栗澗亭) : 자미정 동쪽에 있고, 부제학 이중현(李仲賢)이 서식한 장소로 방산(舫山)허훈(許薰)이 상량문을 지었다.

육송정(六松亭) : 군북면 지곡동에 있고 도암(陶庵) 이희성(李喜成)이 노닐던 곳이다.

낙동정(洛東亭) : 대산면 부목리에 있고, 선전(宣傳) 이만(李熳)이 살던 곳이다.

모계정사(茅溪精舍) : 산인면 모곡리에 있고 모계(茅溪) 이명배(李命培)가 학문을 강의한 곳이다.

사갈정(四葛亭) : 산인면 갈전동에 있고, 동추(同樞) 이의망(李倚望)의 독서하던 장소다.

모산정(茅山亭) : 사갈정 동쪽 언덕에 있고, 포덕암(飽德菴) 이윤덕(李潤德)이 놀고 쉬는 곳이다.

양화당(養和堂) : 산인면 산익동 익촌(翼村) 이능절(李能節)이 독서하던 곳이다.

학산정(鶴山亭) : 가야면 광정리에 있고 , 미음(嵋陰) 이시인(李蓍仁)의 독서하던 장소다. 

광천정(廣川亭) : 가야면 광정리에 있고 이몽흠(李夢欽)이 건립하였다.

효산당(曉山堂) : 자미정 남쪽에 있고 침낭(寢郎)을 지낸 이수형(李壽瀅)이 조용히 거처하던 집이다.

                      흥선대원군이 편액을 써 주었다.(白雲來鴻帖)

운산정(雲山亭) : 법수면 황사리에 있고 운번(雲樊) 이수화(李壽華)가 세웠다. 

고반정(考盤亭) : 군북면 모로리에 있고 임고(林皐) 이현기(李鉉基)가 은거하며 수양하던 곳이다.

 

 

인물편

 

[학행(學行)]

 

이   정(李  瀞) : 자는 여함(汝涵)이고 호는 모촌(茅村)이다.  명환인 중현(仲賢) 의 증손자이다.

                     조 남명의 문인으로서 경서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조예가 정밀하고도 깊었다. 

                     선조 때 유일로 천거되었으며, 임진왜란을 당하여서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과 함께 창의하여

                     공을 세우고 원종훈(原從勳)에 녹선되었다. 관직은 목사에 이르렀으며 후에 도림서원에 제향되었다. 

이명배(李命培) : 자는 수평(受平)이고 호는 모계(茅溪)이니 문행으로 뛰어난 몽종(夢鍾)의 손자이다. 

                     갈암의 문인으로 성리설변(性理說辨) 의례문답(疑禮問答) 등의 글을 지었다. 학행이 뛰어나 지평에

                     추증되었다. 산음사(山陰祠)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이 남아있다.

이빈망(李贇望) : 자는 군겸(君兼)이고 호는 흘봉(屹峰)이다.  효자인 경배(慶培)의 아들이다. 밀암(密庵)의 문인으로

                     이기성정변취정(理氣性情辨就正)을 지었다. 대산 이상정과 제산 김성탁과 종유하였다.

                     산음사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이 남아있다.

 

[유일(遺逸)]

 

이계현(李季賢) : 자는 술성(述聖)이니 명환 중현의 아우이다. 일찌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두 형이 높은 관직에

                     올랐으므로 혼자 집안에 남아서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기국이 크고 명망이 높아서 일대에 칭찬이 자자

                     하였다. 관직은 천거로 사의(司議)가 되었다. 학서(鶴棲) 유태좌(柳台佐)가 묘갈명을 지었다.

이   전(李   琠) : 자는 가고(可沽)이고 계현의 아들이다. 학문에 힘을 기울이고 은거하며 가르치니 원근의 선비들이 그

                     문하에 많이 나왔다. 대산처사(大山處士)라 일컬어졌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묘갈명을 지었다. 

이수형(李壽瀅) : 자는 사징(士澄)이고 호는 효산(曉山)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명배(命培)의 후손이다. 사람됨이 우뚝하고

                     엄하였으며 의로움을 행함에 출중하였다. 왕에게 상소를 올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으려다가 세 번이나

                     귀양을 갔으며, 늙어서는 자연에 들어 경서를 연구하고 가르쳤다. 수주만록(愁州謾錄)과 시무인변(時務

                     引辯)을 지었으며, 문집이 남아있다.

