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룡(李雲龍) 장군(將軍)과 기강서원(岐江書院)
壬辰倭亂時에 玉浦萬戶로서 玉浦灣 海戰에서 最初로 倭水軍을 擊破하였고 平亂 後에는 第7代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赫赫한 戰功을 남겼던 息城君 李雲龍 將軍의 墓所와 將軍의 位牌를 奉安한 岐江書院이 宜寧郡 芝正面 雄谷村에 位置하고있다.
李雲龍 將軍은 朝鮮 王朝 明宗 11年(1562) 9月16日 慶尙北道 淸道縣 梅田面 明臺洞에서 南海縣令을 歷任하였던 夢祥公의 嫡子로 誕生하였다. 天資가 俊秀하며 幼時부터 行動이 으젓하여 成人과 같았으며 長成함에 따라 學問에 힘써서 經史에도 通達하였다.
宣祖 18年(1585) 24歲때에 武科에 及第하였는데 壬辰倭亂이 일어나기 7年前이었다. 宣祖 20年에는 國王을 直接 警護하던 宣傳官에 除授되였다. 이 때는 倭亂의 徵候가 있던 時期라서 國防의 重要性이 論議됨에따라 文武材가 兼備한 少年 武將을 選拔 登用하여 國防의 重任을 맡게 해야 된다는 兵曹判書 柳成龍公의 建議에따라 將軍은 宣祖 22年(1589) 正月 28歲의 젊은 나이로 玉浦 水軍 萬戶로 任命되었다.
最初로 海防의 鎭將이 되었지만 軍卒을 撫愛하고 軍糧과 武器를 確保 修繕하여 戰亂 勃發의 豫測에 萬般의 對備를 期하였다.
宣祖 25年 5月 7日 敵將 藤堂高虎가 이끄는 50餘隻의 倭戰船을 맞아 우리水軍은 激戰을 벌렸다. 이것이 歷史上 有名한 玉浦 海戰으로서 壬辰戰亂中 우리 水軍으로서는 最初의 海戰이고 最初의 倭敵 討滅戰이였다.
이에 앞서 元均 慶尙右水使는 크게 唐慌하여 艦船과 武器를 海中에 沈沒시키고 退却하려하였다. 將軍은 主帥이고 直屬 上官인 元均 水師에게 ⌜使君(元均)은 國家의 重責을 맡고 있어 職責上 宜當히 境內를 固守하다가 死節해야만할 것이오. 이 地域은 곧 全羅 忠淸으로가는 要衝이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全羅 忠淸을 잃게 되어 國事가 狼狽가 될 것이오. 우리 水軍의 힘이 弱하다면 全羅 水軍의 救援을 請해서라도 敵軍이 見乃梁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南方 海上의 일은 成功할 수 있을 것인데 使君은 이 重大 使命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고 하오?⌟하여 元均 水使의 棄陣 退却을 制止하고 栗浦 萬戶 李英男 公으로 하여금 全羅左水營에게 달려가게 하여 李舜臣 將軍에게 進言하여 全羅 水軍의 出戰 契期를 마련했다.
將軍은 그때 永登浦 萬戶 禹致績 公과함께 巨濟洋으로 나가 金俊民 縣令과 더불어 敵을 討滅하기를 하늘에 盟誓하고는 全羅 左水使 李舜臣 將軍이 이끄는 全羅 水軍을 맞이했다. 이렇게 하여 慶尙 全羅 兩水軍이 合同하여 敵船을 攻擊하여 50餘隻을 불살라버렸다. 敵船은 數隻이 겨우 살아서 逃走하였다. 陸戰에 呼應하기 爲하여 南海岸을 돌아서 西海岸으로 가려던 敵船은 그 先鋒이 우리 水軍에게 擊破되어 비로소 敵의 戰意는 低下되었고 우리 水軍의 見敵 必滅의 士氣가 드높아졌던 것이 玉浦 海戰의 歷史的 意義였다.
安骨浦 熊川 海戰과 閑山 海戰에서도 많은 戰功을 세운 다음 이듬해인 선조 26年에는 熊川 縣監으로 轉任되었고 35歲 때인 宣祖 29年 正月에는 慶尙左水使로 任命되었다. 鹽浦에 水營을 駐屯시킨다음 民丁을 招集하고 戰艦을 大大的으로 修理하는 等 戰亂初에 흩어졌던 慶尙左水營을 再建하고 戰備를 가다듬었다. 宣祖 30年 丁酉 再亂 때에는 永川 倉巖들에서 敵과 싸워서 敵의 東쪽 進出을 막았고 明軍과 같이 加藤淸正이 籠城하는 蔚山城을 大王巖에서 海路로 進擊하여 많은 戰功을 세웠다. 이듬해인 宣祖 31年 가을 明軍과 같이 再次 蔚山城을 攻擊하였는데 倭敵을 사로잡아 심문하여 豊臣秀吉이 이미 죽은 것을 第一 먼저 알고는 軍隊를 整頓하여 敗走하는 敵을 바다에서 最後까지 追擊하였다. 釜山에서 軍隊들 돌이켜 左水營을 그전대로 回復시키고 民丁을 募集하여 屯田을 設置하고 城池를 修築하였다.
將軍은 壬辰倭亂中 數많은 海戰과 陸戰에서 戰必勝 攻必取의 戰功을 세운 名將이였고 李忠武公이 가장 아끼던 部將이였다. 忠武公의 亂中日記에 將軍의 잦은 來往과 緊密한 面談 記錄들을 보아도 李忠武 公과의 깊었던 親分과 紐帶 關係를 짐작할 수가 있다.
宣祖 37年(1604)에는 宣武功臣 息城君에 封해졌다. 將軍의 貫鄕이 載寧이고 載寧의 古號가 息城이기 때문에 붙혀진 爵封號이다.
44歲 때인 宣祖 38年(1605)에는 都摠府副總管捕盜大將 兼 火器提調備邊司堂上에 任命되어 朝廷의 論議에 參聞하는 機會가 많아 그 計略이 많이 採用되기도 하였다. 그해 9月에는 三道水軍統制使로 任命되었는데 그때 忠武公을 追慕하여 統營城 外廓西便에 國命을 받들어 忠烈祠를 創建하였으며 統制使 在職時의 啓本謄錄과 居營日記가 淸道 石洞書院에 所藏되고 있어 그때의 事情을 昭詳하게 傳해주고있다.
宣祖 40年(1607) 10月에 咸鏡南兵使가 되었다가 光海君 元年(1609) 忠淸水軍節度使를 歷任한 다음 이듬해인 光海君 2年 7月 2日 腫氣病으로 別世하였다.
享年 49歲였으며 兵曹判書로 贈職되었다.
처음 淸道 法貴山 先塋下에 安葬되었다가 20年後에 嗣子인 平澤縣監 儼이 지금의 宜寧郡 芝正面 雄谷으로 移葬하였다. 墓所 前에 儒林들이 將軍을 追慕하기 爲하여 1958年 岐江書院을 建立하였고, 位牌가 奉安되어 春秋 享禮가 擧行되고 있다.
將軍은 비록 宜寧 땅에서 生長은 하지 않았지만은 壬辰 名將의 榮光스러움이 우리 宜寧과 같이 있을 것이고 將軍의 墓誌銘中에 記錄되어있는 忠‧義‧信‧讓의 四德 思想은 우리가 기리 받들어야할 敎訓일 것이다.
- 출처/ 宜寧郡誌 -
의령 지정 웅곡 기강서원앞 장군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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