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얼 관련 국경일 지도 자료
삼 일 절 ( 3월 1일 ) |
1. 지도 목표
· 삼일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전개 과정을 알게 한다.
· 삼일 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알게 한다.
·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겪었던 우리 민족의 수난을 알게 한다.
· 삼일 정신의 참뜻을 알게 하고 국가 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 창녕에서의 삼일 운동 전개 과정과 삼일 민속 문화 제를 열게 된 동기를 알게 한다,
2. 지도 내용
· 삼일 정신의 참뜻과 전개 과정
· 창녕에서의 삼일 운동과 전개 과정 및 삼일 민속 문화제
· 삼일절 국기 게양 방법
· 애국 애족 정신과 국가 발전
3. 지도 과정안
관련 창녕 얼 |
관 련 덕 목 |
관 련 교 육 및 단 원 |
호 국 정 신 |
애 국 . 애 족 |
2-2-국 5.우리 나라의 명절 4-1-국 1.유관순 3-1-도 10.나라를 위해 애쓰는 마음 3-2-음 21.유관순 3-2-사 2.우리 고장 창녕의 옛날과 오늘 5-1-도 9.나라와 나 6-1-국 1.삼일 정신 6-1-사 2.근대화의 노력 |
단 계 |
지 도 내 용 |
자 료 및 유 의 점 |
사 전 지 도 |
· 독립 운동가 조사 · 일제 시대 생활상 조사 · 독립 열사들의 위인전 읽기 · 창녕의 독립운동 이야기듣기 · 독립운동 진행과정 조사 · 삼일절 노래 지도 · 독립 선언서 해설 지도 |
· 위인전 (독립열사) · 비디오 · 삼일 민속문화제 포스터 또는 팜프렛 · 조부모님에 이야기 듣기 · 백과 사전, 국사사전 등 과제학습 제시 |
당 일 지 도 |
· 삼일절 기념식 · 삼일 민속문화제 참가 (영산) · 삼일절 국기 달기 · 태극기 그리기 · 삼일절 역사 영화 보기 · 순국 선열에 대한 묵념하기 |
· 삼일절 기념식에 참석하고 삼일 민속 문화제를 관람하도록 지도 · 태극기를 정확히 그릴 수 있고 바르게 달 수 있도록 지도 · 식순 및 프래카드 |
사 후 지 도 |
· 삼일 독립운동 전개과정을 조사하여 보고서 쓰기 및 토론 · 삼일절 국기 달기 확인 · 삼일절에 관련된 글짓기, 그림 그리기, 포스터 그리기 · 애국 선열 전기를 독후감 쓰기 · 삼일 민속문화제 참가 소감 발표회 · 독립기념관 찾아 보기 |
· 일제 식민지 시대의 어려웠던 점을 알고 독립 투사들이 독립 을 위해 노력했던 점을 느끼도 록 한다. · 삼일정신을 되살려 국가 발전에 기여 하도록 심화시킨다. · 그림, 글짓기, 포스터 |
4. 평가
・독립운동의 일어난 배경과 창녕에서의 독립운동 사례를 아는가?
・국기 달기, 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였는가?
5. 지도상의 유의점
・ 삼일 정신은 조상의 빛난 얼이며 애국 애족심이며 자주 독립의 자세임을 강조한다.
・ 삼일 운동 당시 우리 겨레의 경제적 낙후나 시대적 어려움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지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 삼일 운동을 가시화 할 수 있는 시청각 매체, 도서 등을 안내하고 지도해서 지난 과거의 사건으로만 인식하지 않도록 지도한다.
・ 삼일 운동이 직접 일어났던 영산의 유적지를 방문하고 전개 과정을 알도록 하여 우리의 피속에 조상의 삼일 운동 정신이 깃들여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6. 참고 자료
가. 유래와 의의
◆ 삼일 운동
3.1운동은 한국이 1910년 일제에 합병 당한 후 그들의 무서운 식민 정책과 헌병과 경찰의 무단통치 밑에서 고통과 신음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나고 1919년 1월 프랑스의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모든 민족은 원하는 형태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민족자결 대원칙)는 말에 용기를 얻어 민족 대표 33인의 영도 아래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독립선언서를 세계에 공포하고 전국의 남녀 노소가 일제의 총칼에 맨주먹으로 궐기하여 자주 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기미 독립운동이다.
( 원인 )
군국주의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침략하기 위해 을사 보호조약을 맺고 1910년 강제 합병한 이래 한민족의 전 국토를 뺏고 조선 총독부를 두어 총독 정치와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력 정치로 우리 나라 지도자와 애국 투사를 투옥하고 재산을 약탈하였고 토지를 빼앗았으며 국민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고 고향을 버리고 흩어져야 했다. 그들은 3개 사단의 육군 병력을 주둔시키고 진해와 영흥만에 해군 함대를 주둔시켰으며 일본 헌병과 경찰 관서를 전국에 713개나 설치하여 1912년에 5만 2천 건, 1917년에 13만 5천 건, 1918년에 14만 2천 건의 사건으로 애국 지도자와 백성을 투옥, 고문, 치사, 처형하기를 예사로 하여 우리 민족을 분노와 눈물 속에 기회만 노리고 있었고 폭발 직전에 있었다.
·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독일, 오스트리아) 대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등) 의 전쟁(1914~1918)을 끝내기 위해 ’평화 극복안‘ 14개 항목을 제시하였는바 민족 자결주의 대원칙에 호응하여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정정당당하게 자주독립의 기운이 넘치게 되었고 1918년 11월 종전 후 파리 강화 회의를 개최하게 되니 미국과 상하이(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있었음)의 애국 동포들이 모여 조국 독립운동을 착수하고 미국 대통령에 건의하였으며 한편 일본의 수도 도오쿄오에서는 우리 나라 유학생들이 모여 2.8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사실이 국내에 전달되자 기독교에서는 이승훈, 천도교에서는 손병희, 불교에서는 한용운 등 33인의 독립 투사들이 긴밀히 연락하여 각지에서 정성과 힘을 모으게 되었다.
· 일제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막아내기 위하여 매국노와 친일파들을 앞세워 총독 정치를 찬양하는 허위 문서를 만들어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여 민족 대표들의 조국 독립 호소를 방해하였고 일본에 볼모로 데려간 영친왕(조선 고종 황제의 아들)을 그들의 황족인 나시모토요시코(방자)와 강제 혼인시켜 신혼여행이란 명목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끌고 가서 세계 열강의 대표들에게 한국과 일본이 동화되었다고 시해하였다. 이같은 응모가 서울 장안에 전파되자 쌓였던 울분이 일시에 폭발하게 되었고 일시에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전개 모습)
· 도오쿄오 유학생들의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이 국내에 퍼지자 전국의 부형과 백성들의 충격이 컸고 특히 고종 황제의 시해 후 한달 가까운 국장 기간 동안 민족 대표들은 독립선언 준비를 비밀리에 추진하여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태극기를 만들어 국장 일인 3월 3일이 다가오자 전국 각지에서 황제의 인산(장례)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 수만 명을 이용하여 3월 1일 정오 민족 대표 손병희 등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탑골공원 (파고다공원)에서 반포하고 남녀 학생을 선두로 수십만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온 장안을 휩쓸었다. 이 독립선언서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전국 각지로 전파되어 일시에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남녀노소 국민 모두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민족 대표들은 서울의 종로 태화관(중국집)에 모여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서로 축배를 들여 격려한 다음 일본의 경찰에 잡혀갔다. 질서정연한 가운데 시위 행진한 수많은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우렁찬 만세 소리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저녁때가 되자 기마(말탄)헌병과 군인들을 동원한 일본 놈은 총칼로서 시위를 저지하였다.
독립선언서에 표명한 민족의 숭고한 정신과 공약 3장으로 천하에 약속한 고도의 질서를 지켜가면서 정의와 자유 독립을 위하여 광명 정대하게 최후의 싸우며 1인까지 전진하였다.
1919년 4월에 해외 및 국내의 민족 대표들의 중국의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로 모여들어 임시 정부원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을 건립하는 첫 단계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임시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숭고한 항일 투쟁을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새롭게 인식하도록 주의를 환기시켰다.
당시 (3~5월) 피해를 살펴보면 ① 시위 운동 집회 수 1542회 ② 운동에 동원된 인원 수 2,023,000명 ③ 살해된 인원 수 70,509명 ④ 부상당한 인원 수 15,961명 ⑤ 검거 당한 인원수 46,948명 ⑥ 소실 당한 교회당 수 47개소 ⑦ 소실된 학교 수 2개소 ⑧ 소실된 민가 수 715호 등 한국 민족의 희생을 내기로 잔인 무도한 일제의 경찰과 군대는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결과)
삼일 운동의 성과로 첫째, 자유와 독립을 죽음으로써 찾을 줄 아는 대한 민족은 고도의 문화 민족임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잔인 무도한 일제의 야만성과 무능함을 세계에 폭로하였다. 둘째, 이 운동을 통하여 한국 민족은 민주 조국인 대한민국을 건립할 수 있었으니 왜적의 침략을 배제하고 새 나라를 건국하되 군주제도를 청산하고 민주공화국을 건립하게 된 것은 3.1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이 운동을 통하여 세계는 비로소 한국 문제의 해결 없이는 동양이나 세계의 평화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넷째,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헌법이 기미 독립 정신을 그 건국의 모체로 규정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결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독립 선언문 》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 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 만대에 고하야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하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하야 차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여 차를 포명함이며, 민족의 항구 여일한 자유 발전을 위하여 차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순응 병진하기 위하야 차를 제기함이니,
시 천의 명명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 공존 동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라, 천하 하물이던지 차를 저지 억제치 못할지니라.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작하야 유사이래 누천 년에 처음으로 이민족 겸제의 통고를 상한 지 금에 십년을 과한지라. 아 생존권의 박상됨이 무릇 기하이며, 심령상 발전의 장애됨이 무릇 기하이며, 민족적 존영의 훼손됨이 무릇 기하이며, 신예와 독창으로써 세계 문화의 대조류에 기여보비할 기연을 유실함이 무릇 기하이뇨.
희라, 구래의 억울을 선창하려 하면, 시하의 고통을 파탈하려 하면, 장래의 협위를 삼제하려 하면, 민족적 양심과 국가적 염의의 압축 소잔을 흥분 신장 하려하면, 각개 인격의 정당한 발달을 수하려하면, 가련한 자제에게 고치적 재산을 유여치 아니하려 하면, 자자손손의 영구 완전한 경복을 도영하려 하면 최대 급무가 민족적 독립을 확실케 함이니 이천만 각개가 인마다 방촌의 인을 희하고 인류 통성과 시대 양심이 정의의 군과 인도의 간과로써 호원하는 금일, 오인은 진하야 취함에 하강을 좌치 못하랴 퇴하야 작함에 하지를 전치 못하랴
병자 수호 조규 이래 시시종종의 금석 맹약을 식하얏다 하야 일본의 무신을 죄하려 안이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아 조종 세업을 식민지시하고, 아 문화 민족을 토매인우하야 한갓 정복자의 쾌를 탐할 뿐이요 아의 구원한 사회기초와 탁락한 민족 심리를 무시한다하야 일본의 소의함을 책하려 안이하노라,
자기를 책려하기에 급한 오인을 타의 원우를 가치 못하노라. 현재를 주무하기에 급한 오인은 숙석의 징변을 가치 못하노라.
금일 오인의 소임은 다만 자기의 건설이 유할 뿐이요 결코 타의 파괴에 재치 안이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가의 신운명을 개척함이요 결코 구원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타를 질축 배척함이 아니로다.