이유선(李有善) : 자는 희진(希進)이요 호는 수재(修齋)이다. 문행으로 이름난 시인(蓍仁)의 아들이다. 재주와 행의가

                     절륜하여 신명사중수기(神明舍重修記) 주역상하경도설(周易上下經圖說) 심신경중변(心身輕重辨)을

                     지었고 문집이 있다.

 

[유행(儒行)]

 

이홍종(李洪鍾) : 자는 숙뢰(叔賚)이고 문행으로 이름난 형(炯)의 아들이다. 효우와 문학으로 유림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

                     다.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이희성(李喜成) : 자는 여성(汝誠)이고 호는 도암(陶庵)이니 유일인 계현(季賢)의 손자이다. 경서와 역서를 널리 배워

                     그 조예가 깊고도 정밀하니 정한강(鄭寒岡)이 인정하고 칭찬하였다.

이창규(李昌奎) : 자는 태서(泰瑞)이고 호는 목우헌(牧牛軒)이니 원종훈 숙(潚)의 증손자다. 갈암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잠심하여 학문과 행의가 진실하고 온전하였다. 도림서원(道林書院)을 창건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이의망(李倚望) : 자는 군만(君晩)이고 호는 사갈재(四葛齋)이니 효자 인기(仁基)의 아들이다. 은거하면서 의를 행하여

                     이름이 당대에 높았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윤덕(李潤德) :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포덕암(飽德庵)으로 의망(倚望)의 손자다. 학문을 독실히 하고 힘써 행함으로

                     써 선비들의 추증을 받았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묘갈명을 지었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이유항(李有恒) : 자는 원보(元甫)이고 호는 화서(華西)이니 의망(倚望)의 증손자이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후학들을

                     많이 가르쳤다. 유집이 있다.

이유성(李有星) : 자는 남수(南叟)요 호는 광서(廣捿)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빈망(贇望)의 증손자다.재주가 빼어나서 일곱살

                     에 이미 글을 지었다. 학문과 수행을 열심히 하여 사우들이 추증하는 바가 되었다. 문집이 있다. 

 

[문행(文行)]

 

이   형(李   炯) : 자는 자회(子晦)이고 호는 덕옹(德翁)이니 유일인 면(㴐)의 증손자이다. 이름내는 길을 사양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니 풍모와 위의가 우뚝하였다. 유집이 있다. 

이몽종(李夢鍾) : 자는 제뢰(帝賚)이고 호는 지진재(志眞齋)이니 덕옹(德翁) 형(炯)의 아들이다. 경전과 역사서를 연구하면

                     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꾸미고 다듬는것에 일삼지 않고 뜻을 독실히 하여 진지하고 순수하니 사우들이

                     모범으로 삼았다. 유집이 있다. 집 짓는 것을 논의하고 산 아래에서 배움을 권하고 후생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온힘 다 넉넉하게 서로 도우고 방후예 종화(鍾和)가 행장을 지었다.

이재록(李載祿) : 자는 유경(裕卿)이니 유행으로 이름난 홍종(洪鍾)의 아들이다. 사우들과 절차탁마하여 그 덕성의 바탕을

                     성취하였다.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이재근(李載懃) : 자는 이로(彛老)이고 호는 일촌(逸村)이니 유일인 면(㴐)의 현손이다. 행의가 순정하게 갖추어졌고 문장

                     으로 명망이 높았다.

이   현 (李 炫) : 자는 회경(晦卿)이니 원종훈인 숙(潚)의 손자이다. 조간송(趙澗松)의 문인으로 문학과 덕행이 세상 사람

                     들의 추앙을 받았다. 유집이 있다. 

이종신(李宗臣) : 자는 봉약(封若)이고 호는 병와(病窩)이니 원종훈인 숙(潚)의 후손이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

                     웠으며 문장과 행의를 일찍 성취하였다.  유집이 있다.  

이시인(李蓍仁) : 자는 공달(公達) 호는 미음(嵋陰)이니 종신(宗臣)의 손자이다. 경전에 잠심하여 뜻을 구함에 게으르지

                      않았다. 문집이 있다. 

이유간(李有幹) : 자는 경한(景翰)이고 호는 미와(薇窩)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명배(命培)의 현손이다.. 일찌기 과거 공부에

                     나아가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세번 실패하고는 돌아와 육경(六經)을 연구하여 학업을 더욱 깊이

                     성취하였다. 유집이 있다.

