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운구서원 고려삼절사 삼은(茅隱, 琴隱, 晩隱) 선생

황와 2020. 5. 25. 22:17

운구서원(雲衢書院) 삼은(三隱) 절의사(節義士)

 

장소 : 합천군 가회면 두심동(황매산 입구 동네)

 

운구서원(雲衢書院)

 

삼문과 강당인 운구서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운구서당은 정면 4, 측면 2칸의 목조와가 팔작지붕 양식이다

1786(정조 10)에 주변 유림의 건의에 의하여 운구대(雲衢臺) 곁에 운구서원(雲衢書院)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1796(정조 20)에 홍재(洪載), 이오(李午), 조열(趙悅) 선생을 봉안하였다.

1833(순조 33)에 한 차례 중수를 하였으나,

1868(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1923년에 홍재(洪載)의 후손인 홍승부(洪承富)등이 중심이 되어 문중의 뜻을 모아

선조가 은거하였던 두심동에 건물을 저어 운구서당(雲衢書堂)이라 현판하였다.

 

1. 주벽(主壁) - 모은(茅隱) 이오(李午) 선생

 

()는 모은(茅隱), ()은 재령(載寧)이며, () 일선(日善), () 함안(咸安)이다.

()은 일찌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면서

의리(義理)의 학문(學問)에 독실(篤實)하여 당세(當世)의 사림(士林)에게 추앙(推仰)을 받았다.

공양왕(恭讓王) 때 성균관(成均館)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국운(國運)이 이미 쇠잔함을 보고는 벼슬하지 않았으며,

이내 고려(高麗)가 망하자 여러 현인(賢人)들과 함께 송도(松都) 교외(郊外)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망복수의(罔僕守義)의 결의(決意)를 표명(表明)하고는

()쪽으로 내려와서 함안군(咸安郡)의 모곡리(茅谷里)에 복지(卜地) 은거(隱居)하였다.

()은 그 자신이 끝까지 고려(高麗) 왕조(王朝)의 유민(遺民)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복거지(卜居地)의 주위에 원장(垣墻)을 쌓아 이 담밖(墻外)은 신왕조(新王朝)의 영토(領土)이지만,

담안은 고려(高麗) 유민(遺民)의 거주지(居住地)인 고려동(高麗洞)임을 표방(標榜)하여

망복수의(罔僕守義)의 표지로 삼았던 것이다.

후에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에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끝내 출사(出仕)하지 아니했다.

유시(遺詩) 20()이 실기(實記)에 수록(收錄)되어 있다.

우리 재령이가의 자랑스런 할배이시다.

 

2. 금은(琴隱) 조열(趙悅) 선생,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학자.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금은(琴隱). 판도판서(版圖判書) 천계(天啓)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전서(典書)벼슬에 있던 어느날 밤에

판서 성만용(成萬庸), 평리사(評理事) 변빈(卞贇), 박사 정몽주(鄭夢周), 전서 김성목(金成牧),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논하였는데,

이색이 말하기를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떠났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하여 결의가 되었다.

그 뒤 홍재(洪載이오(李午)와 더불어 함안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니

비가애영(悲歌哀詠)으로 세월을 보냈다.

1394(태조 3)왕이 공조전서를 제수하여 출사할 것을 종용하여 고사하지 못하고

한양궁(漢陽宮)에 들어갔는데, 태조가 탄금(彈琴)한 곡조를 요구하니

전왕(前王)의 연석에서도 탄금을 고사하였는데,

지금 왕의 청을 받아들이면 후일에 무슨 면목으로 선왕을 지하에서 뵙겠습니까.”라고 거절하였다.

1399(정종 1)왕이 수찰을 내려 태조의 어진(御眞)을 부탁하자,

그는 입대(入對)하여 옛날에 공민왕의 어진 요청에도 불응하였다는 이유로 불응하니 정종이 노하여 투옥하였다.

태조가 이 사실을 듣고 곧 석방하게 하였다.

후인들이 그 의리를 흠모하여 운구서원(雲衢書院)을 지어 봉향하였다.

저서로는 금은실기가 있다.

 

3. 만은(晩隱) 홍재(洪載) 선생

 

만은(晩隱) 홍재(洪載)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709년의 풍산홍씨 족보(豊山洪氏族譜)에서의 기록이다.

여기에는 홍재(洪載)가 문과에 급제하여 좌산기(左散騎)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한 홍보(洪保)의 아들로 되어 있고,

자신은 문과에 급제하여 소윤(少尹군사(郡事)를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보이는 기록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1360-1438)14244월에 찬술했다는 행록(行錄)이 있다.

1786년에 주변 유림의 건의에 의하여 운구대 곁에 운구서원(雲衢書院)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1796년에 만은(晩隱) 홍재(洪載), 모은(茅隱) 이오(李午), 금은(琴隱) 조열(趙悅)을 봉안하였다.

1833년에 한 차례 중수를 하였으나,이때 우리 6대조 할배께서 출금을 모금하여 수백금 전달한 기록이 남아있다. 

1868년 조정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서원이 훼철된 뒤,

근래 그 자리에 운구서당 이라는 이름으로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5년에 만은선생실기(晩隱先生實記)를 우리 재령이씨창원종친회에서 발간 배포한 바 있다.

 

 운구대(雲衢臺)

 

운구대(雲衢臺)는 두심리 마을 높은 곳에 선박의 형태를 하고 있는 바위로,

그 위에 올라가면 인근의 전답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데다,

황매산 밑에 자리하고 있어서 풍경이 매우 좋은 곳이다.

이곳에는 ‘운구대’ 및 ‘만은선생장구지소’라는 글씨가 해서로 새겨져 있는데,

누가 언제 쓴 것인지 알지 못한다.

각자된 글씨의 현재 상황으로 보아 운구서원이 세워진 이후의 어느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인다.

                                                                  운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