구사상 구세력에 기미된 일본 위정가의 공명적 희생이 된 부자연 우 불합리한 착오 상태를 개선 광장하야 자연 우 합리한 정경 대원으로 귀한케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써 출치 안이한 양국 합병의 결과가, 필경 고식적 위압과 차별적 불평과 통계 수자상 허식의 하에서 이해 상반한 양 민족 간에 영원히 화등할 수 업는 원구를 거익 심조하는 금래 실적을 관하라. 용명 과감으로써 구오를 확정하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기본한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함이 피차간 원화 소복하는 첩경임을 명지할 것 아닌가.
또, 이천만 함분축원의 민을 위력으로써 구속함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차로 인하야 동앙 안위의 주축인 사억만 지나인의 일본에 대한 위구와 시의를 갈스록 농후케 하야 그 결과로 동양 전국이 공도 동망의 비운을 초치할 것이 명하니, 금일 오인의 조선 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영을 수케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사로로서 출하야 동양 지자인 중책을 전케 하는 것이며, 지나로 하여금 몽매에도 면하지 못하는 불안, 공포로서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하는 것이라 이엇지 구구한 감정상 문제이리로.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하도다. 과거 전 세기에 연마 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히기 시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내하야 만물의 회소를 최측하는도다. 동빙 한설에 호흡을 폐칩한 것이 피 일시의 세이라 하면 화풍 나양에 기맥을 진서함은 차 일시의 세이니 천지의 복운에 제하고 세계의 변조를 승한 오인은 아무 주저할것 업스며, 아무 기탄할 것 업도다. 아의 고유한 자유권을 호전하야 생왕의낙을 포항할 것이며, 아의 자족한 독창력을 발휘하야 춘만한 대계에 민족적 정화를 결뉴할지로다.
오등이 자에 분기하도다. 양심이 아와 동존하며 진리가 아와 병진하는도다. 남녀 노소업시 음울한 고소로서 활발히 기래하야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되도다. 천백세 조령이 오등을 음우하며 전세계 기운이 오등을 의호하나니, 착수가 곧 성공이라 다만 전두의 광명으로 맥진할 따름인저!
<공약 3장>
1.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 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2.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정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3. 일제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조선 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성료,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룡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준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 창녕의 삼일 운동
(1) 영산 3.1운동
당시 서울에 유학 중이던 구중회(창녕군 초대 국회의원, 6.25때 남북 생사 불명)가 서울의 연락을 받아 장진수, 김추은씨 등이 주동이 되어 영산 독립 결사대를 조직하고 민족 대표 33인중의 한사람인 신석구씨와 고성의 황태욱 함경도 신태익씨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조삼준씨는 독립신문을 밀양과 의령에 우장과 삿갓을 쓰고 전하였다.
영산 24인의 독립 결사 대원은 모두 천도교 교인이었다.
구중회, 구남회, 김추은, 장진수, 박도천, 김금영, 하영규, 권점동, 이기식, 임창수
김찬표, 조삼준, 김두용, 서점수, 하은호, 신영락, 구판진, 남경명, 이수철, 박중훈
하찬원, 이봉용, 구판돈, 장정수
1개월전 서울 연락을 받고 야간을 이용하여 목판으로 태극기 1만장을 인쇄하고 <대한 독립 만세> 큰 기도 준비한 다음 3월 13일 (음력 2월 12일) 영산 앞산인 남산에서 개춘회라는 명목으로 술자리를 마련하여 놀면서 사람들을 모아 독립 만세 운동을 하려고 하였다.
영산 왜경들이 이를 의식하여 남지 주재소(지서)의 응원을 얻어 모임을 금지시키자 왜경의 총칼을 빼앗아 미나리 강에 던지고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우렁차게 부르며 시가 행진을 하였다. 이때 창녕 경찰서에서 출동하여 주동자 구중회, 장진수, 김추은 3인을 검거 구금하자 분을 참지 못한 21인은 야간을 틈타 창녕 경찰서를 습격하여 구출할 계획으로 창녕으로 가던중 계성 다리 근처에서 왜경과 만나 육박전을 벌렸으며 돌로서 대항하다가 두패로 나누어져 한편은 화왕산 밑으로 해서 남창교를 들어가고 한편은 창락을 통해서 오리정을 거쳐 북창교를 해서 창녕 장날에 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남창교에 이르자 경비하는 왜경과 마주쳐 3인 석방을 주장하였고 북창교에 이른 사람들은 독립 만세를 부르며 창녕 경찰서로 진군하였다. 이로서 영산과 창녕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인 죄로 모두 잡혀 대구 형무소와 마산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해야만 하였다. 당시 행진시 불었던 독립 운동가는 다음과 같다.
「 무쇠 팔뚝 돌주먹 소년 남아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후렴) 다달았네 다달았네 우리 나라에
애국의 정신이 다 달았네 」
・1956.3.11 3.1 독립 기념비를 남산에 세우고 3.1 봉화대를 세워 삼일 정신을 기리고 있다.
(2) 영산 국민학생의 독립운동
당시 영산 보통학교(국민학교) 학생들도 선배들의 뒤를 따라 일제히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행동 강령 3개항과 4개항의 결의문을 내결고 당시 4언제 학생을 모두 영산 장날에 시위하도록 하고 구속된 대원을 구출하며 결사대 뒤를 이어 목숨을 바치며 수업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1919년 3월 27일 수업을 거부하고 교문을 나서 독립만 세를 불렀다,
(3) 남지 장날 만세
1919년 3월 18일 오전 11시 의령 사람 정호권씨에 의해 남지 장날 시장에서 많은 군중에게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남지지서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정호권은 대구 감옥에서 3년형을 살았다.
(4) 파리 장서 사건
민족 대표 33인 중에는 유림 대표가 없으므로 유림은 3.1운동 후 뒤늦게 독자적인 독립 활동을 했는데 파리 장서란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 탄원서로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하여 상해 김창숙씨가 영문으로 번역 우송한 사건으로 창녕군에서 이정후, 노주용, 강신혁등 3분이 서명하였고 고암 계팔의 김희봉씨와 조경섭씨도 독립운동에 각지 연락 활동을 하고 1920년 2월 장날에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고문으로 석방후 별세하였음.
(5) 의병 활동
이방면 노응규, 노승용, 대지면 우재용 등도 일제가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강제 조약을 맺고 간섭을 할 때 의병을 일으켜 의병 대장이 되어 경부 철도 파괴, 일군 시설 파괴, 세금 압수 등 독립군 광복군 활동을 하였다.
(6) 기타 독립운동
창녕 청년회(창녕), 우국 청년회(장마), 애국 동지회 등을 만들어 애국 청년들이 우리 민족의 문맹퇴치, 군민 체육 향상, 독서, 토론회 등의 활동을 통해서 자주독립과 항일 운동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7) 3.1 민속문화제
매년 2월 28일부터 3월 2일까지 3일간 3.1 민속 문화 향상회 주관으로 1959년부터 시작하여 93년도 제34회 문화제 행사를 실시하고 있는데 민속놀이로 괭이 말타기, 호장굿, 서낭대 싸움, 쇠머리대기(무형문화재 25호), 영산 줄다리기(무형문화재 26호)를 하고 횃불 돌리기, 서막식 등 3.1절 영산 삼일 운동의 시발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있고 전국적으로 맨 처음 열리는 문화제로서 많은 사진작가들이 3.1절과 민속놀이 촬영을 위해 모여들며 영산 지방의 독특한 향토 민속놀이 공연이 볼만하다. 그리고 삼일절 기념식 행사를 이곳에서, 경남 도내 기관장이 모여 행사를 하고 있다.
나. 훈화 자료 (기념사)
우리 민족은 건국이래 반만년의 역사를 거룩하게 보전하여 왔으나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36년 동안 실제적으로 국권을 잃었습니다. 국민들은 나라를 빼앗긴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각처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해외에서도 독립을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침략자 일본은 이와 같은 맹렬한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그 탄압의 정도를 더욱 심하게 하였으니 삶의 기본권마저도 박탈당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탄압이 심하면 심할 수록 거기에 반항하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더욱 세차게 회오리 쳤으며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는 피압박 민족의 생존 방향을 제시해준 것이었습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돌아가시고 민심이 크게 자극되어 조국애가 온 국민의 가슴속을 파고들 때 3.1운동의 활동이 구체화되어 갔습니다. 3월 1일 새벽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정오에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운동의 행사가 독립 만세와 함께 이루어졌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평양, 해주, 의주, 길주, 원주, 전주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무저항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 시위 운동은 왜적 관리 3만과 3개 사단의 총칼 속에서 6개월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전국에서 폭발되었으며 사상자 2만 5천 여명, 동원 인원 500여명 투옥자 4만 7천 여명에 달하였습니다.
1949년 10월 1일에 법률 제53호를 국경일로 제정된 삼일절을 맞이하여 조상의 빛난 얼 즉 애국 애족심과 자주 독립의 자세를 배우고 개척의 정신과 협동의 위대함을 깨달아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민 각자의 책임과 의무 및 봉사와 협력을 다시 다짐하여야겠습니다.
다. 관련 학교행사
(1) 식순
. 개식사
. 국민 의례(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 순국 선열에 대한 묵념
. 국민 교육 헌장 낭독
. 학교장 훈화
. 3.1절 노래
. 폐식사
(2) 해설 방송 자료
오늘은 잊을 수 없는 3.1 운동이 일어난 날을 기념하는 3.1절입니다. 뜻깊은 이 날을 맞이하여 3.1운동 속에 담긴 의의를 되새겨 보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각오를 새롭게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는 1910년에 이웃 나라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받아 주권을 빼앗기고 강제로 합병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으며 우리 민족을 탄압하였던 것입니다.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지 꼭 10년째 되던 해 1919년 1차 세계 대전이 막 끝나고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기초한 세계 개조의 큰 기운이 온 누리에 떠돌게 되자 민족 대표 손병희 이하 33인의 영도 아래 3월 1일을 기하여 독립 선언서를 온 세계에 선포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 노소가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일제히 들고 일어섰던 것입니다. 누구의 힘을 믿고 일어섰던 것도 아니요, 적에 대항할 무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맨주먹으로 목숨을 바쳐서라도 독립을 꼭 되찾고 말겠다는 선열들의 숭고한 자주 정신과 누를래야 누를 수 없는 우리의 독립 정신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이 선두에는 여러분의 선배 즉 당시의 많은 학생들이 앞장을 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1 운동이 곧 우리 겨레에게 자유와 독립을 안겨다 준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민족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독립 의지를 더욱 굳게 하는 조상들의 값진 피흘림과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값진 피가 헛되지 않게 하고 세계 속의 한국을 심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 국토 분단의 아픔 속에서 민족이 두 동강이 난 채 비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민족의 아픔을 해결하고 숙원인 통일을 이룩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우리에게는 3.1운동에서 조상들이 보여 준 용기와 단결심이 필요합니다. 모든 학생들이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투철한 애국 정신으로 굳게 뭉칠 때 통일의 그날은 꼭 오고야 말 것입니다.
선열들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피로써 싸운 숭고한 독립 정신과 자주 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오늘을 더욱 뜻깊게 보내도록 합시다.
(3) 삼일절 노래
광 복 절 (8월 15일) |
1. 지도 목표
・ 조국 광복을 위하여 헌신한 선열들의 업적을 알고 애국 애족 정신을 기른다.
・ 민족사에서 광복의 역사적 의의를 알고 민족 중흥의 시대적 사명을 드높인다.
・ 8.15의 의미를 알아보고 우리의 민주 민족 통일 의지를 재확인하게 한다.
・ 광복뿐만 아니라 정부 수립 일을 이해하고 독립 정부 수립의 의의를 알게 한다.
