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7代 三道水軍統制使 李雲龍將軍 紀蹟碑 除幕式에 제하여
/鷺山 李殷相
英名을 竹帛에 적어 百世에 傳하는 者 반드시 偉人이 아닌 것이며, 業績이 史乘에 숨겨져 後人이 알지 못하는 者 中에 오히려 民族의 恩人이 적지 않음을 發見하는 것이니, 過去의 歷史를 새로운 角度에서 再批判 再修正해야 할 것을 여기서도 또 한 번 느끼는 것이다.
家族主義와 勢力中心의 社會組織 아래 民族正義는 抹殺 當하고 歷史良心은 蹂躪되었다. 虛僞와 粉飾의 文字를 남겨 後世에 耳目을 어지럽힘도 그 때문이요, 民族을 爲하여 피와 땀을 흘린 이로서 그 이름이 草野에 묻혀버림도 또한 그로 因한 것이다.
壬亂의 歷史 中에서 忠武公의 民族的 大恩功을 저 無知한 婦幼들까지라도 傳誦하여 온 것은 너무나 거룩하고 어마어마한 存在이시매, 본시부터 私情과 人爲가 敢히 그이 앞에는 이르지 못함으로써 그렇거니와, 그 밖에 當時의 節士 義人과 功臣 名將으로서 그 이름과 行蹟이 或은 나타나고 或은 숨겨져 稱誦과 落寞이 不一함은, 반드시 그 勳功이 評量한 結果가 아니라 血族後孫의 有無와 門閥勢力의 强弱에 緣由한 바 적지 않음도 否認하지 못할 事實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正明한 觀察에 依하여 이미 나타난 이로되 盲目的으로 그를 崇敬하려 아니하며, 또한 숨겨진 이로되 그대로 그를 버리고자 아니하는 者라, 일찍이 普傳되지않은 李雲龍將軍을 새로금 一般에 紹介하려는 所以然도 實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의 字는 景見이요 元來는 慶州李氏였으나, 高麗初에 載寧으로써 本을 삼고 다시 後世에 이르러 淸道에서 世居하였으며, 저 忠武公보다 17年 떨어져 明宗17年(1562年) 9月 16日에 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채 塾師를 쫓아 文字를 배우고 다시 20歲 年長인 寒岡 鄭逑先生의 門下에 負笈하여 儒學으로 受業하다가 24歲에 奮然히 붓을 던지고 武擧에 오른 뒤, 26歲때에 咸鏡北道 慶興郡 鹿屯島에서 저 忠武公을 도와 野人 賊徒 沙送阿 甲靑阿等을 擊退함에 功을 세웠으며 28歲에 巨濟의 玉浦萬戶가 되어 軍備를 整備함으로써 장차 올 壬辰의 大國亂에 己任을 다 할 수 있었다.
마침내 壬辰亂이 일어나자 公은 나이 31歲, 當時의 慶尙右水使 元均이 逃亡하려는 것을 보고 愛國 報恩의 正論으로 慷慨 抗言함과 아울러 栗浦權官 (下級將校) 李英男을 全羅左水營 (麗水)으로 보내어 忠武公에게 後援할 것을 請하도록 한 분이 바로 그 분이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 盟誓하고 下海하여 忠武公의 赴援軍들과 合力하여 5月 7日 第 1次 玉浦海戰에 大勝捷을 거두니 最高 指揮 首功이야 勿論 忠武公에게 돌리는 바이로되, 當時 玉浦의 主人公인 그의 功勞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記念日을 卜하여 統營 忠烈祠 正門 곁에 그의 紀蹟碑를 세우게 된 것을 理의 當然할 바라 생각한다.
李植이 撰한 忠武公 謚狀 中에 忠武公이 玉浦萬戶 李雲龍 永登萬戶 禹致績의 引導를 받아 玉浦에 이르러 먼저 倭船 30船을 擊破하였다는 記錄으로써 這間의 情景을 짐작할 수 있음에 足하다. 그가 忠武公의 幕下에 있었다 하여 반드시 忠武公의 補佐에만 그친 것이 아니니 湖南舟師의 去就로서 自己 進退의 計를 삼던 元均을 오직 正義로써 責勵하던 이가 그이었음을 헤아려 보면, 公의 獨立한 人格과 氣慨 자못 凡倫을 뛰어났음을 알 것이며, 또한 저 有明한 閑山大戰에 있어서도 忠武公과 함께 邦家의 安危와 一身의 死生을 問答한 것을 보니 마침내 戰略을 相議한 後 一死를 決하고 賊船을 先犯한 분이 바로 그이었음을 생각하면 果然 英雄兒의 風貌가 눈앞에 彷彿하는 바 있다.
戰亂 2年 3月에 그가 病으로 起動이 어려웠을 때 三師 諸將과 兩道 軍人으로 問疾하지 않은 이가 없었더라는 것도, 그가 平素에 軍中의 衆心을 얻은 바 있었던 것을 證左하는 것이다. 또 戰亂 第 3年 그의 나이 33歲時 4月 6日에 忠武公이 閑山陣中에서 武科 別試를 開場하고 戰時 人材를 登用할 적에 當時 熊川縣監으로 있던 그를 試官의 一人으로 選擇했던 것을 보면(忠武公 亂中日記) 그의 實力이 어떠했던 줄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慶尙左水使로 陞進한 것은 戰亂 第 5年(35歲) 正月이었던 바 忠武公의 日記를 據하면 그는 慶尙左水使로 陞進한 後에도 매양 忠武公에게 禮를 極盡히 하였고, 또 忠武公도 그와 함께 或은 酒盃를 나누고 或은 舟中에서 同宿하는 等 그를 敬愛하였던 것을 隨處隨處에서 發見할 수 있거니와 6月에 陣을 塩浦로 옮겨 附賊人民 五百餘戶를 救出하고 戰艦을 建造함에 專力을 하였던 바 翌年 正月에 加藤淸正이 蔚山 西生浦로 돌아와 通譯人에게 一名將이 右道로부터 이리로 왔다고 하더니 이 사람이 그 사람이냐고 물었다는 것이 바로 그를 指稱함이요, 또는 그것은 곧 그대로 그가 倭賊의 畏憚하는 人物이었던 것을 알려주는 消息이었던 것이다.