이수원(李壽元) : 자는 효이(孝而)이고 호는 농와(聾窩)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명배(命培)의 후손이다. 집안의 교훈을 이어

                     받아 경전과 역사를 연구하였다. 소암(所菴) 이병원(李秉遠)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등과 교유하면서

                     강마하였다. 문집이 있다.

이수헌(李壽憲) : 자는 성달(聖達)이요 호는 눌헌(訥軒)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빈망(贇望)의 현손이다. 허성재(許性齋)의

                     문인으로 아우인 수기(壽箕)와 함께 문학과 행의로 이름이 높았다. 예학에 특히 조예가 깊었으며

                     유집이 있다.

이복흠(李馥欽) : 자는 윤실(允實)이고 호는 쌍암(雙巖)이니 유일인 의망(倚望)의 후손이다. 문학이 매우 주밀하였으며

                     필법이 굳세고 힘이 넘쳤다.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성취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유집이 남아있다.

이성흠(李性欽) : 자는 성호(聖浩)이고 호는 율계(栗溪)이니 수원(壽元)의 아들이다. 경전과 역사서를 깊이 연구하고 후학

                      들을 가르쳐 그문하에서 학문을 성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문집이 있다. 

이수철(李壽澈) : 자는 사형(士瀅)이고 호는 인암(仁菴)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빈망(贇望)의 현손이다. 허성재의 문인으로

                      일찍 스승의 문하로 나아가 마음속으로 따르면서 예학과 경적을 공부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유집이 있다.

이현팔(李鉉八) :  자는 순약(舜若)이고 호는 학고(學皐)이다. 유행으로 이름난 유성(有星)의 종손자이다. 허성재(許性齋)의

                      문인으로  뜻과 행의가 높고 맑았다. 늘 스승의 가르침을 복응하며 어진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유집이 있다. 

이현기(李鉉基) :  자는 내홍(乃洪)이고 호는 임고(林皐)이니 문과에 급제한 윤룡(潤龍)의 증손자이다. 허성재(許性齋)의

                      문인으로 일찍 스승의 문하로 나아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터득하였다. 만년에는 임천(林泉)에 터를

                      잡고 살면서 남들에게 알려지기를 꺼렸다. 유집이 있다.[

 

[덕업(德業)편]

 

[원종훈(原從勳)]

 

이    무(李  珷) : 호는 덕고(德皐)이니 명관(名官)인 중현(仲賢)의 아들이다. 정국원종훈무우후(靖國原從勳武虞侯)에 녹권

                      되었다. 

이   숙(李   潚) : 자는 여징(汝澄)이고 호는 갈촌(葛村)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정(瀞)의 아우이다. 무예가 뛰어나 임진왜란

                      때는 창의를 하였으며 정유재란때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선무훈에 녹권되었으며

                      관직은 군수에 이르렀다. 학서(鶴棲) 유태좌(柳台佐)가 묘갈명을 지었다.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명환(名宦)]

 

이맹현(李孟賢) : 자는 사성(師聖)이고 호는 근재(覲齋)이니 절의로 이름 높은 개지(介智)의 아들이다. 세조때 문과에 올라

                     장옥서(長玉署)에 들어갔다. 항상 임금을 모시고 경연(經筵)을 베풀 때 마음을 다해 진실하게 아뢰곤 하

                     였다. 외직으로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는데 문학이 화려하고 정치의 공적이 많았다.  

이중현(李仲賢) : 자는 준성(遵聖)이고 호는 율간(栗澗)이니 맹현(孟賢)의 아우이다. 성종 때 생원과 진사가 되고 문과에

                     올라 부제학이 되었으며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매양 경연에 들어서는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

                     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야 말로 왕이 갖추어야할 덕목이라고 아뢰었다. 잠규(箴規)와 경계문(警戒文)에

                     마음을 다하였으며 외직으로 고을 부사를 지낼때 치적이 많아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문집이 있다.

 

[문원(文苑)]

 

이훈호(李熏浩) : 자는 태규(泰規)이고 호는 우산(芋山)이니 유일로 지낸 의망(倚望)의 후손이다. 척암(拓菴) 김도화

                     (金道和)의 문인으로 경학(經學)이 정밀하고 독실하였으며 문장이 폭 넓고 무르익었다. 문집이 있다.