2. 지도 내용
・ 광복절의 유래와 의의
・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가짐
・ 애족 정신과 통일 의지의 마음가짐
・ 국기 달기 지도
3. 지도 과정안
관 련 창 녕 얼 |
관 련 단 원 |
관 련 교 과 및 단 원 |
호 국 정 신 |
애 국 ・ 애 족 |
2-2-바 4. 발전하는 우리 나라 2-1-바 4. 우리 조상 2-2-국 5. 우리 나라의 명절 4-1-국 5. 윤봉길 4-1-도 9. 나라를 빛내기 위하여 4-1-도 12. 통일을 해야 하는 까닭 4-2-도 10. 통일을 위하여 3-2-도 10. 통일의 연 5-1-도 10. 우리 동포 5-2-국 7. 안중근 5-1-음 6. 우리의 소원 5-1-도 12. 평화 통일의 길 5-2-도 9. 우리는 하나 6-2-도 6. 세계 평화의 길 6-1-사 2. 근대회의 노력 6-1-사 3. 국민 생활과 정치 |
단 계 |
지 도 내 용 |
지 도 및 유 의점 |
사 전 지 도 |
・ 광복절 의의 조사 ・창녕 지역의 애국지사 조사 ・일제 시대의 고통스런 생활상 조사 ・광복절 노래 지도 ・광복절 국기 달기 지도 ・제 2 의 광복을 위한 통일 의지를 위해 해야 할 일 조사 |
・백과 사전 ・일제 시대 고통스런 생활상 ・광복절 노래 악보 ・사전 과제 제시 ・인전 (독립 열사) ・비디오 |
당 일 지 도 |
・광복절 기념식 (훈화, 광복절 노래, 선열에 대한 묵념등) ・광복절 태극기 그리기 ・광복절에 대한 영화 보기 ・광복절 의의 (해방, 정부 수립일) ・광복군의 활동 |
・식순 ・엄숙한 자세 ・프래카드 여름 방학 중이므로 학교 이외의 기관에서 실시하는 관련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매우 뜻이다. (독립 기념관 등) |
사 후 지 도 |
・독립 기념관 찾아 보기 ・광복절 글짓기, 표어, 포스터 그리기 ・태극기 달기 확인 ・애국 선열 위인전 읽기 및 독후감 쓰기 |
・방학 중 독서 과제 강조 지도하고 위인전기 읽은 독후감을 쓰도록 한다 ・5~6학년은 국기를 정확히 그려보도록 하고 옛날에 그려진 태극기와 오늘의 태극기를 비교해 본 다. |
4. 평가
・ 광복절의 의의와 유래를 알고 있는가?
・ 국기 달기와 애국 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였는가?
・ 태극기를 바르게 그릴 줄 아는가?
5. 지도 상의 유의점
・ 여름 방학 중의 지도 계획 일환으로 추진한다.
・ 학교 이외의 기관에서 실시하는 관련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유적지나 관련 문헌을 조사해 본다
・ 광복절의 두 가지 의의를 알고 광복 독립 운동 광복되기까지의 우리 민족의 수난사, 우리 조상의 훌륭한 점 등을 알게한 다음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서보다는 제3의 광복으로 남북 통일 의지 실현을 위해 애쓰도록 지도한다
6. 참고 자료
가. 광복절의 유래 및 의의
◆ 제정 : 1949.10.1 법률 제53호 국경일로 제정
◆ 유래와 의의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대한 민국의 정부가 수립된 것을 공포한 경축일이기도 하다.
・1895년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간섭을 받아 오던 우리 나라는 청일.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방이 되고 말았다.
・36년간 생활은 너무도 굴욕적이고 비참하였다. 우리의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강제 노동과 강제 징병, 징용에 시달리며 우리의 역사, 언어, 문자까지도 탄압에 굴복 당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름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였고 전쟁 물자와 식량 공급을 위하여 각종 약탈을 감행하여 괴롭혔다.
・이와 같은 탄압 속에서 조국 광복을 위한 지하운동이 맹렬히 벌어졌는데 해외에서는 각종 외국 정부나 회의에 파견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독립 자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한편 1949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미.영.중 원수가 모여서 우리의 독립을 밝혔고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였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자탄의 위력에 놀란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하였으며 아울러 우리는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 민족 해방과 대한 민국의 건국
・ 일제말기에 10년간 우리는 일본의 혹독한 학정을 받아왔다.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면서 부터 많은 군수품을 필요로 하였다.
・ 따라서 농업에 중점을 두던 한국의 산업을 바꾸어서 군수공업과 광업에 치중하기 시작다. 그후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싸움을 넓혀 가는 동안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아 더욱 식량과 원료를 약탈하였다.
・ 한편 일본은 우리의 민족의식과 문화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민족을 말살하려는 수작을 하였다. 한글을 쓰지 못하고 일본말을 사용하게 강요하였고, 황국 신민의 서사라는 것 을 외우게 하여 우리의 성명까지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였다.
・ 그후 전쟁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일본은 사람들까지도 마구 징벌하였다. 지원병 제도를 만들어 청년들을 속여서 일선으로 끌어가고 다시 징병제도니 학병이니 하여 모든 청년과 대학생을 끌어가기 시작하였다. 또 청년 장정을 군사시설과 군수 공업 또는 탄광으로 끌고가서 강제 노동을 시켰다.
・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고 우리가 사선에서 허덕일 때도 비밀히 지하 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해방을 꾀하는 여러 지사가 있었다. 해외에서도 임시정부 등이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고 광복군 등의 군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 1943년 11월에 미국.영국.중국의 3국 원수는 카이로에서 회의를 열어 일본의 영토 문제를 토의하고 카이로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은 특히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밝혔다.
・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의 결의안을 재확인하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의 위력에 놀란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었다.
・ 1945년 8월 15일은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날인 동시에 우리가 해방된 날이었다. 8.15해방은 우리에게 곧 독립까지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북에는 소련 군대가 진주하여 각각 군정을 펴려고 하였다,
・ 남북은 두 세력의 대립으로 인하여 화해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국토와 민족과 사상이 둘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남한의 민주 진영은 유엔의 협조를 얻어 전국민의 자유의 시대로 남북을 통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토를 통일하고 주권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소련과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였다. 이에 유엔은 1948년 2월 가능한 지역 부터 선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 1948년 5월 10일 유엔 한국 위원단의 감시 밑에 남한에서 역사적인 총선거가 단행되었다. 그 결과 국회가 소집되고 헌법이 제정되어 초대 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박사가 취임하여 8월 15일에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자유 민주의 국가로서 발족한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
◆ 대한민국 건국 악사
・ 1895 강화도조약
・ 1905 을사조약
・ 1910. 8.29 한일 합방
・ 1919. 3. 1 3.1운동
・ 1919. 4.13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
・ 1926. 6.10 6.10만세(순종 국장일)-4.26 순종 서거
・ 1929. 11.3 광주 학생 운동
・ 1941 태평양 전쟁(진주만 폭격) 일본 : 연합군(미. 영. 프. 중. 소)
・ 1943. 11 카이로 회담 - 한국 독립 약속 결의
・ 1945. 7 포츠담 선언 - 한국 독립 확인
・ 1945. 8.15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
・ 1945. 8.15 ~ 1948.8.15 남북한 미군과 소련군 38도선 경계로 진주 군 실시
・ 1948. 2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 실시 결정. 북한 민족 대표 회담 - 북한의 반대로 결렬
・ 1948. 5.10 유엔 한국 위원단의 감시 하에 총선거 실시
・ 1948. 7.17 대한 민국 헌법제정
・ 1948. 8.15 대한 민국 정부 수립 공포 (대통형 이승만)
・ 1948. 12 파리 유엔총회 -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 승인
7. 창녕의 독립 운동가
(1) 백산 우재룡(禹在龍)
우 재룡은 1884년 본군 대지면 왕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를 백산(白山)이라 하였다. 어릴 때에 이사하여 경북 현풍지방에서 자랐으며 다시 경북 청도 풍각으로 옮겨 어린 나이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여 금녕군과 경주, 경산, 영천일대를 무대로 항일 동지를 모으기에 힘써 1903년에 나이 20세의 젊은 나이로 광복회(光復會) 운동을 일으켰다. 그 때 대구진위대(大邱鎭偉大)의 참교(參校)가되었다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병영을 탈출하였고 1907년 정 용기(鄭龍基)가 일으킨 의병에 가담하였다. 연습장(練習將)으로 있으면서 청하(淸河), 영일(永日)의 일본군을 무찌르고 습격한 후에 영천(永川)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 3명을 죽였다. 그 후 부하 70여명을 인솔하고 팔공산으로 이동, 무기 구입차 대구에 잠입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으나 한일합방의 특사로 출옥했다. 1915년 박상진(朴尙鎭), 권영만(權寧萬)군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에 군관 학교를 설립했다. 그 후 권영만과 함께 경주에서 대구로 우송 중이던 세금 8,700원을 탈취하여 무기를 구입하고 3.1운동에 심영택(沈永澤), 소진형(蘇鎭亨 등과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여 중앙 총책임자가 되었으나 1921년 군산(群山)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았다가 1937년에 출옥했다. 출옥한 후 감옥에서 얻은 신병을 무릅쓰고 다시 동지들을 찾아 경우, 하양, 영천 등지를 전전하였으며 1945년 해방이 되자 광복의 기쁨을 안고 상경하여 옛 대한 광복회 간판을 다시 걸고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1955년에 결국 오랜 감옥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향년 72세로 돌아가셨는데 1963년에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2) 노승용
선생의 본관(本貫)은 광주(光州)이며 차는 공일(公一) 호는 담주(淡洲)로 1882년 2월 17일 이방면 석리 용배동에서 출생하였는데 선생의 아버지는 수정(秀禎)으로 호는 항천(恒泉)이었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선비이었던 아버지 항천 선생의 교화를 받아 공부에 열중하고 몸과 마음을 닦기에 힘썼으며 자라나면서 남달리 나라를 걱정하고 시끄러운 세상을 탄식하였다.
22세 되던 해인 1903년 3월부터는 진주 창의장(倡義將)이며 신생의 집안 할아버지인 신암(愼庵) 노응규 (盧應圭)의사의 문하에 들어가서 선생의 가르침으로 날로 어려워지는 시세에 따라 항일 구국 투쟁의 정신을 더욱 불태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의병이 제기되었는데 이때 그는 24세로 스승 노응규를 따라 기호 지방으로 쫓아가 최익현의 의병대에 투신하였으나 그 후 이 의병군이 순창에서 좌절되자 스승과 함께 다시 의병을 모집, 추풍령을 무대로 활약했다. 그는 노응규의 종사관으로 화약의 비밀 전달등 중요 임무를 완수하였는데 근거지는 삼남의 분기점인 충북 황간군 상촌면 물곤리 직평으로 경부선 철도의 파괴, 일군이 시설한 주요 건물 공격 등을 했다.
1907년 1월 21일 노응규 이하 참모군과 함께 청산경무분서원에게 체포되어 한성 경무 감옥서에 구속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해 5월 18일 평리원 재판 중에 노응규는 옥중 순사 하였고 그는 대란 죄라는 죄목으로 유배 7년형을 선고받아 장연군 백령도로 유배되었다.
한일 합방이 있은 1910년 8월에야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경기, 호남, 강원도 등지의 절을 전전 유랑하다가 60노경에 마침내 귀향하여 은거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다가 1950년 5월 9일 세상을 떠나셨다.
4. 훈화 지도
오늘은 일제의 쇠사슬에서 풀려나 조국의 광복을 찾은 날입니다. 1875년 강화도 사건을 (운요호사건) 계기로 그 이듬해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후 우리 나라를 둘러싸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강압적으로 합방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36년 간 식민지 생활로 나라없는 민족으로서 갖은 쓰라린 고통을 겪었습니다.
나라없는 슬픔과 그 치욕을 어찌 말로 다하겠습니까?
