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이운룡(李雲龍) 장군(將軍)과 기강서원(岐江書院)

황와 2013. 6. 7. 18:19

 

이운룡(李雲龍) 장군(將軍)과 기강서원(岐江書院)

 

壬辰倭亂時玉浦萬戶로서 玉浦灣 海戰에서 最初倭水軍擊破하였고 平亂 後에는 第7代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赫赫戰功을 남겼던 息城君 李雲龍 將軍墓所將軍位牌奉安岐江書院宜寧郡 芝正面 雄谷村位置하고있다.

李雲龍 將軍朝鮮 王朝 明宗 11年(1562) 9月16日 慶尙北道 淸道縣 梅田面 明臺洞에서 南海縣令歷任하였던 夢祥公嫡子誕生하였다. 天資俊秀하며 幼時부터 行動이 으젓하여 成人과 같았으며 長成함에 따라 學問에 힘써서 經史에도 通達하였다.

宣祖 18年(1585) 24때에 武科及第하였는데 壬辰倭亂이 일어나기 7年前이었다. 宣祖 20에는 國王直接 警護하던 宣傳官除授되였다. 이 때는 倭亂徵候가 있던 時期라서 國防重要性論議됨에따라 文武材兼備少年 武將選拔 登用하여 國防重任을 맡게 해야 된다는 兵曹判書 柳成龍公建議에따라 將軍宣祖 22年(1589) 正月 28歲의 젊은 나이로 玉浦 水軍 萬戶任命되었다.

最初海防鎭將이 되었지만 軍卒撫愛하고 軍糧武器確保 修繕하여 戰亂 勃發豫測萬般對備하였다.

宣祖 25年 5月 7日 敵將 藤堂高虎가 이끄는 50餘隻倭戰船을 맞아 우리水軍激戰을 벌렸다. 이것이 歷史上 有名玉浦 海戰으로서 壬辰戰亂中 우리 水軍으로서는 最初海戰이고 最初倭敵 討滅戰이였다.

이에 앞서 元均 慶尙右水使는 크게 唐慌하여 艦船武器海中沈沒시키고 退却하려하였다. 將軍主帥이고 直屬 上官元均 水師에게 使君(元均)國家重責을 맡고 있어 職責上 宜當境內固守하다가 死節해야만할 것이오. 이 地域은 곧 全羅 忠淸으로가는 要衝이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全羅 忠淸을 잃게 되어 國事狼狽가 될 것이오. 우리 水軍의 힘이 하다면 全羅 水軍救援해서라도 敵軍見乃梁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南方 海上의 일은 成功할 수 있을 것인데 使君은 이 重大 使命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고 하오?하여 元均 水使棄陣 退却制止하고 栗浦 萬戶 李英男 公으로 하여금 全羅左水營에게 달려가게 하여 李舜臣 將軍에게 進言하여 全羅 水軍出戰 契期를 마련했다.

將軍은 그때 永登浦 萬戶 禹致績 公과함께 巨濟洋으로 나가 金俊民 縣令과 더불어 討滅하기를 하늘에 盟誓하고는 全羅 左水使 李舜臣 將軍이 이끄는 全羅 水軍을 맞이했다. 이렇게 하여 慶尙 全羅 兩水軍合同하여 敵船攻擊하여 50餘隻을 불살라버렸다. 敵船數隻이 겨우 살아서 逃走하였다. 陸戰呼應하기 하여 南海岸을 돌아서 西海岸으로 가려던 敵船은 그 先鋒이 우리 水軍에게 擊破되어 비로소 戰意低下되었고 우리 水軍見敵 必滅士氣가 드높아졌던 것이 玉浦 海戰歷史的 意義였다.

安骨浦 熊川 海戰閑山 海戰에서도 많은 戰功을 세운 다음 이듬해인 선조 26에는 熊川 縣監으로 轉任되었고 35때인 宣祖 29年 正月에는 慶尙左水使任命되었다. 鹽浦水營駐屯시킨다음 民丁招集하고 戰艦大大的으로 修理하는 等 戰亂初에 흩어졌던 慶尙左水營再建하고 戰備를 가다듬었다. 宣祖 30年 丁酉 再亂 때에는 永川 倉巖들에서 과 싸워서 進出을 막았고 明軍과 같이 加藤淸正籠城하는 蔚山城大王巖에서 海路進擊하여 많은 戰功을 세웠다. 이듬해인 宣祖 31年 가을 明軍과 같이 再次 蔚山城攻擊하였는데 倭敵을 사로잡아 심문하여 豊臣秀吉이 이미 죽은 것을 第一 먼저 알고는 軍隊整頓하여 敗走하는 을 바다에서 最後까지 追擊하였다. 釜山에서 軍隊들 돌이켜 左水營을 그전대로 回復시키고 民丁募集하여 屯田設置하고 城池修築하였다.

將軍壬辰倭亂中 數많은 海戰陸戰에서 戰必勝 攻必取戰功을 세운 名將이였고 李忠武公이 가장 아끼던 部將이였다. 忠武公亂中日記將軍의 잦은 來往緊密面談 記錄들을 보아도 李忠武 公과의 깊었던 親分紐帶 關係를 짐작할 수가 있다.

宣祖 37年(1604)에는 宣武功臣 息城君해졌다. 將軍貫鄕載寧이고 載寧古號息城이기 때문에 붙혀진 爵封號이다.

44歲 때인 宣祖 38年(1605)에는 都摠府副總管捕盜大將 兼 火器提調備邊司堂上任命되어 朝廷論議參聞하는 機會가 많아 그 計略이 많이 採用되기도 하였다. 그해 9에는 三道水軍統制使任命되었는데 그때 忠武公追慕하여 統營城 外廓西便國命을 받들어 忠烈祠創建하였으며 統制使 在職時啓本謄錄居營日記淸道 石洞書院所藏되고 있어 그때의 事情昭詳하게 해주고있다.

宣祖 40(1607) 10咸鏡南兵使가 되었다가 光海君 元年(1609) 忠淸水軍節度使歷任한 다음 이듬해인 光海君 2年 7月 2日 腫氣病으로 別世하였다.

享年 49歲였으며 兵曹判書贈職되었다.

처음 淸道 法貴山 先塋下安葬되었다가 20年後嗣子平澤縣監 儼이 지금宜寧郡 芝正面 雄谷으로 移葬하였다. 墓所 前儒林들이 將軍追慕하기 하여 1958年 岐江書院建立하였고, 位牌奉安되어 春秋 享禮擧行되고 있다.

將軍은 비록 宜寧 땅에서 生長은 하지 않았지만은 壬辰 名將榮光스러움이 우리 宜寧과 같이 있을 것이고 將軍墓誌銘中記錄되어있는 四德 思想은 우리가 기리 받들어야할 敎訓일 것이다.

                                                                                                   - 출처/ 宜寧郡誌 - 

 

                                                                                     의령 지정 웅곡 기강서원앞 장군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