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큰집 윗대 선조 산가 벌초하고 지수초등학교 둘러오다.

황와 2018. 9. 16. 21:26

18.9.16 큰집 윗대 선조 산가 성묘하고 동생 개축집과 지수초교 둘러오다.

          (수의동 6대 황재조, 안심방 5대 조모 의령남씨, 택동 11대조 부사과공)


오늘은 큰집 종손이 책임진

윗대 선조 상가 성묘하는 날

후손 우리는 당연히 모여든다.

지난 주일날 우리집 할배 산소는 이미 마쳤다.

증조 이상의 할아버지 조상

오늘 큰집 주관으로 벌초하는 날이다.

부산 병철 종손 형제 조카 오고

큰집 형제 조카 참석하고

우리집 나와 사촌 동생 참석하니

세 집안 식구 여남명 장정들 벌초 작업하고

세 집 여인네들 벌초 음식 장만하니

온통 잔칫날이 되고 만다.

새벽부터 배망골, 뒷뫼 집단지 청소하고 

내가 갔을 땐 뒷뫼 마치고 내려오더라.


    


아침 푸짐한 반찬 곱슬밥 먹고 

커피 한 잔까지 푸짐한 아침 식사다.

월아산 장군대봉 중턱 주손 병철 양선조 묘 베고

씰미 앞산 한 팀으로 큰집 병일 동생 파견하고

아침 먹고 두 갈래 나뉘어  

우리 팀은 나와 병석, 동현 동생과 조카들 셋

먼 집현 수의동과 금산 안심방으로 떠나고

다른 팀은 병철, 병일, 동권 동생 셋

가까운 택동 11대조 사과공 할배 묘소 가기로 했다.

우리 조는 화물차에 타고 금산면 지나

수의동 올라 황재 할배 묘소 깔끔하게 청소하고 

추석 성묘를 오늘 대신했다.

젊은 조카들이 열심히 작업하니 고맙다고 어깨 두드렸다.

오르내리며 주머니 불룩하게 알밤도 주웠다.


다음은 금산면 외진 동네 안심방

국사봉 허릿길 임도 몇 구비 돌아 

안심방 고개마루에 차 대고 

국사봉에서 바로 내려오는 등대 중간 쯤

급경사 헐떡이며 쉬엄쉬엄 올랐다.

산소 오르니 숨이 가빠 주저 앉았다.

이미 산 전체 서어나무 식묘지 

제초작업 해 두었으니 둥근 산능선

소나무 능선에 줄지어 섰다.

남강 바람이 능선을 타고 넘는 곳

온 사방이 우리 할머니 풍경 조망처다.

쉽게 마치고 나니 상쾌하였다.

급경사 내려와서 돌아오는 길 

금호못 둘러 돌고 질매재 넘었다.


    

      

그런데 다른 팀 새길 찾아 쉽게 간다고 까불더니

산속에서 길과 병철 동생을 잃어

세 시간 헤매다가 기진맥진

동생은 용고미 저수지 둑에서 찾았으나

벌초작업도 못하고 집으로 퇴각했단다.

어쩌랴! 우리라도 가서 해야지.

택동 마을로 들어가 고속도로 아래 농로터널 통과하여

예전 용고미 아이들 고개 넘어가는 산길 

지금은 통행 없으니 길 뚫어 올라

고속도로 자동차 생생 소리나는 언덕 

우리 소종중 맨 윗 조상

11대조 부사과공 휘 명(蓂)자 할아버지 묘소

쌍 예치기 소리 울며 순식간에 해 치웠다.

난 낫을 들고 산소에 난 나무 뿌리까지 갉아내니 

온 세상 노오랗게 기력 다해 퍼질고 앉고 만다.

이 체력 나이는 속일 수 없나보다.  

동생 조카들 눈 최고 어른의 모습

그들 교훈의 본을 보이도록 지친 힘 썼다.      

결국 오늘 작업은 우리 조가 완수했다.

참가한 아이들에게 다음에도 꼭 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고맙다고 칭찬해 주었다.

조상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위해 하는 거라고 일렀다.

집에 돌아와 점심상 함께 먹고

설사로 아프다는 동생 만나 관찰하고

새로 개축하는 집 지붕 만들고 테라스 달고 

온 방안 도배작업 중 

도와주는 사제(査弟) 만나 고맙다고 두 손 잡았다.


    


고속도로 돌아오는 중

함안-마산 정체 된다고 해서 

지수에서 빠져나와 지수초등학교 둘렀다.

우리 양아버지 인자 호자 

지수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

삼성 이병철, 럭키 구인회 한국 재벌 원조와 동창이시다.

그러나 우리 양아버진 스물 셋 나이에 일본 객지에서

불귀의 객 되셔서 잿상자로 돌아 오신 요절자이시다.

그 아버지 우리 가계(家系) 주손(胄孫)으로서 

유적이 남아있는 지수초등학교(智水初等學校)

지나칠 수 없어서 사진에 담기로 했다.

올해 진주시에서 전국경영자총협회와 더불어  

한국 기업가정신 수도를 선포하고

경영자 박물관을 만들어 공개한다고 했다. 

전면 붉은 소나무 멋지게 전지되었고    

고 연암 구인회 돌비도 보이고

충무공, 세종대왕, 신사임당 상도 그대로 있다.

큰 꿈을 가지라는 입지(立志)비 교문 앞에 섰다.

아버지 유적이라 생각하고 정성들여 떴다.

일제시대 여기 일본인 지주가 살았기에

진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연 공립학교로

백년사에 가까운 학교다. 

내 훈장 할아버지께서는 장자에게

신학문을 남 먼저 배우라고

삼십 리 먼 길 보낸 최초의 학교다.

지소 나룻배 건너서 시성 고개 넘고  

민등 들판 가로 질러서

승산 마을 학교에 닿으면 아마 파죽음 신세

하루 일제식 신식교육 일과 수업 마치고 나면

간 길로 되돌아와야 하는 매일 통학

그 먼 길 어린 아이로서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러나 집안 중흥 과제

종손의 짐이 너무나 무거웠을 게다.

일찌기 열네 살 초등 학생이 

굼실댁 진양정씨 훈장의 딸과 혼인하여 

학교 귀갓길 처갓집으로 직행하기도 했다한다. 

그 양어머니 나를 정성으로 길러주셨다.

단목골댁 생모께서 여년생 동생 태어나자마자

양자로 떼어낸 부족한 젖

동네 아줌마 동냥젖 얻어 먹이고

밥물 암죽으로 일정심 길러내셨으며

5학년 여남 살 때 신우신장염으로 뚱뚱 부어  

죽음 직전에 사방 약초 구해 살려내 주셨고

중학생땐 새벽 기차 통학 발 시리다고

매일 신발 부엌불에 데워 주신 내 어머니시다.

그 부모님이 연유한 지수학교 줄을 잇는다. 

지금은 송정으로 학교 이름 옮겨 가 버리고

폐교로 방치된 학교 

향나무들이 숲처럼 멋대로 자랐다.

돌아오며 질긴 인연을 되새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