일본은 우리 나라 침략에 만족치 않고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을 일으키어 전 동양을 차지하려는 침략전쟁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키어 연합군과 싸우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그들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드디어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활약한 애국지사의 피나는 노력의 결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에게 비극이 찾아 왔습니다. 38선이 그어졌고 분단의 쓰라림을 겪어야 했고 그뿐만 아니라 김일성의 남침으로 동족간에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지금도 김일성은 기회만 있으면 남침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길은 총력안보 태세로 굳게 뭉쳐 힘을 기르는 일입니다. 일본은 오늘날 어떠합니까? 식민지 활동을 정당화하고 교과서 왜곡 등을 일삼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잘살고 국력이 부강해질 때 모든 것은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애국하는 길을 생각해 보고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합시다.
◆ 고당 선생의 생애와 사상
고당 선생은 1883년 2월 1일 (음 임오 12월 24일) 평남 강서부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탄생하였다. 소년 시절을 엄친 창녕 조씨 경영공과 자당 경주 김씨 슬하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17세 때부터 상업에 종사했으나 세기의 전환점에서 뜻있는 젊은이가 상점 가게나 보고 있기에는 조국의 운명은 너무나 위태롭고 동아의 풍운은 너무나 급박했다.
수많은 독립운동 지도자가 해외로 망명의 길을 떠나던 1913년 고당은 이와는 반대로 치욕의 땅으로 돌아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중.일전쟁이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던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일제의 최후발악은 그 절정에 달한 듯싶었다. 창씨개명, 한인의 징병 그리고 <황국신민화>정책 등 일본은 그들의 침략전쟁을 완수하기 위하여 한국인 지도자들의 협력을 얻으려고 갖은 간계와 협박과 탄압을 다했으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선생에게 남은 유일의 안식처이던 교회에도 광풍은 몰아쳤다. 선생이 오래 장로로 시무하던 산정현교회는 끝까지 신사 참배에 항거했고 주기철 목사는 그로 인해서 순교했다. 목사 없는 교회 문을 굳게 닫고 선생은 부인과 자녀를 앞세우고 향리 반석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미구에 찾아올 조국 해방의 날을 확신 속에서 기다렸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지 이틀후 선생은 북한에서 최고의 영도자로서 좌우를 막론하고 전체 민족 역량을 결집하여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폭력은 해방된 이 땅에서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었다.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 최고 수뇌들은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결정한 한국 신탁통치 안을 지지하도록 선생을 강박 했다. 소련의 음흉한 대한 적화 정책을 경계하고 있던 선생은 일신의 영달이나 유혹을 생명을 걸고 물리쳤다. 소련군의 지시 또는 명령에 불복하는 순간부터 1946년 1월 5일 선생은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젊은 조민 당원들은 <고려 호텔> 한방에 감금된 선생을 남한으로 탈출케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선생은 그때마다 “불쌍한 북한 동포들을 버리고 내 육신 편한 길을 택할 수는 없소.나는 동포들과 고통을 함께 나눌테니 동지들은 어서 월남하여 통일 과업 수행에 진력하기 바라오!”하고 당원들의 권면을 물리치고 <치욕의 땅>에서 짓밟힌 동포를 위하여 비폭력 불복종 항쟁의 길을 고수하였다.
북한 공산 집단은 1950년 6월 10일 연금 중인 고당 선생과 남한에서 암약하다 검거된 남로당 고위 간부 김삼용, 이주하의 교환 석방을 제의하였으나 이는 6.25남침 계획을 은폐하기 위한 대남교란공작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 공산 집단은 1950년 6월 25일 무력 남침을 감행하면서 고당을 평야 교외 <특별 가옥>에 옮겨 연금 하였으며 그 이후 선생의 생사 여부는 묘연하였으나 1950년 10월 18일 총살당한 것이 나중에 알려져 1991년 11월 5일 오후 2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라. 관련 학교 행사
(1) 식순
. 개식사
. 국민 의회
. 순국 선열에 대한 묵념
. 국민 교육 헌장 낭독
. 학교장 기념사
. 광복절 노래 제창
. 교가 제창
. 폐식사
(2) 방송 해설 자료
여러분!
명상의 시간입니다.
우리 나라는 해마다 이날 8월 15일을 국경일로 삼고 여러 행사를 가집니다. 올해도 여러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온 대한민국의 학생, 그리고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모두가 기쁜 이날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새장에 갇혔던 새가 푸른 창공을 마음대로 날 수 있게 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까닭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것은 덮어놓고 나쁘고 제것만 제일이라는 배타적이고 또 독선적인 생각이 깊이 뿌리 박혔습니다. 그 결과 우리 나라의 사람은 자기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남의 나라 지배만을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나라의 독립을 잃고 남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 민족은 억눌림에 시달림을 받게 됩니다. 일본의 압박이 심해져 가고 우리의 말과 글마저 빼앗으려 할 때, 여러분도 잘 아는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대한 독립을 외치다 숨이진 유관순 누나도 바로 이 때의 사람입니다.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우리 선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대한 독립을 외쳤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 민족의 외침은 온 세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때 일본은 흉측한 욕심이 드러나 세계 여러 나라의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항복하였습니다. 그 즉시 우리 나라는 해방된 것입니다. 저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한 덩어리로 뭉친 힘이었고 그것은 민족의 생명이요 교훈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침내 우리 민족이 오늘 같은 기쁨을 깊이 깨닫고 더 열심히 몸과 마음을 닦아 힘을 길러야 합니다.
(3) 광복절 노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월 13일) |
1. 지도 목표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알게 한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사례를 알게 한다.
・ 대한민국의 민주 헌법 탄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게 한다.
2. 지도 내용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약사
3. 지도 과정안
관 련 창 녕 얼 |
관 련 덕 목 |
관 련 교 과 및 원 |
호 국 정 신 |
애 국 . 애 족 |
4-1-국 5. 윤봉길 5-1-도 9. 나라와 나 5-1-사 1. 행복한 국민 생활 5-2-국 7. 안중근 6-1-사 2. 근대화의 노력 |
단 계 |
지 도 내 용 |
자 료 및 유 의 점 |
사 전 지 도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일 조사 ・임시정부 요원들의 독립 운동 이야기 듣기 ・독립 열사의 위인전 읽기 |
・ 위인전 (독립 열사) ・ 독립 운동사 ・ 국사 사전, 백과 사전 ・ 비디오 ・ 대한민국 정부 이전에 임시정부 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
당 일 지 도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과 활동모습 ・글짓기, 그리기, 독후감 쓰기 |
・ 식순 및 프래카드 ・ 식은 엄숙하고 정중하게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사례를 3.1 독립 운동과 연계하 여 지도한다. |
사 후 지 도 |
・ 효창 공원, 동작동 국립 묘지 독립 기념관 방문 지도 ・ 애국 선열 조사 및 유적지 방문하기 |
・ 가족 여행 및 방학 중 여행 계획에 삽입하여 유적지나 전시관을 방문하도록 지도 한다. |
4. 평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아는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운동 사례를 아는가?
5. 지도상 유의점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와는 같은 정부는 아니지만 법통이 이어져 왔음을 바르게 이해시킨다.
・ 대한 제국의 패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과정을 함께 이해하도록 지도한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은 내용이 제 6 공화국의 9차 헌법 개정에서 헌법 전문에 삽입되어 민주・민족・세계 평화주의
를 표방하고 있음을 유의하여 지도한다.
・ 삼일 운동, 광복 활동, 임시 정부 활동 등 조국 광복과 독립 활동을 별개의 활동으로 보지않고 전체적인 독립 운동으로 파악하도록
지도한다.
6. 참고 자료
가. 유래 및 의의
◆ 유래와 의의
・ 3.1운동 후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자
・ 1919.3.1 운동 후 한국 광복을 위하여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프랑스가 중국의 땅을 임시로 차용하여 프랑스 인을 위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 일본의 군사적 위협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던 곳임)에 기관을 두고 1919년 4월 11일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고 각도대 의원 30명이 화합하여 임시 헌장 10개조를 발표하고
4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하였다.
・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 이동녕,
국무총리 - 이승만,
재무 총장 - 안창호, 외무 총장 - 김규식, 법무 총장 - 이시영
재무 총장 - 최재형, 군무 총장 - 이동휘, 교통 총장 - 문창범
・ 임시 헌법(전문, 8장 56조)을 제정하고 9월 16일 임시 헌법에 의거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각료를 개편하
였다. 1926년 9월 임시 대통령제가 폐지되고 국무령제를 채택, 그 해 12월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 1932년 1월 이봉창의 일본 왕에게 폭탄 투척사건
1932년 4월 윤봉길의 일본 대장(백천) 폭탄 살해 사건 등을 도왔다고 프랑스 조계에서 쫓겨나 1932년 5월에는 중국의
절강성으로 다시 11월에는 중경으로 옮겨 다니며 광복군 지원, 광복군 무관 양성 등 대일 항쟁에 활약했음
◆ 해외 독립운동
・ 미국 및 하와이 :
이승만 안창호 등이 대한국민회를 만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부수립 자금 및 독립운동 자금을 30만 달라 모금하여
전달하고 미국 정부 및 외국 정부 기관에 대한민국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활발히 하였다.
・ 만주 및 북간도 :
우리 나라 북부 위쪽인 만주와 북간도,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군을 결성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 등 활발한
광복 운동을 벌였다. 유명한 독립 투사로는 지청천 장군,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 안중근 의사 등 수 많은
독립 투사들의 활동이 뛰어났다. 특히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안중근 의사의 이토오 히로부미(일본의 총리 대신)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거사들은 유명한 독립 운동사이다.
・김구는 대한 독립 촉성국민회를 1916년에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해방이 되어 국내에 들어와서도 미국과 소련
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자활 의지를 널리 알렸다.
・임시정부 광복군은 미얀마에까지 파견하여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렸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중국 국군과 연합하여 연합군에 편성되어 일본군과 중국 등지에서 전투를 벌렸다.
나. 훈화 지도
오늘은 대한민국을 탄생하게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곤란했던 애국지사들은 중국의 상하이 프랑스의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내 및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정부로서 외교적 활동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전까지는 대한제국으로서 황제에 의한 군주국이었으나 국민에 의한 민주국가인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제정하고 대통령제 또는 국무령제에 따른 대표자를 선임하는 등 국가적 기본 구조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항하여 펼쳤던 여러 활동들이 일본의 패망을 재촉하게 하였고 이를 빌미로 하여 일본군의 압박에 중국 절강성과 중경 등을 옮겨 다니면서 무관 양성과 대일 항쟁에 활약하였습니다.
그 후,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요원들이 민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에 기초 터를 닦았고 맥을 그대로 이어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데 도왔습니다.
오늘을 탄생하게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뜻을 알고 선열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책을 읽으며 그들의 애국 애족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 통일과 우리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공부하며 튼튼한 어린이가 되도록 합시다.
다. 관련행사자료
(1) 식순
・ 개회사
・ 국민의례
・ 애국선열에 대한 묵념
・ 국민 교육 헌장 낭독
・ 학교장 훈화
・ 폐회사
・ 글짓기, 그리기, 독후감 쓰기 대회
(2) 훈화 자료
《 안중근 의사 》
의사는 1978년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서 천주교인 안태훈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의사가 15세 때 전국 각처에서 동학란이 일어나 의사의 고향인 선천에서도 동학의 이름을 팔아 양민을 해하는 무리가 많았다. 이 때에 의사는 이 무리들을 물리치니 그의 용맹성은 향리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후 의사는 부친을 따라 해주, 진남포 등지에 거주하다가 을사 보호조약으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동지들과 국사를 논하다 뜻한 바 있어 러시아령인 해참위로 건너가 이범윤, 우덕순 등과 더불어 의병 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전병 300여 명의 용사를 길러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서 함경도 경흥 및 회령 일대에서 왜적의 군경과 싸우기를 세 차례, 그러나 적의 수는 아군의 수십 배나 많았을 뿐더러 풍부한 무기를 가지고 대항하므로 마침내 300용사는 한 많은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참패를 당하였다. 그 후, 1909년 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죽이고자 종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씨들과 같이 모의하며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재무대신 꼬꼬호.체프 마중을 받으며 기차에서 내리는 이등박문을 저격하여 이천만 동포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
이리하여 안중근 의사는 33세를 일기로 1910년 3월 26일 이국 땅 만주 여순 감옥에서 왜적의 손에 의하여 사형을 당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겨레의 등불로서 자주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일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바쳤다. 더욱이 그의 늠름한 기상과 고매한 인격은 일인까지도 숭배하게 하였다.