[선시(善詩)]

 

이수찬(李壽瓚)  : 자는 가옥(可玉)이고 호는 해아(海亞)이니 유일 계현(季賢)의 후손이다. 시에 능하다는 평판이 있었으며

                      수천 편을 지었는데 강남의 선비들이 모두 전하여 외웠다. 시집이 있다.

[선필(善筆)]

 

이유채(李有綵) : 자는 치소(致素)이니 유일로 지낸 의망(倚望)의 증손자이다. 서법이 정밀하고 오묘하여 금석문은 그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 자못 많다.

이유현(李有顯) : 자는 원경(元卿)이니 유일로 지낸 의망(倚望)의 증손자이다. 문장과 필묵이 넉넉하였고 필법이 굳세고

                     힘차서 사우들이 추앙하였다.

이유주(李有柱) : 자는 경욱(景郁)이고 호는 미음(薇陰)이니 효자인 두망(斗望)의 증손자이다. 행의와 문필이 모두 뛰어나 

                      사우들의 칭송을 받았다. 방산(舫山) 허동(許董)이 묘갈명을 지었다. 유집이 있다.

이재흠(李在欽) : 자는 경칠(景七)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빈망(贇望)의 후손이다. 필법에 공을 들여 당대에 이름이 알려졌

                     다.

 

[절의(節義)]

 

이   오(李  午) : 호는 모은(茅隱)이며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고려 공민왕 때 진사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

                     다. 후에 남쪽으로 옮겨와 함안에 은둔하였다. 그때 홍재(洪載), 조열(趙悅)과 함께 나라 잃은 신하로서의

                     의로움을 지켰으며, 태종 때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문집이 있으며 인구서원(仁衢書院)에

                     향사되었다. 

이개지(李介智) : 오(午)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나라잃은 신하로서의 절의를 스스로 지켰다. 호조참판

                      (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효자(孝子)]

 

이희연(李喜連) : 자는 경철(景澈)이고 유일(遺逸)인 계현(季賢)의 손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를 섬김에

                      효도로써 봉양함을 지극히 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예를 다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다.

                      참봉으로 천거되었다.

이경성(李景成) : 자는 득지(得之)이니 원종훈인 무(珷)의 아들이다.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고기를 입에 대

                      지 않았다. 어머니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여 잠시도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후에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제수받았으나 곧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모시고 학문을 배웠는데

                      남명이 매우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재유(李載裕). : 자는 덕경(德卿)이고 호는 방추재(傍楸齋)이니 문행으로 이름난 몽종(夢鍾)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섬김

                      에 그 몸과 뜻을 모두 잘 받들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그때마다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상제(喪制)를 마쳤다.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경전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인기(李仁基) : 자는 인수(仁叟)이니 문행으로 이름난 재록(載祿)의 아들이다. 어느날 떼강도가 집에 들었는데 마침

                     다른 곳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밤중에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해를 입었고 어머니는

                     바야흐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도적들과 싸우다가 어머니를 구해놓고 다시 와서 도적들과 싸워

                     해를 입었다. 후에 좌윤(左尹)에 추증되었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묘갈명을 지었다.

이경배(李慶培) : 자는 명재(命栽)이고 호는 상우재(尙友齋)이니 유일 홍종(洪鍾)의 손자이다.  부모가 병이 들었을 때

                      손수 약을 달이고 대변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살폈다. 상을 당하여서는 삼십리 밖에 장례지내고 매월

                      초하루 보름에 성묘를 하였다. 고개를 넘다가 바위에 걸려 발이 상하자 문득 벼락이 와서 바위를 깨뜨

                      렸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하늘이 감응하였다고 말했다.

이의망(李倚望) : 유일편에 나와 있다. 도적의 변을 당하여 조부와 부친이 모두 해를 입었다. 그는 평생 머리에 패랭이를

                      쓰고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매월 초하루 보름에 성묘하였다.   

이중배(李重培) : 자는 자화(子華)이고 호는 포와(浦窩)이다. 문행으로 이름난 재근(載懃)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섬겼다. 아버지가 연어회를 먹고 싶어하자 앞 내에서 한 자나되는 연어가 뛰어 나와서

                     이것을 대접해 드렸다.그래서 그 연어가 나온 곳을 감성포(感誠浦)라 이름하였다. 

