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산하 동범문화 선인들
맑게 놀았으니 멋진 이야기 하나 남기지 않으랴
낙동강 뱃놀이 즐겨 뛰어난 절경 보고 시문 짓기
임진왜란 영웅들의 풍류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
1607년 정월의 용화산 동범은 대단한 것이었다.
함안·창녕 일대 낙동강에서 벌인 뱃놀이는 용화산 동범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그런데 용화산 동범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에는 이전 뱃놀이가 나오지 않는 반면
이후 뱃놀이 기록에는 용화산 동범이 빠짐없이 나온다.
그만큼 용화산동범이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창녕·함안 두 고을에서 선정을 베풀었고
임진왜란을 맞아 분투한 한강 정구,
젊은 나이 당대 우뚝한 학자였던 여헌 장현광,
임진왜란 왜적에 맞서 싸웠던 경술 박충후 당시 함안군수가 이끌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이를 증거하는 뱃놀이가 1700년 3월 21일에 있었다.
93년이 지났지만 기억은 생생했다. <모계문집>에 '창암동범록'이 나온다.
함안 사람 모계(茅溪) 이명배(李命培·1672∼1736)의 글을 모은 <모계문집>에 '창암동범록'이 실려 있다.
좌장은 경북 영해 사람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년)이었다.
집안은 가난했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숙종의 부름을 받아 거의 날마다 임금과 세자를 가르친 학자였다.
이현일은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1694년 4월 옥에 갇혔다가 7월부터 추운 함경도 종성에서 귀양을 살았다.
1697년 5월 나이가 일흔이 되었다는 이유로 따뜻한 전라도 광양으로 옮겨져 1699년 2월까지 살았다.
그 뒤 임금은 유배를 풀었지만 사간원·대사헌이 반대하였다.
게다가 돌림병이 겹쳐 하동 악양과 진주 청원(지수면)에 머물며 명령을 기다렸다.
1700년 2월 사헌부에 이어 사간원이 죄인 명부에서 빼주었다.
경양대. |
갈암은 고향 가는 도중에 함안·밀양에서 조상 산소를 보살피고 영산현(창녕군 영산면) 객사에 들렀다.
당시 영산현감은 권두경(權斗經·1654~1725)인데 갈암의 제자였다.
게다가 참의·참판·대사헌 등에 오르내린 데다 성균관좨주를 맡는 등 사림에 대한 영향력도 컸다.
현감은 스승을 영산 사람 신몽삼(辛夢參·1648~1711)의 강변 별장(강서·江墅)으로 모셨다.
뜨락과 섬돌이 감당 못할 정도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권두경은 '창암동범록 후서(後序=뒤에 붙인 서문)'에서 배를 타기까지 과정을 이렇게 적었다.
"늦봄 강가에 비가 가득 내리고 김이 서렸다.
바깥 너른 들판에서 언덕을 거니니 글과 같고 그림과 같았다. 선생이 즐거워하였다.
마루에 올라 이리저리 오가고 여기저기 바라본 다음 배를 잡아타고 물을 거슬러 올랐다."
배에서 보는 풍경은 어땠을까.
"강가를 따라가니 언덕이 돌아나오고 층층 벼랑 오래된 구멍들은 귀신이 깎고 파낸 듯하다.
즐겨 낚시할 돈대는 벼랑이 강가 흙이 되었고 백보 거리에 인가가 있다.
한 굽이 또 도니 바로 창암(蒼巖)인데 옛적 망우당이 오두막을 지었던 자리다.
강물은 돈대를 패옥처럼 휘감고 배는 창암을 휘감으며 떠간다.
창암이 다하니 이윽고 멈추어 노를 내려 흐름 따라 내려간다.
비는 개고 흩뿌리기를 거듭하는데 김도 서리고 구름도 모였다 흩어지니 기이하다.
하얀 모래와 그 너머 드넓은 푸른 풀이 이곳 강호를 으뜸으로 멋지게 하였다."
날이 저물 즈음 선생은 돌아갔고 뒤이어 한 사람이 용화동범록을 바쳤다.
이를 따라 함께 선유한 이들 이름을 적고는 창암동범록(蒼巖同泛錄)이라 하였다.
모두 마흔여섯이었다.
영산 사람 신대진(辛大晉·1643~1711년)이 쉰일곱으로 나이가 가장 많았고
10~20대도 영산 사람 배순거(裵舜擧) 등 열대여섯이 되었다.
별장 주인은 경위를 적었다.
"한강·여헌·망우당이 용화산 아래서 배를 타고 일찍이 명승을 좇아 함께 노닐었다.
후세에 전하는 기록이 있는데 간송당 조임도가 서문을 지었다.
풍류는 쉬지 않았고 강산은 기다려 주었다.
갈암이 조심조심 바위에 올라 망우대를 바라보았다.
낙동강 정자 아래 배를 띄우고 많은 선비가 창암 물결 위로 함께 거슬러 올랐다.