그의 투철한 애국 정신은 그 후 애국 청년으로 하여금 조국 광복의 이념을 굳게 다짐하게 되었고 36년간의 일제 지배하에서 수많은 애국 지사를 낳게 하였다.
《 안창호 선생과 이토오 히로부미 》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 못지 않게 깊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토오 히로부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안창호 선생을 만나 이토오는 마치 옛 친구나 만난 것처럼 말을 걸었습니다.
"안 선생께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이 있소"
"뭔가요?"
"안 선생은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면서 연설을 하신다는 데 그 목적이 도대체 뭐요?"
"귀하가 옛날에 일본을 위해서 하시던 그런 종류의 일을 하기 위해서지요. 그 당시 귀하는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일을 했다지요?"
"그래요. 첫째는 일본을 아주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로는 한국을 셋째는 중국을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였소."
안창호 선생은 껄껄 웃으며
"저 역시 귀하의 뜻엔 동감이외다. 하지만 귀하는 한국이란 나라를 가장 잘 돕는 길을 모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토오는 낯을 붉혔습니다.
"뭐요?"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을 강하게 만들도록 맡겨 놓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이토오는 얼굴을 붉혔습니다.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만약 미국 사람이 일본에 와서 명치유신을 지도하고 일일이 간섭했다면 귀하는 그 일을 잠자코 보고만 있지 않았겠지요? 그렇게 되었더라면 명치유신은 틀림없이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안 그럴까요? 핫핫핫 ......"
그 후로 이토오는 안창호 선생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습니다
근로자의 날 (3월 10일) |
1. 지도 목표
・ 근로의 중요성과 고귀함을 이해시킨다.
・ 근로자의 보호 및 소중함을 인식시킨다.
・ 근로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함을 인식시킨다.
2. 지도 내용
. 근로는 국민의 4대 의무에 속한다는 것 알기
. 근로는 우리 경제 생활의 기본 단위임을 알기
. 근면· 자조· 협동 정신 알기
. ‘일하는 즐거움’ ‘일의 보람’ 에 대한 것 알기
. 근로자의 노력으로 우리 나라가 이렇게 번영해 왔음을 알기
3. 지도 과정안
관련 창녕 얼 |
관 련 덕 목 |
관 련 교 과 및 단 원 |
개 척 정 신 |
근 면 ・ 협 동 |
2-1-바 3. 우리 고장의 여러 모습 2-2-바 3. 살기 좋은 우리 고장 3-2-사 3. 발전하는 창녕 4-2-사 4. 우리 들의 모둠 살이 5-1-도 1. 일하는 즐거움 5-1-사 2. 우리의 경제 생활 5-2-사 2. 농・수산업과 광공업 6-1-사 3. 국민 생활과 정치 6-1-도 3. 최선을 다하는 생활 6-2-사 1. 우리 나라의 경제 발전 |
단 계 |
지 도 내 용 |
자 료 및 유 의 점 |
사 전 지 도 |
. 근로자의 날 의의와 내력 . 근로자 위문 . 근로자에게 위문 편지 쓰기 . 근로의 기쁨 조사 , 근로에 대한 토의 과제 제시 . 향토근로자에 대한 실태 조사 |
・ 비디오 ・ 창녕군지 ・ 근로자들의 실태를 정확히 알고 이들에 고마움을 가지도록 한다.
|
당 일 지 도 |
. 근로자의 날 ( 훈화) . 근로의 기쁨 글짓기(4~6년) . 청소, 학습원 자연보호 활동 . 근로에 대한 그림 그리기(1~3년) . 근로의 중요성에 대한 지도 . 근로 경험 토의 |
・ 식순 및 프래카드 ・ 일하는 자세를 갖추고 일을 마쳤을 때의 기쁜 마음을 직접 느끼고 일이 없을 떼 얼마나 불행한 가를 체험하 도록 한다. |
사 후 지 도 |
. 근로 작업장 방문 소감 . 근로자 위문 행사 소감 . 향토 근로 현장 과제 발표회 . 근로자의 노력과 한국 산업 발전에 관한 발표회 . 근로에 대한 나의 각오 |
・ 근로자들의 노력 결과 우리 나라가 잘 살게 되었고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느끼도록 한다. ・ 학생들의 근로는 공부와 운동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임을 자각하게 한다. |
4. 평가
. 근로의 중요성과 근로의 기쁨을 아는가?
. 근면한 생활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아는가?
. 근로자의 보호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아는가?
. 우리 지역 근호 자들은 주로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가?
5. 지도상 유의점
. 일하는 즐거움은 사례를 들어 일하지 않는 사람과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의 생활 태도를 비교하여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점
을 알도록 지도한다.
. 근로는 권리인 동시에 의무임을 알고 근면한 생활을 하는 것이 국가 발전과 개인의 이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임을 알도록
한다
. 자기 가족 중 각 작업장에서 근로자로 고생하고 가족의 괴로움을 알도록 하고 단지 돈벌이 목적으로만 생각하는 직장 생활
을 바르게 이해하고 위문하도록 지도한다.
. 근로는 꼭 공장이나 작업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부모님은 가정을 깨끗이 치우고
뒷바라지하는 가정의 가사 노동도 중요한 일임을 인식시켜 부모님께 고마움을 느끼도록 지도한다.
.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노사 분규 활동하는 일을 나쁘게만 보는 시각을 바꾸어 그들을 이해하도록 지도한다.
6. 참고 자료
가. 근로자의 날 유래와 의의
(1) 제정
1958. 3.10 대한 노동창립기념일을 근로자의 날로 제정(1973.3.30 대통령령 제 6615호로 제정)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 의욕을 더욱 높이는 행사
(2) 유래 및 의의
◆ 근로자의 날 노동부 행사
・ 모범 근로자 표창
・ 근로자의 고궁 무료 입장 및 극장료 할인
・ 각 기업체 별 특식 제공과 근로자 위안 잔치 실시
・ 근로자의 날 유래
근로자의 날은 국제적인 노동 제일로서 노동자의 명절이다.
1856년 4월 21일 호주 빅토리아 노동자들은 노동제를 개최하고 노동자의 무제한 노동제에 반대하고, 노동시간 단축의
요구 운동을 전개한 후 이 날을 노동 제일로 결정하고 해마다 이 운동을 결행한 바 있었다.
이 영향이 미국의 노동자에게 미치게 됨에 따라 1884년에는 미국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 실시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꾸준히 투쟁하였으며 1884년에는 미국의 전 노동 단체가 매년 5월 1일을 기하여 8시간 노동의 실행을 목적으로 하고 총동맹 파업을 결행할 것을 결의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8.15해방 후 세계적인 판례에 의해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기념했으나 1958년 대한 노총 창립 기념일인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제정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벌여 오고 있다.
이 날은 경제 활동에 있어 가장 기본적 요소인 노동 및 그 주체인 근로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이해하고, 배려하고 있는지를 반성하고 근로의 신성함과 고귀함을 되새기어야 하며 1981년 4월 8일 정부 부처에 노동부가 신설되어 노동자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고 노사 분규 해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 각 지방 노동 지청의 조직과 하는 일
. 지청장 : 지청의 모든 일을 총괄
. 관보과 : 총체적인 사무 관리 및 자체 관리
. 근로 감독과 : 각 사업장의 노동 임금 조정, 근로자의 강제 노동 여부 확인, 임금 산정의 타당성 등을 감독
. 징수과 : 산재 보험료 징수
. 보상과 : 재해자 치료 및 보상
. 직업 안정과 : 실업자 취업 알선, 기능 인력 양성에 힘쓴다.
◆ 근로 기준법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제정된 통일적인 근로 보호법이다. 헌법 정신에 의거하여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조건 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고 향상시키며 나아가 균형 있는 국가 경제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근로자들의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이 국민경제 발전의 전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이러한 법의 목적이 제대로 지켜지려면 근로자의 자각이 선행되어야 하는 바, 우리 한국 근로자들은 근대 기본권에 대한 의식이 약할 뿐아니라 아직도 봉건적 의무 관념이 강하여 아무리 사용자 측이 근로기준법에 위배되는 낮은 근로조건을 강요하더라도 무조건 이에 복종하는 폐단이 많다. 따라서 이 법이 규정하고 있는 최저 기준이 확보될 수 있도록 국가가 강력한 노동 보호 시책을 촉구하고 있다.
지도 원칙 근로기준법을 근로자들의 최저 생활의 보장, 평등한 대우, 봉건적 잔재의 불식 등이 그 지도 원리이다.
나. 훈화 자료
예로부터 노동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신성하고 소중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서 자기 생활에 필요한 문자를 얻을 수 있게 되며 더 행복한 생활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여서 그 나라가 잘 살려면 그 나라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여 생산량을 늘리고 수출을 증대하여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이란 개인이나 국가에 있어서 행복을 낳은 원천이 되는 셈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같이 부존 자원과 자본이 부족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오늘과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력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다시금 노동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망각한 채 종사하는 직업에 따라 노동을 천대시 하는 잘못된 경향이 있으며 노동에 따른 충분한 대가를 보상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례가 있음을 생각할 때 퍽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를 통해서 얻어진 교훈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온 국민이 근로의 보람을 느끼며 땀 흘려 일할 때 개인의 행복한 생활은 물론 잘 사는 나라가 건설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관련 행사 자료
(1) 식순
. 개식사
. 국민의례
. 국민 교육 헌장 낭독
. 학교장 훈화
. 폐식사
. 근로 현장 견학
(2) 방송 해설 자료
근로자의 날은 1958년 대한 노총 창설 기념일인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정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벌여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근로자의 날을 맞아 근로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간섭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히 청소하여 내 교실을 깨끗이 하고 친구들이 함께 생활하는 주변을 말끔히 했을 때의 느낌은 어떨까요? 아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흐뭇함을 느낄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마음에 우러나서 내 집 앞을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면, 나 한 사람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이 깨끗한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기분은 어떨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 생활 주변이 찾을 수 있는 근로의 기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음은 우리의 노력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노력의 땀을 흘리지 않는 곳에 성공의 꽃이 필 수 없고 행복의 열매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것, 보람있는 것, 가치가 있는 것들은 모두 노력에서 이루어지고 피땀의 결과일 것입니다.
오늘이 순간을 노력 없이 헛되이 한다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해 보세요.
성공과 행복은 땀의 대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노동자는 생산 공장에서 땀을 흘리면서 일하고, 농부는 농사를 짓고, 어부는 고기를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고 그물을 칠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우리는, 나는 어떤 땀을 흘려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개 천 절 (10월 3일) |
1. 지도 목표
.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자각토록 한다.
.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도록 한다.
. 단군 신화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으며 민족의 뿌리를 인식시킨다.