이두망(李斗望) : 자는 군칠(君七)이고 호는 모재(茅齋)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명배의 아들이다. 과거공부를 그만 두고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부모님이 병이 들자 7년간이나 약을 다려 드리고 대변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살폈

                     다. 어버이가 농어회를 먹고 싶어하자 한 자나 되는 농어(鱸魚)가 앞 내에서 솟아 나왔다.  이런 까닭으로

                     이곳을 노계(鱸溪)라 불렀다. 후에 감찰(監察)에 추증되었으며 문집을 남겼다.

이담수(李聃壽) : 자는 이수(耳叟)이고 호는 침류정(枕流亭)이니 원종훈 숙(潚)의 현손이다.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 대변

                      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치료해 드렸다. 유망(儒望)으로 천거되어 덕천원장(德川院長)을 지냈다. 

이현각(李鉉珏) : 자는 진오(振五)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명배(命培)의 후손이다. 모친에게 종기가 나자 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낫게하였다. 어머니가 학질에 걸려 호랑이 고기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자 저절로 죽은 호랑이

                      가 있어서 그 고기를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효부(孝婦)]

 

이 씨(李氏) : 본적은 여주(驪州)이고 군수를 지낸 이학(李鶴)의 딸이자 효자 이경성(李景成)의 부인이다. 시어머니를 지극

               한 정성으로 섬기었는데 어느날 복어(鳆魚)를 구워서 드렸더니 시어머니께서 나누어 주었다. 이씨는 복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핑게를 대고 먹지 않았다.세월이 흘러 이씨가 임종할 때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 내가 시어머니를 섬김에 다른 일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복어를 먹지 않는 일 한 가지는 어른을 속인 잘못을

                면할 수 없구나" 라고 하면서 끝내 미안하게 여겼다. 

이 씨(李氏) : 본적은 재령(載寧)이니 경(瓊)의 딸이자 농포(農圃) 광주(廣州) 안종해(安鍾海)의 부인이다. 집이 가난하여 삯

                바느질을 하고 방아 품을 팔아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노동이 고단한데다 춥고 배고팠지만 조금도 슬픈 낯빛

                을 보이지 않고 정성을 다하였다. 후에 효부로 천거되었다. 

 

[정렬(貞烈)]

 

권 씨(權 氏) : 본적은 안동(安東)이니 좌랑(佐郞)을 지낸 극태(克泰)의 딸이자 참의(參議)를 지낸 이재록(李載祿)의 부인이

                다. 강도가 들어 남편이 해를 당하자 관청에 호소하여 도적을 잡아 그 배를 갈라 간을 씹었다. 며느리와 함께

                아비 없는 손자를 정성껏 길러서 장가를 들이고 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에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소암(所庵) 이병원(李秉遠)이 묘갈명을 지었다. 

이 씨(李 氏) : 본적은 전의(全義)이니 효자인 이인기(李仁基)의 부인이다.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갔다가 시가로 돌아와 보

                니 도적의 변을 당하여 시아버지와 남편이 함께 세상을 떠났다. 도적을 잡아서 복수를 하고 어린 자식을

                길러서 장가를 들이고 나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자결하였으며 후에 함께 정려를 받았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기문을 지었다.

류 씨(柳 氏) : 본적은 전주(全州)이니 세미(世湄)의 딸이자 생원(生員)인 재령(載寧) 이희필(李喜弼)의 부인이다. 일찍 남편

                을 여의고 장례와 제례를 정성껏 하였다.복을 마치고도 검은 옷을 입고 노끈으로 띠를 띠기를 삼년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이 씨(李 氏) : 본적은 재령(載寧)이니 유곤(有坤)의 딸이자 함안(咸安) 조정규(趙貞奎)의 부인이다. 스물 세살에 남편을

                여의고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시부모가 살아계셔서 차마 뜻대로 하지 못하고 절의를 온전하게 지켰다.

                조카인 용운(鏞運)을 양자로 삼아 집안 혈통을 이었다. 고을과 도에서 포상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이 씨(李 氏) : 본적은 성산(星山)이니 재한(在漢)의 딸이자 재령(載寧) 이선흠(李繕欽)의 부인이다. 나이 스물 아홉에 남편

                을 여의고 따라 죽으려고 약을 먹으려 하자 시아버지가 " 나는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 라고하여 부인은

                즉시 약을 토하고 살아나 시아버지를 정성껏 섬겼다. 향리에서 감탄하여 상을 주었다.