이렇게 동범한 것을 적었는데 태수 권두경의 붓이다.
용화산은 낙동강 남쪽 물가에 있으니 나의 강변 별장에서 돛단배를 서로 바라보는 자리다.
앞뒤로 맑게 놀았으니 어찌 멋진 이야기 하나 남기지 않으랴."
시문도 붙였다.
갈암 이현일의 한시에서 운을 딴(次韻) 것이다.
"계수나무노를 젓던 용화산이 얼마나 세월이 지났나/
드높은 풍류 남은 운치 남주(南州)를 뒤흔드네./
오늘 신선의 뱃놀이로 옛날 즐거움을 찾아간다/
꽃다운 행적 백세를 흘러 더불어 전해지리."
밝고 가볍다. 반면 갈암의 원운(原韻)은 어둡고 무겁다.
"옛적 망우당이 의리로 창칼 들던 시절 떠오르네/
영웅의 풍모 장사의 절개로 동주(東州)를 차지했네/
이제 맥없이 바라보니 샘물의 근원이 막혀 있네/
말없이 탄식하며 푸른 흐름을 굽어본다."
샘물의 근원을 막은 것(泉原隔)은 자기를 귀양보내도록 만든 반대파 신하들이었을까.
창녕·함안 일대 낙동강 뱃놀이에서 용화산동범을 떠올렸다는 기록은 이밖에 몇몇 더 있다.
영남 유학의 대가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는
1885년 대구 현풍 도동서원에서 배를 타고
문인 장승택·안찬 등 33명과 함께 경양대와 용화산 일대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합강정에서 자는 등 며칠을 머물렀는데 여헌 장현광의 후손이었기에
당연히 선조의 자취가 떠올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앞선 시기 1628년 4월에도 있었다.
조임도와 양훤(1597~1650) 등 9명이 경양대 아래에서 달밤에 배 타고 술 마시며 놀았다.
네 가지 아름다움-좋은 때(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감상하는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과
두 가지 어려움-어진 주인(賢主), 훌륭한 손님(嘉賓)을 두루 갖춘 자리였다.
조임도와 양훤은 각각 경양대하선유기(景釀臺下船遊記)와 경양대동범록을 남겼다.
조임도는 한 해 뒤에 한시도 지었다.
"…고개에 구름 달을 토하니 맑은 빛이 동하고/
강가 나무 바람을 머금으니 기운이 상쾌해지네/
만고 영웅은 외로운 새 지나간 흔적 같으니/
천년 형승에 술동이를 연다네…".
여기서 만고 영웅은 당연히 곽재우다.
낙동강은 모래로 유명하다.
경남에서는 지류인 황강이나 남강 유역에 모래톱이 여기저기 누워 있다.
다만 본류는 창녕 남지와 창원 동읍 본포 일대가 예전에 그랬다.
400년 전에 일대 선비들이 낙동강에 크게 모여 뱃놀이를 벌였다.
1607년 음력 1월 27~29일이니
임진왜란 끝나고 8년 2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좌장을 맡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
함안군수 박충후(朴忠後·1552~1611)·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세 사람이 뒤를 이었다.
모임 이름은 정구가 용화산하동범(龍華山下同泛)이라 붙였다.
용화산은 남강이 낙동강에 드는 남쪽에 있다.
동범은 여럿이 하는 뱃놀이다.
함안 선비 이명고를 시켜 동범에 참여한 35명의 이름을 적게 하고 <용화산하동범록(錄)>이라 했다.
동범 말석에 참여했던 24살 청년 간송당 조임도가 1620년 '용화산하동범록 추서(追序)'를 썼다.
함께했던 종매부 34살 안정에게서 동범록을 얻어본 뒤였다.
성명을 새 종이에 옮겨쓰고 화공을 구하여 뱃놀이를 그리고 책을 만든 과정을 적었다.
'추서'를 보면 이렇다.
정구·장현광 일행이 경북 성주에서 배타고 와서 저녁에 곽재우의 창녕 망우정에 묵었다.
이튿날 아침 망우정에서 나와 함안 내내(남지철교 근처)에 올랐다.
주위 산천의 경치와 암벽의 기이함을 살펴본 뒤 돌아와 쉬었다.
31명(함안 14, 영산 10, 창녕 1, 현풍 1, 성주 2, 고령 1, 출신 불명 2)이 더 모였는데 배가 좁아 다 타지 못했다.
조식·조방 형제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신초 등이 술잔을 돌렸다.
술상은 간결하고 예의를 갖추었으며 화락·경건하여 시끄러운 웃음도 없고 장난스럽지도 않아 숙연하고 화목하였다.
(한시를 쓰고 노래를 하였다는 기록은 안 보이지만 그래도 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저녁이 되어 한강이 가마를 타고 먼저 잠자리로 갔다.
곽재우와 박충후도 각각 망우정과 관아로 돌아갔다. 배에 탔던 사람들도 흩어졌다.