2. 지도 내용
. 개천절의 유래와 의의
.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의 긍지
. 민족의 우수성 자각과 민족의 뿌리 인식
. 국기 게양 지도
3. 지도 과정안
관 련 창 녕 얼 |
관 련 덕 목 |
관 련 교 과 및 단 원 |
호 국 .숭 문 |
애 국. 애 족 |
2-1-바 4. 우리 조상 2-2-바 2. 나와 친척 2-2-국 5. 우리 나라의 명절 4-2-도 9. 우리는 배달 겨레 5-2-도 9. 우리는 하나 6-1-사 1. 민족 국가로의 발전 6-1-국 13. 빛나는 조상의 얼 |
단 계 |
지 도 내 용 |
자 료 및 유 의 점 |
사 전 지 도 |
. 단군신화 읽기 지도 . 삼국유사 읽기 지도 . 우리 조상의 뿌리 조사 . 우리역사 읽기 . 한민족(배달겨레)의 의의 . 개천절 노래 지도 . 개천절 국기 달기 지도 |
・ 삼국유사 ・ 단군신화 ・ 우리 나라 역사 ・ 국기 게양 지도 자료 ・ 우리 민족의 뿌리를 정확히 알도록 조사해 보고 다른 나라의 사례도 조사하여 우리 민족의 유구성을 확인한다. |
당 일 지 도 |
. 개천절 기념식 (훈화, 개천절 기념사, 노래 등) . 단군신화 이야기 듣기 . 단군신화에 대한 토론하기 |
・ 식순 및 프래카드 ・ 식은 엄숙하게 진행한다. ・ 단군 신화는 구연 동화를 잘하는 교사가 녹음하여 들려준다. |
사 후 지 도 |
. 단군신화 상상 그림 그리기 . 단군신화에 대한 글짓기 . 홍익인간과 교육이념 . 국기 달기 확인 . 단기 계산하기 1993 + 2333 = 4326 |
・ 단군 신화 그림 ・ 단군 신화와 고조선의 개국 이념인 홍익 인간인 민주 이념이 깃들여 있음을 알도록 한다. ・ 서기를 단기로 계산하는 방법을 지도하여 단군 기원을 알도록 한다. |
4. 평가
. 단군신화를 알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아는가?
. 우리 민족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조상을 섬기는가?
. 우리 민족의 개국과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하도록 다짐하는가?
5. 지도상의 유의점
. 단군신화를 단순한 우화로서 파악하지 않도록 지도하고 다른 나라의 신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여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도록 한다.
. 단군의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을 바르게 풀이하여 우리의 교육 이념이 된 것과 민주적인 우리 민족임을 알도록 한다.
. 우리 역사의 깊이를 단기로 계산하여 오래된 역사임을 확인시키고 이에 대해 외국의 역사를 예를 들어 반만년 역사의 의미를
지도하고 특히 우리 역사의 사실을 그저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옛 역사책에 기록되어 오는 것을 확인하여 만든 역사
임으로 거짓이라는 의미를 갖지 않도록 지도한다.
6. 참고 자료
가. 유래와 의의
◆ 제정 : 1949. 10. 1 법률 제53호 국경일 제정
◆ 개천절 유래와 의의
10월 3일은 단군 왕검께서 우리 나라를 건국하신 개천절로서 우리 나라의 4대 국경일 중의 하나이다. 전설에 의하면 단군은 B.C 2333년에 처음으로 왕검성(지금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이른바 역사적 위업을 경축하고 건국 이념을 되새기며 우리 민족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날이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고조선 시대부터 10월은 상달이라고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넋을 위로하며 춤과 노래로서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행하여졌으며 이는 부족 국가와 삼국 시대까지 전해 왔었다. 해방 이전까지는 음력 10월 3일을 개천 일이라고 하여 단군 왕검을 숭상하고 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 탄압으로 강제 폐지되었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개천절을 지키게 되었다. 1949년에 이르러서 개천 일을 개천절로 바꾸고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여 거국적인 행사를 한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 삼국 유사의 단군 신화
천체의 서자인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 산정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를 베풀고 바람, 비, 구름을 불러 곡식과 목숨, 병과 형벌, 선악 등 360여 가지의 인간의 일을 주관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 한 굴에 사는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환웅에게 빌므로 쑥 한줌과 마늘 스무 알을 주며 이를 먹고 백일 동안 일광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곰은 37일을 기하여 사람이 되고 호랑이는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못하였다. 사람이 된 곰은 혼인할 짝이 없어 늘 잉태하기를 신단수 아래서 빌므로 환웅이 거짓 화해서 이와 교혼하여 단군 왕검을 낳았다. 당고 즉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조선이라 일컬었다. 1천 500년 동안 다스리다 아사달 산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나. 기념사
고려 시대의 중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가고 싶어하므로 하느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었습니다. 환웅은 기뻐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시며 내려갈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 땅을 내려다보신 환웅은 가히 인간이 살만한 곳이라 하여 하느님께 청하였던 바, 하느님께서는 환웅으로
하여금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환웅은 무리 2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 곳을 신시라 하였습니다. 이 때 웅녀가 여자의 몸으로 변하여 혼인하고 단수(박달나무) 아래에서 아들을 낳으시니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과학적으로 생각할 때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여겨지지만 민족 발생에 대하여 어느 나라이고 이러한 신화를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었나 하는 것을 옛날 우리 조상들이 생각하여 전하는 신화를 여기에는 우리 겨레의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썼던 연호도 단군이 나신 해부터 따진 것이며 반만년의 긴 역사를 쌓게 된 것입니다.
다른 민족에게 굴복하여 완전히 그들에게 동화 또는 소멸된 일없는 동양사에 있어 기적적 끈기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근원을 더듬고 단군의 건국 이념을 살피고 조국 근대화의 대과업을 완성하여야 할 우리의 임무와 사명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하면서 홍익 인간의 정신을 체득하고 발휘함으로써 하루 빨리 조국의 통일을 이루고 억만대의 후손을 물려줄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여 행복과 번영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북한이 단일 민족으로 기필코 통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민족 중흥에 앞장설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다. 관련 학교 행사
(1) 식순
. 개식사
. 국민 의례
. 국민 교육 헌장 낭독
. 학교장 훈화
. 개천절 노래 제창
. 폐식사
(2) 개천절 노래
제 헌 절 (7월 17일) |
1. 지도 목표
. 8.15 해방 후 우리 나라의 헌정사를 알고 어려웠던 과거를 이해하게 한다.
.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함을 알고 스스로 법을 지키려는 준법정신을 갖게 한다.
. 법이란 불편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자유와 질서,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필요함을 알게 한다
2. 지도 내용
. 제헌절의 유래와 의의
. 헌법의 뜻과 지금까지의 개헌 상황
.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마음가짐
. 제헌절 국기 달기 지도
3. 지도 과정안
관 련 창 녕 얼 |
관 련 덕 목 |
관 련 교 과 및 단 원 |
호 국 정 신 |
애 국・ 질 서 |
2-2-국 5. 우리 나라의 명절 4-2-국 9. 교통 질서를 지키자. 5-2-도 2. 실천하는 생활 6-1-도 8. 법과 사회 생활 6-1-사 3. 국민 생활과 정치 |
단 계 |
지 도 내 용 |
자 료 및 유 의점 |
사 전 지 도 |
. 헌법의 중요성 조사 . 헌법을 제정해야 하는 까닭 조사 . 헌법 제정의 과정 조사 . 제헌절 노래 지도 . 제헌절 국기 달기 지도 |
. 백과 사전 . 제헌절 노래 악보 . 국기 달기 지도 자료 ・창녕 제헌 의원 조사 ・비디오 |
당 일 지 도 |
. 제헌절 기념식 (훈화, 제헌절 노래) . 우리 나라 헌법의 기본 내용과 준법 정신 . 질서 지키기 |
. 식순 및 프래카드 ・헌법을 지키는 일이 바로 질서를 지키는 일임을 확실하게 지도한다. ・의식은 엄숙하게 |
사 후 지 도 |
. 준법정신 글짓기, 그리기 표어 짓기, 포스터 그리기 . 국기를 단 학생 조사 |
. 명상의 시간 테이프 . 포스터 ・ 좋은 표어를 만들어야 좋은 그림이나 포스터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지도한다. |
4. 평가
제헌절의 뜻과 준법정신 생활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아는가?
5. 지도상의 유의점
. 헌법은 나라의 기본법이며 국가의 기본 얼개임을 알고 그 기본 정신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국제 평화주의에 입각한 준법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임을 알도록 지도한다.
. 준법정신을 가시화 할 수 있는 시청각 매체, 도서, 영상 자료 등을 통하여 지도하도록 한다.
. 준법의 생활화는 공공 질서 준칙을 알고 실천하는데 지도 관점을 두고 생활화하도록 지도한다
. 교통 규칙 준수, 공중도덕 실천을 위하여 직접 현상에 학생을 인솔하여 현장 경험을 익히거나 장면을 촬영하여 무질서한 현장을 보여
주어 스스로 깨우치고 실천하도록 지도한다.
6. 참고 자료
가. 제헌절 의의
◆ 제정 : 1949. 10.1 법률 제53호 국경일로 제정
◆ 유래와 의의
헌법은 나라의 정치를 어떤 형태로 하여야 하는가? 국민의 권리나 의무는 어떠한 것인가를 정한 국가 정치의 근본이 되고 국가라는 집을 짓는 얼개가 되는 으뜸 법이며 법중의 법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헌법이 만들어진 경위는 1910년 한일 합방이 된 후 36년간의 식민 통치 밑에서 신음하던 우리 조상들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미.소 양국의 군정을 겪은 후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북한 측의 반대로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총선거에서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초대 국회의원)을 뽑아 국회를 구성하고 5월 31일에는 제헌국회가 소집되어 헌법 기초 위원이 선출되고 전문위원이 위촉되었다. 이리하여 6월 3일부터 6월 22일까지 유진오 박사의 초안을 중심으로 16회에 걸쳐 회의를 하게 되었고 6월 23일 본 회의에 상정되어 3차에 걸친 심의를 끝낸 후 7월 7일 국회에서 통과되었으며
7월 17일에 공포되어 당일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헌법은 현재까지 9차례 개정되어 왔다.