이 씨(李 氏) : 본적이 재령(載寧)이고 복영(馥榮)의 딸이자 순흥(順興) 안정종(安鼎鍾)의 부인이다. 남편이 병이 들자

                열 손가락을 잘라 몇 날동안이나 피를 흘려 넣기도 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정성을 다하여 염을하고

                장례를 지낸 다음 안방으로 몰래 들어가 따라 죽었다. 고을과 도에서 비를 세웠으며 우산(芋山) 이훈호

                (李熏浩)가 비명을 지었다. 

 

[규원(閨媛)]

 

하 씨(河 氏) : 본적은 진양(晉陽)이고 목사(牧使)를 지낸 경리(敬履)의 딸이자 절의로 이름난 이개지(李介智)의 부인이다.

                성품이 고요하고 조용하며 간결하고 엄숙하였다. 연만해졌을때 친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으면

                대답하기를 "몸이야 편안하게 지낸다마는 다만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구나"

                하곤 하여 자손들이 게을러질까 걱정한 것이었다.

백 씨(白 氏) : 본적은 부여(扶餘)이니 별시위(別侍衛)를 지낸 계분(啓芬)의 딸이자 명환(名宦) 이중현(李仲賢)의 부인이다.

                성품이 요란하거나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손들이 비단으로 적삼을 해 입으시라 권하면 말리면서

                말하기를 " 내가 어릴 때 노란 물을 들인 베옷을 입곤하였다. 선비들이 모두 그러하거늘 하물며 내가 비단옷

                을 덧입겠느냐?"라고 하였다. 

정 씨(鄭 氏) : 본적은 초계(草溪)이니 부사를 지낸 전(銓)의 딸이자 원종훈 이무(李珷)의 부인이다.

                  지극히 효성스러우면서도 위의를 갖추었다.

                  아들 경성(景成)이 일찌기 부모를 봉양하고자 벼슬길에 나가려 하니 정씨가 말하였다. 

                 " 사람이란 태어나면서 부터 천명이 정해져 있거늘 어찌 함부로 분수를 넘어서는 일을 생각해야 되겠느냐?

                 하물며 벼슬살이를 하게 되면 자식이 수고롭고 어미는 편안하며, 벼슬에서 물러나면 자식도 편안하고 어미

                 도 편안하느니라. "

                 이 말을 듣고 경성이 마침내 뜻을 거두고 나아가지 않았다. 

 

[과환(科宦)편]

 

[문과(文科)]

 

이윤룡(李潤龍) : 자는 익성(翼成)이고 호는 삼편재(三便齋)이니 학행으로 이름난 빈망(贇望)의 손자이다. 헌종 때 문과에

                     올라 지평(持平)을 거쳐 도정(都正)에 까지 올랐다. 유집이 남아있다. 

 

[사마(司馬)]

 

이희정(李喜精) :  유일로 지낸 전(琠)의 아들이다. 명종때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희중(李喜中) :  희정(喜精)의 아우이며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희익(李喜益) :  유일로 지낸 계현(季賢)의 손자이며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희필(李喜弼) :  호는 모재(茅齋)이니 유일로 지낸 계현(季賢)의 손자이며 선조때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효행으로 이름났

                      다. 

이철신(李喆臣) : 자는 충경(忠卿)이고 호는 농고당(聾瞽堂)이니 효자 재유(載裕) 의 현손이며 헌종때 사마시에 합격하였

                     으며 유집이 남아있다.

  

[무과(武科)]

 

이    항(李  炕) : 자는 명언(明彦) 이니 원종훈 숙(潚)의 손자이다. 인조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해남현감을 지냈다.

이    만(李  熳) : 원종훈인 숙(潚)의 손자다. 효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이유경(李有暻) : 자는 상지(祥之)이고 호는 청심재(淸心齋)이니 문행으로 이름난 몽종(夢鍾)의 후손이다. 정조때 무과에 

                     급제하여 영장(營長)을 지냈다.

이승모(李承模) : 자는 종원(宗遠)이고 호는 사우당(思友堂)이니 영장을 지낸 유경(有暻)의 아들이다. 헌종때 무과에 급제

                      하여 우후(虞侯)를 지냈다.

 

[음사(蔭仕)]

 

이이백(李而栢) : 자는 간보(幹甫)이니 유일로 지낸 면(㴐)의 아들이다. 관직은 승사랑(承仕郞)을 지냈는데 문학과 행실로

                      존중되었다.

이이단(李而檀) : 자는 근보(勤甫)이니 원종훈 숙(潚)의 아들이다. 관직은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