제자 10명 남짓과 함안 고을 자제들이 남아 나루에 유숙하면서 정구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 정구·장현광이 강 건너 북으로 가면서 동범이 마무리되었다.
청년 간송당은 동범에서 정구의 영웅호걸다운 재덕(英豪才德), 장현광의 따뜻하고 두터운 기상(渾厚氣像),
곽재우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흉금(灑脫胸襟)을 보았다.
이런 인물들과 세상을 함께 살면서 같은 배를 타고 몸소 뵈었으니 대단했던 것이다.
"정말 한 시대의 훌륭한 모임이었고 인간세상에 장한 일이었다."
용화산하동범지도(之圖)도 있다.
'추서'를 쓸 때 화공이 그린 그림이 원본인 듯한데 1758년 간행된 <기락편방(沂洛編芳)>에 실려 있다.
기락이 낙동강이니까 '낙동강의 아름다운 이야기' 정도 된다.
경승 여덟을 상류서부터 차례로 넣고 오언절구를 붙였다.
용화산 훌륭한 모임 용화승집(龍華勝集),
청송사 저녁 종소리 청송모경(靑松暮磬),
도흥보에서 돌을 찾음 도흥수석(道興搜石),
내내촌의 맑음을 감상함 내내청상(柰內淸賞),
경양대의 기이함을 자세히 봄 경양기촉(景釀奇矚),
웃개에 떠다니는 돛단배 우포추범(藕浦追帆),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평사낙안(平沙落雁),
창암=망우정에서 함께 배를 탐 창암동주(蒼巖同舟)다.
조임도가 쓴 취정록(就正錄)을 보면 유쾌한 장면이 나온다.
"곽재우가 웃으며 '내가 보기에는 여헌이 한강보다 낫다'고 한강 정구에게 말했다.
한강이 '망우당의 소견이 옳소'라 답하고는 여헌 장현광을 장하게 칭찬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성경침이 좌중에서 손을 저으며 '먼저 그런 말씀부터 마시오.
내게는 다만 스승이 있을 뿐이오' 말했다
이후경도 곽재우를 보면서
'망우당의 의논은 어리석음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서로 한바탕 재미있게 말씀들을 하였다."
곽재우는 9살 많은 정구에게 대놓고 솔직하게 말을 했다.
정구는 이를 고깝게 듣지 않고 11살 아래 후배 정현광을 듬뿍 칭찬했다.
이런 가운데 곽재우보다 9살 많은 성경침과 6살 아래인 이후경이 끼어들어
한 명은 깎아내리지 말라 하고 또 한 명은 헛소리 말라 했다.
스승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상하 구분 않고 흉허물 없이 터놓고 말해도 되는 즐거운 풍류요 문화였다.
동범의 중심 네 명 가운데 셋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정구는 1592년 강원도 통천군수 시절 왜적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최초로 돌렸고
왜적 핍박을 받아 금강산에서 자살한 하릉군(선조의 형)의 시신을 찾아 염습했다.
곽재우가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인 사실은 따로 적지 않아도 될 정도고
박충후는 경북 상주 함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군사를 모아 싸웠다.
장현광은 당시 모친상중이었는데 왜적을 피해 구미 금오산으로 숨었다.
정구는 1580~81년 창녕현감, 1586~87년 함안군수를 지낼 때 지역에 선정을 펼친 인연이 있다.
또 장현광을 "뒷날 우리 사문의 스승이 될 사람"이라며 지역의 젊은 선비들과 관계를 맺어주기도 했다.
남은 31명에서 무기를 든 인물은
신초(1549~1618), 이숙(1550~1615), 노극홍(1553~1625), 조방(1557~1638), 박진영(1568~1641),
이명념(1571~?), 신응(1572~1609) 7명이다.
나머지는 참전 기록이 없다.
먼저만 20살 이상은 12명이다.
임진왜란 당시 나이가 60살 이상으로 많거나(이길 65살·성경침 60살)
부모처자와 더불어 피란한(조식·신방즙·이후경·이도자 등) 사정이 있다.
이 중 유해(1565~1612)는 누나가 왜적에게 죽는 모습을 숨어 지켜보아야 했다.
한편 조식·조방 형제의 경우는 가문 내부 역할 분담이 보인다.
장자 조식은 가문 보전을 위하여 가솔을 데리고 피란했고
차남 조방은 곽재우 휘하에서 왜적 격퇴에 힘을 쏟았다.
10대 이하로도 곽재우의 아들 곽형(1578~1612)을 비롯해 12명이 있었다.
전란은 끝났지만 풍찬노숙의 쓰라림이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었을 시절이었겠다.
주) 나의 6대조 황재(篁齋) 휘 이 우(李 嵎)자 할아버지께서도 진주에서 여기까지 오셔서
동범 행사에 참석하셨는지 합강정 시 두 편을 남기신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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