· 1948. 5.10 총선거 실시
· 1948. 5.31 제헌국회 소집
· 1948. 6. 3 유진오씨의 초안심의 결정
· 1948. 7. 7 국회 통과
· 1948. 7.17 전국 공포 실시
◎ 헌법의 기본 정신
1) 민족주의
2) 민주주의
3) 국제 평화주의
◎ 헌법의 얼개
▷ 전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3.1운동과 4.19민주 이념 계승
조국의 민주 개혁
평화 통일 사명
정의 · 인도 · 동포애에 의한 민족 단결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는 사회 정의 실현
자율과 조화로운 기회 균등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완수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
항구적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
우리들과 자손의 안전과 자유. 행복 확보
▷ 본문(10장 130조)
1장 총강 (1 ~ 9조)
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10 ~ 39조)
3장 국회 (40 ~ 65조)
4장 정부 (66 ~ 100조)
5장 법원 (101 ~ 110조)
6장 헌법재판소 (111 ~ 113조)
7장 선거 관리 (114 ~ 116조)
8장 지방자치 (117 ~ 118조)
9장 경제 (119 ~ 127조)
10장 헌법개정 (128 ~ 139조)
▷ 부칙 6조
◎ 헌법 개정 약사
제헌구분 |
년월일 |
개헌명칭 |
개정된 주요사항 |
비 고 |
1차개헌 |
52.7. 7 |
발췌개헌 |
① 대통령 직선제 ② 국회 양원제 |
부산 파동에서 개정 |
2차개헌
1공화국 |
54.11.29 |
사사오입 개헌 |
①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 철폐 ② 국민투표제 (영토 변경,주권 제한) ③ 자유주의 경제 체제 수정 |
영구 집권을 노려 개헌 재적 203명 중 2/3가 미달되는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로 부결된 것을 사사오입 이론으로 개헌 |
3차 개헌 (2공화국) |
60. 6.15 |
의원 내각 제개헌 |
① 내각 책임제 ② 국민의 기본권 보장 강화 ③ 헌법 재판소 설치 |
4.19 후 국민 여망에 의한 민주적 개헌 |
4차 개헌 (2공화국) |
60.11.29 |
부정 선거 처벌 개헌 |
3.15 부정선거 관여자 처벌 위한 소급법 제정 |
반민주적 행위자의 처벌을 위해 개헌 |
5차 개헌 (3공화국) |
62.12.26 |
국민투표 5.16 후 대 통령제 |
① 대통령 중심제 ② 국회 단원제 ③ 정당 보유 규정 ④국민투표로 개헌 확정 |
5.16 혁명 후 62.12.5 국가 재건 최고 회의에서 가결되고 12.17 국민투표로 개헌 확정 |
6차 개헌 (3공화국) |
69.10.21 |
3선 개헌 |
① 대회의원 정원 수 증가 ② 국회의원의 국무총리나 장관 겸직 ③ 대통령 탄핵소추 규정강화 ④ 대통령 계속 세번 연임 |
․국회의원 수 150명 이상 200명 이하 --> 150명 이상 250명 이하 ․국회의원의 국무총리나 장관 겸임 가능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함 |
7차 개헌 (4공화국) |
72.12.27 |
유신 개헌 (영도적 대 통령제) |
① 통일 주체 국민회의 설치간접 선거 ② 대통령 국회 해산권 신설 ③ 헌법 위원회 ④ 국회 권한 약화 ⑤ 긴급 조치권 |
․지역구 의원 6년 임기 ․유정회 의원 3년 임기 |
8차 개헌 (5공화국) |
80.10.27 |
권력분립적 대통령제 |
① 대통령 권한 약화(7년 단임) ② 대통령 간선제 - 선거인단 선거 ③ 국정 자문회의, 평화통일 정책 자문회의 설치 ④ 비례 대표제 ⑤ 소비자 보호 조항 신설 |
9차 개헌 (6공화국) |
87. 10.29 |
대통령 직선제 |
① 전문 - 대한민국임시 법통 계승 - 4.19민주이념 - 자율과 조화 - 민주 개혁 삽입(전문개정) ② 대통령직선제(5년단임) ③ 비상조치권 폐지(정부권한 약화) ④ 국정감사권 부활(국회권한 강화) ⑤ 사법권 독립 강화 ⑥ 기본권 신장 ⑦ 자유 경제체제 근간으로 하는 사회정의 실현 ⑧ 헌법재판소 제도 ⑨ 국가원로 자문회의 ⑩ 국민경제 자문회의 ⑪ 국군 정치적 중립 - 사전 검열 허가제 폐지 ⑫ 최저 임금제, 복지 향상 |
◎ 창녕군 제헌 의원
구중회 : 영산 사람으로 3.1운동 때 서울에 유학하다가 3.1운동이 벌어지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동지를 결합하여 영산 3.1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분으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헌법 제정에 애썼으나 아깝게도 6.25동란 때 북괴군에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간 후 행방불명되었다.
나. 기념사(훈화 자료)
오늘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 공포한지 ( )돌을 맞이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헌법이란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학교 규칙이나 약속이 있듯이 나라에도 온 국민이 지켜야 할 법률을 만들어 제정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법입니다.
우리 나라의 헌법은 우리 나라가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의 날을 맞이한 후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여기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완전히 통과되어 1948년 7월 17일에 공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기념으로 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법을 소중히 알고 법을 지키려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법을 지키는 것은 학교 규칙이나 부모님, 친구, 선생님과의 약속, 교통 규칙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고 질서 있는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어린이 여러분, 오늘 뜻 깊은 제헌절을 맞아 빠짐없이 국기를 게양하고 더욱더 준법 생활에 힘쓰는 어린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 관련 학교 행사
(1) 식순
. 개식사
. 국민의례
. 돌아가신 제헌 의원에 대한 묵념
. 국민 교육 헌장 낭독
. 준법 모범 학생 표창
. 학교장 훈화
. 제헌절 노래 제창
. 폐식사
(2) 해설 방송 자료
여러분 !
조용히 눈을 감고 방송에 귀를 기울이세요. 오늘은 우리 나라의 헌법이 제정된지 ( ) 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여러 학생들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규칙과 약속이 있듯이 나라에도 온 국민이 지켜야 할 법률을 만드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헌법이 있습니다.
서기 1948년 7월 17일에 헌법이 공포됨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은 주권자로서 법률 앞에 평등하게 되었고 신체의 자유와 아울러 출판 언론 집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당한 민주 국가의 국민임을 세계 만방에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국토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헌법이 제정되었나를 돌이켜보는 동시에 부지런히 공부하여 세계 다른 나라에 뒤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법을 지키고 법을 따를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나라를 더욱 빛나게 하고, 나아가서는 인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한 아무리 훌륭한 법이 있어도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법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고 그런 국민이 있는 나라는 끝내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법을 잘 지키는 정신을 '준법정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은 무척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법을 위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민주 시민으로 법을 잘 지키는 사람만이 그에 따르는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준법정신을 기르도록 합시다.
(3) 제헌절 노래
식목일 ( 4월 5일) |
1. 지도 목표
․ 식목의 중요성을 알고 애림 사상과 자연보호 정신을 갖는다.
․ 바른 식수 방법을 알고 실제로 식수 경험을 갖도록 한다.
․ 한식일의 뜻과 성묘의 의의를 알게 한다.
․ 식목의 필요성을 알고 애림 사상과 자연보호 정신을 갖게 한다.
․ 식수 요령을 알고 식목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2. 지도 내용
․ 식목일의 의의와 중요성
․ 자연 보호와 우리 생활
․ 바른 식수 방법
․ 학교 주의, 학교림, 가정에서 식수 활동
3. 지도 과정안
관 련 창 녕 얼 |
관 련 덕 목 |
관 련 교 과 및 단 원 |
개 척 정 신 |
근 면 . 협 동 |
2-1-국 5. 자라는 우리 2-1-바 4. 우리 조상 3-1-도 9. 더 좋은 강산으로 4-1-도 3.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5-1-음 3. 메아리 6-1-국 5. 한식날 |
단 계 |
지 도 내 용 |
자 료 및 유 의 점 |
사 전 지 도 |
・ 식목일에 대한 의의 조사 ・ 왜 나무를 심어야 할까? 과제 제시 ・ 자연보호와 우리생활 ・ 한식과 조상 공경 ・ 식목일 노래 지도 |
・ 비디오 ・ 나무의 중요성을 사례를 들어 지도한다. ・ 조상은 나무의 뿌리에 해당됨을 비유하여 지도한다. |
당 일 지 도 |
・ 식목일 기념식 (훈화, 메아리 노래) ・ 식목 및 자연 보호 활동 ・ 성묘하기 지도 |
・ 식순 및 프래카드 ・ 식목 및 자연 보호 활동을 땀흘리며 열심히 하도록 배정하고 역할을 부여한다. |
사 후 지 도 |
・ 식목일 글짓기, 그림 그리기, 포스터 그리기 ・ 심은 나무 돌보기 ・ 산림 녹화에 대한 나의 각오 (자연 보호, 산불 예방) ・조상 섬기기 |
・ 그림, 글짓기, 포스터 ・ 식목 행사 후 나무를 계속적으로 나의 나무로서 돌보도록 지도한다. |
4. 평가
・ 식목일에 나무를 심고 가꾸어야 하는 까닭을 아는가?
・ 나무 심기와 자연 보호 활동을 열심히 활동하였는가?
・ 한식날 조상 공경을 위해 성묘해야 하는 까닭을 아는가?
5. 지도상의 유의점
・ 식목일 행사가 노동을 하는 귀찮은 행사로 되지 않도록 지도한다.
・ 나무 심기와 자연 보호 활동은 결국 우리 나라와 우리 인간을 복되게 하기 위한 활동임을 알도록 지도한다.
・ 한식날 성묘가 귀찮은 행사가 되지 않도록 사전 부모에게 안내하여 부모와 함께 성묘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6 . 참고 자료
가. 식목일의 유래와 의의
◆ 제정 : 애림 사상을 보급시키고 전국적인 기념 식수 산림 녹화를 위해 1949년 4월 4일 대통령령 124호로 제정 실시
◆ 식목일 유래
해방 후, 우리 나라에서는 기후 상 가장 적합한 4월 초순경을 식목일로 고르려고 고사를 농림 당국에서 연구한 바,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통일의 날이 양력 4월 5일이며, 또 이조의 성종이 그 해의 농사짓기를 시작하던 날이
4월 5일인지라 민족적 의의와 농정사적 의의를 아울러 생각해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식목일의 처음은 1872년 4월 10일 미국 <네브라스카>에서 당시 식민지 개척인들의 벌채 벌거숭이가 된 상태를
한단하여 한 신문사의 주장으로 만들어져 실시한 것이 그 효시이다.
◆ 한식 유래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 4월 5, 6일 쯤임.
이 날 나라에서는 종묘와 각 능원에 제향을 지내고 민간에서도 성묘를 함
한식의 유래에는 중국 고속에 이 날은 풍우가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 밥을 먹는 습관에서 왔다는 설과 중국 진나라의 현인 개주추가 이 산에서 불에 타 죽었으므로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이 날은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는다는 설이 있음
◆ 거친 땅에 나무를 심어 덴마크를 일으킨 달가스
지금으로부터 약 90년전에 독일과 전쟁을 하여 진 덴마크는 곡식이 가장 많이 나는 남쪽 지방의 땅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다. 워낙 작은 나라가 더 작아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사막과 버려둔 거친 땅뿐이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나지 않는 거친 땅에서 날마다 근심에 싸여 장차 살아갈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덴마크 '에린꼬․미류스․달가스'라는 공병 사관이 있었다. 달가스는 다리를 놓고 길을 내는 일을 할 줄 알뿐 아니라, 또한 학자로서 흙의 성질과 나무와 뜰에 대해서 연구가 깊었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미 우리 나라는 망한거나 다름없다. 어디고 외국으로 도망가야지, 이런 거친 땅만 있는 나라에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들 생각하였다.
이 말을 들은 달가스는 “사실 우리는 좋은 땅을 다 빼앗겼소 그러나, 우리가 이 거친 땅을 갈아서 더 좋은 밭을 만든다면, 잃어버린 땅보다도 더 넓은 땅을 찾게 될 게 아니겠소. 칼과 대포의 힘으로 잃은 것을 우리는 괭이와 낫의 힘으로 돌이킵시다 그려." 이렇게 말하여 사람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돌멩이와 모래뿐인 거친 땅에 밭을 일구다니 어림없는 소리야.“ 라고 웃어넘기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달가스는 이런 일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거친 밭을 일구어 사람들이 잘 살 수 있게 하려고 결심하였다.
덴마크의 기후는 밤과 낮의 기온이 몹시 오르내리어 여름철이라도 밤에는 서리가 내리는 데가 있었다. 또 바람이 세어 바닷가의 모래가 날려 아무리 밭을 일궈 놓아도 하룻밤 새에 사막이 되어 버리고 만다. 게다가 비가 오면 곧 홍수가 났다. 이와 같은 해를 막으려면 무엇보다도 나무를 심지 않으면 안된다.
달가스는 거친 땅에 나무를 심을 연구를 시작하였다. 여러 가지로 애쓴 결과 덴마크보다 훨씬 거친 땅에서 자라기에 알맞은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실제로 심어보니까, 자라기는 잘 자라는데 이태 삼년 지나는 동안에 전부 말라죽었다.
달가스는 단념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높은 알프스 산에서 나는 바람에 센 전나무를 노르웨이 전나무 사이에 심어 보았다. 그랬더니 두 나무가 다 잘 자라기는 자라나 도무지 일정한 크기 이상 자라지는 않았다. 달가스에게는 ‘후레데리크’라는 아들이 있었다.
‘후레데리크’는 아버지가 하는 일을 도우려고 식물학을 공부하여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 문득 크게 자란 전나무를 보았다. 이상히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사냥꾼이지나 다니는 길이라 작은 전나무는 모조리 잘려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전나무가 얼마쯤 자란 뒤에는 속아 버려야 다른게 크게 자란다는 것을 알고, 전부 속아 버렸다. 그랬더니, 몇 해 안 가서 숲이 우거졌다. 이리하여 보리, 사탕무, 채소 따위가 잘 자라서 전쟁하기 전보다도 풍성한 나라가 된 것이다.
◆ 조림(造林)
◎ 조림 시기
이른봄 얼었던 땅이 풀리는 대로 가급적 일찍 나무를 심는 것이 좋으며 늦어도 묘목이 눈이 트기 전에 심어야 한다.
남부지방 3월 초순 ~ 3월 하순
중부지방 3월 중순 ~ 4월 초순
북부지방 3월 하순 ~ 4월 중순
◎ 조림하는 절차
・ 지존 작업 : 조림할 곳에 잡초와 관목이 무성해 있으면 베어 없애고 식재하기 편리하도록 한다. 지존 작업은 조림
전년도에 완료하는 것이 원칙이나 늦어도 당년 2월말 가지는 끝내야 한다.
○ 가재 확보
․ 조림용 묘목 및 비료를 미리 준비하여야 한다.
- 묘목 : 정부 묘목 검사에서 합격한 것으로써 품질 보증 표가 붙은 묘목
- 비료 : 산림용 고형 복합 비료
․ 줄자와 묘목 망태기, 물수세미, 괭이 등 작업 도구를 미리 준비한다.
○ 묘목 운반 가식
묘목 장에서 굴취한 묘목은 조림할 때까지 운반이나 가식 기간이 길어지면 활착율이 낮아지므로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여야 한다.
○ 운반
․ 뿌리가 햇볕에 쬐거나 건조되지 않도록 한다.
․ 비를 맞거나 오래 쌓아두면 썩기 쉬우므로 얼거나 어린순이 부러지지 않도록 다루어야 한다.
○ 가식
․ 가식할 장소는 조립지 부근으로 물이 잘빠지고 습기가 적당히 있는 곳을 선정하되 바람 맞이는 피한다.
․ 묘목의 뿌리를 부채살 모양으로 잘 펴서 열을 지어 묻어 둔다.
․ 봄에는 묘목의 끝이 북쪽으로 흙탕물에 담구어 원기를 회복시킨 다음 묻어둔다.
․ 가식 방법은 이랑을 파고 묘목을 비스듬히 놓은 다음 흙을 덮고 단단히 밟아서 뿌리와 흙이 밀착되도록 한다.
․ 장기간 가식할 때는 짚이나 낙엽으로 덮어주는 것이 좋고 가식지에 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수로를 만들어 준다.
○ 식재 작업
• 구덩이 파기
․ 작년 가을에 파놓은 구덩이는 반드시 다시 손질하고 심는다.
․ 구덩이를 팔 때에는 미리 준비한 줄자를 대고 구덩이 크기보다 넓게 지피물(地皮物)을 벗겨낸 후 수종별 규격에
맞추어 판다.
․ 겉흙과 속흙은 따로 모아 놓고 돌, 낙엽 또는 풀뿌리 등을 가려낸다.
• 식재
․ 부드럽고 비료분이 있는 겉흙을 먼저 5 ~ 6cm 정도 넣고 묘목의 뿌리를 펴서 곧게 세운 다음 겉흙부터 넣는다.
․ 구덩이가 70 ~ 80% 정도 채워지면 묘목을 살짝 위로 잡아당겨 뿌리가 잘 펴지고 흙이 고루 들어가게 한 후 흙을
넣고 단단히 밟는다.
․ 비료는 묘목의 제일 긴 가지끝 아래에 5cm 정도 깊이의 구멍을 내고 시비 기준량대로 비료를 넣은 후 나머지 흙을
모아 주위 지면보다 약간 높게 정리한 후 낙엽이나 풀등으로 덮어둔다.
• 뿌리 돌림 방법
․ 분의 직경은 근원경의 6배 이상으로 하여 흙을 파낸 다음 사방으로 뻗은 큰 뿌리 3~ 4개를 남기고 나머지 뿌리는
잘라낸다.
․ 이식이 어려운 나무는 뿌리를 2 ~ 3년에 걸쳐서 일부씩 뿌리돌림을 실시한다.
․ 뿌리돌림이 끝난 후 비옥한 흙을 원상태로 매운 다음 잘 밟아 주고 판수는 하지 않는다.
• 뿌리 돌림후의 관리
․ 뿌리가 절단됨에 따라 지상부와 지하부의 불균형을 덜기 위하여 도장된 가지, 꽃, 눈 등을 제거하여 수세를
유지하도록 한다.
• 분 만들기 및 굴취
․ 분은 뿌리 돌림시의 크기보다 약간 크게 만든다.
• 분의 벽은 새끼로 감아 굴취한다.
․ 분직경 (근원경의 6배)
․ 근원경
․ 분의 깊이 (근원경의 6배)
• 식재
․ 구덩이는 나무분보다 넓고 깊게 파고 밑에 신선한 흙으로 상토를 깐다.
․ 나무분을 구덩이에 넣을 때는 전생지에서 향하고 자랐던 방향에 맞추어 약간 깊게하여 2/3가량 흙을 메운 다음
충분한 관수를 하고 3/4 높이까지 흙을 채운 다음 물을 주고 나머지 흙을 덮어서 잘 밟아준다.
․ 식재 후 바람이나 사람, 동물들에 의하여 흔들리거나 구부려지지 않도록 지주를 세운다.
. 계속적으로 물을 주고 새로운 뿌리가 발생할 때부터 시비를 하고 병충해를 방제한다.
수종별 |
식재 본수 (본) |
식재 거리 (m) |
구덩이 크기 |
1본당 시비량 | ||
너비 (cm) |
깊이 (cm) |
신림용 고형 복합비료(개) |
퇴 비 | |||
밤나무 살구나무 오동나무 이태리 포플러 현사시나무 장기수 |
400 400 600 400 400 800 3000 |
5 × 5 5 × 5 4 × 4 5 × 5 5 × 5 3.5 × 3.5 1.8 × 1.8 |
90 90 90 40 40 40 30 |
90 90 50 70 70 70 30 |
4 4 5 3 3 3 1 |
7 - 7 - - - - |
< 묘목을 이렇게 심어서는 안된다 >
묘목 뿌리를 잘 펴지 않고 구부러지게 심은 경우
묘목을 곧게 세우지 않고 눕혀서 심은 경우
묘목을 너무 얕게 심거나 비료가 직접 부리에 닿은 경우
교목을 너무 깊게 심은 경우
• 대목 이식
<이식 시기>
이른봄 얼었던 땅이 풀리는 대로 가급적 일찍 나무를 심는 것이 좋다.
<이식 방법>
• 뿌리 돌림
․ 큰 나무는 이식 1 ~ 3년 전에 실시한다.
․ 근원경 10cm 미만으로 당년 이식이 가능한 나무는 뿌리 돌림을 하지 않고 직접 이식한다.
나. 기념사 (훈화)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우리 민족이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면서 헐벗은 우리 강토에 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절실한 요망이 국민들의 의사로 집약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때, 농림부가 주관하여 관계 문헌을 통하여 적당한 날을 찾던 중 당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고 통일을 완성한 날이 양력으로 4월 5일이며 또한 성종 (조선왕조 9대) 이 춘경을 하신 날도 4월 5일이었으므로 민족사적 의의와 농경사적 의의를 고려하여 이 날을 식목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맹자님의 어머니께서는 그 아드님을 위하여 3 번이나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맹자님이 그 환경에 따라 좋지 않은 버릇을 배워 익히는 모습을 보시고 교육상 나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학생들도 물론 환경에 따라 품성에 좋은 변화를 가져오거나 또는 좋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 나라의 국민성도 그 나라의 환경에 영향 되는 바 클 것이고, 그것은 몇 천년은 흘려 내려오는 가운데 민족성을 이루는데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말하지만, 명실공히 금수강산이 되자면, 강에는 언제나 푸른 물이 흘러야 되고 산에는 푸른 나무가 가득 차 있어야 하고, 만일 산에 나무가 없으면 장마 때에 곧 사태가 나며, 산의 흙과 모래가 흘러내려 강물을 메워 버리므로, 강은 강이로되 푸른 물이 마른 강으로 됩니다. 따라서 강에 물이 없으니 농사에 쓸 물은 물론 식수도 구하기 힘들어 크나큰 소란을 일으키고 말 것입니다.
특히, 옛부터 치산 치수는 정치의 근본요체라 하였으며 치수의 근본이 바로 치산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국가와 민족의 번영이 산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역사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무의 용도가 다양하고 그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우리의 현실은 원목이 절대 부족한 현실임을 생각해 볼 때 또 하나의 식목일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해방 후 우리는 식목일 행사를 통하여 수없이 많은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심은 나무에 비하여 살아 남아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나무는 아주 적은 수라고 합니다. 이런 결과는 나무를 심고 가꾸려는 자세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심은 나무를 가꾸고 사랑하는 자세가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숲을 내 것, 내 몸같이 아끼고 사랑할 때에 비로소 우리 강산은 온통 푸르름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한 마음, 한뜻으로 한 그루의 나무라도 정성껏 심고 가꾸어 금수강산을 이룩할 때 산림 자원도 풍부해지고, 부강한 나라, 살기 좋은 복지국가가 될 것입니다.
다. 관련 학교 행사
(1) 식순
. 개회사
. 국민 의례
. 국민 교육 헌장 낭독
. 학교장 훈화
. 식수 요령 설명
. 식목일 노래(메아리)
. 폐회사
. 식수 활동 및 자연 보호
(2) 해설 방송 자료
어린이 여러분!
명상의 시간입니다.
옛날 말에 ”나무 한 그루 없는 집에서 어찌 아들딸을 기를 수 있으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싱싱하게 자라나는 나무처럼 우리의 아들딸도 무럭무럭 자라게 하고 싶은데서 나온 말인 것입니다.
또, 이처럼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자식을 낳고 기르는 힘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말도 됩니다.
퍽 오래 전에 산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남자아이가 집안 일을 도왔습니다. 쇠죽도 쑤어야 하고 풀도 베어야 하고 집에서 기르는 토끼의 먹이도 줘야 했습니다. 게다가 부모님은 산에 가서 나무까지 베어 오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학교 선생님께서 배운 데로 산의 나무를 꺾을 수가 없어 낙엽만을 조금 긁어왔습니다. 그 부모는 아이가 놀기만 했다고 크게 꾸중을 하곤 했습니다. 아이는 며칠을 고민을 하다가 이런 내용을 일기장에 써놓고 부모님을 원망하였습니다. '내가 산에 가서 나무를 꺾어오면 선생님의 말씀을 어길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큰 해가 된다. 나는 죽어도 나무를 베어오지 않겠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느끼는 점이 없으신 지요?
온 국민의 나무 한 그루씩을 심고 가꾸고 사랑하는 자세가 확립될 때 우리 나라는 푸른 금수강산으로 변모할 것이며 산림자원도 풍부해지고 부강한 나라, 살기 좋은 복지국가가 될 것입니다.
학교 안의 잔디, 꽃, 나무를 사랑하는 어린이가 됩시다.
(3) 식목일의 노래 (메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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