戰亂 6年 3月 忠武公이 投獄된 後 元均이 統制使가 되었다가 마침내 再亂이 일어나 7月에 元均이 敗하여 우리 水軍이 全沒狀態에 빠진 다음 獄으로부터 나온 忠武公이 海域의 戰船을 거두어 다시 海戰에 臨하는 때에 慶尙左水使 李雲龍은 都元師의 命令으로 陸戰에 赴하게 되었거니와, 그는 陸에 있어서도 永川 倉巖의 野戰에서 大勝함으로써 安康 以北이 淸正의 禍를 免하였던 것이요. 다시 그 다음 해 第 7年 終戰時에 忠武公이 露梁에서 戰歿하던 때 그는 釜山前洋에까지 賊을 尾擊하여 最後의 戰功을 세우기까지 一役을 完遂한 後에 드디어 水營 舊域으로 돌아와 洗兵하였다.
7年의 戰亂이 終焉된 後 翌年 38歲에 營舍를 重創하고 軍卒을 再整備하는 一方 人民을 募集하여 屯田을 設하여 軍糧을 饒足케 하고 다시 그 다음 해에는 釜山浦로 移駐하여 무너진 舊城을 修築하는 等 戰亂中의 傷痕을 어루만지는 途中에 謀略과 中傷으로 遞職을 當하니 그날의 政界는 依然히 그 可憎한 醜態를 숨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시 그 다음 해 40歲 때에 漢陰 李德馨이 嶺南을 體察할새 公이 海路에 가장 익숙하다 하여 幕將을 삼고 同伴하여 海上을 周觀하여 傍海의 營樓 및 海賊 往來의 要衝과 我師 遮遏의 勢를 일일이 親察한 後에 公을 일컬어 「海門의 主人」이라 하고 朝廷에 다시 推擧하여 左水使로 復職케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41歲때에 釜山城을 修築하고 軍營을 改作하매 門樓와 壁壘의 精彩가 一變하였다.
그해 9月에 鄕里 慈堂의 病勢가 重하매 急히 淸道로 奔省하였던 바 當時 統制使 柳珩이 元來 그를 猜忌하던 나머지 이것을 彈劾하여 마침내 10月에 拿令이 내려 投獄되었다가 11月에 西生浦로 杖流되었는데 그가 出獄하자 母夫人의 凶訃가 이르렀으니 저 忠武公의 境遇와 恰似한 것을 생각할 때 다시 한 번 歎息을 禁할 수 없다.
그러나 휘하 諸將의 訟冤 上書로 翌年에 放還됨과 同時에 例의 甲辰錄勳時에 息城君으로 封하니 息城은 載寧의 舊號다 다시 그 翌年 44歲에 母喪을 畢하자 2月에 都摠府副摠管 兼 備邊司堂上 捕盜大將 火器都監提調를 拜하여 時局 收拾에 對한 方略을 開陳하여 國家에 裨益이 많으셨고 9月에 三道水軍統制使로 任命되니 무릇 忠武公으로부터 創設된 職制에 있어서 第 7代째 就任한 것이며 때는 終戰 後 7年이었다.
그가 巨濟에 忠武公의 遺廟를 세우매 모든 戰艦과 商船이 發行할 적마다 必告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또 지금 統營의 忠烈祠도 그가 統制使로 任命된 翌年 45歲 때에 國命을 받들어 그의 손으로 세운 것이며, 그는 救國 濟民한 忠武公 指導의 恩을 입은 忠武에게 이같이 崇禮心을 다하였던 것이다. 果然 後任 統制使들 中에서도 그의 人格이 가장 뛰어난 분임을 記憶해야 할 것이다.
漢陰 李德馨이 白沙 李恒福에게 보낸 書信中에「嶺南에 이르러 李雲龍을 만나보니 자못 氣局이 있고 文에 能하며 事理에 밝을 뿐아니라 舟楫의 妙에 熟練함이 그 比類를 찾기에 어렵다 하겠거니와 前日 故 李統制(忠武公)가 古今島에 있을 때에(戰亂 最終年) 그가 내에게 雲龍을 가르쳐 此任을 代할만한 이는 저 사람이라 말한 일이 있었는데 果然 그 말이 虛言이 아니었고」한 一節이 있음을 보면, 일찍 忠武公도 모든 幕下 諸將中에 特히 李雲龍의 人格과 實力을 信賴하였던 줄을 알 것이다.
그가 統制使의 職位에 있는 것이 무른 22個月간 軍政에 있어서 慈威를 兼行함이 果然 忠武公의 精神을 그대로 繼承하였다 하련마는, 마침내 構陷에 빠져 罷職되고 數個月이 지나 46歲 10月에 咸鏡道兵馬節度使로 任命되었다. 대대적으로 北方의 軍備를 再整頓하는 一方 膽力者를 모아 別隊를 編成하니 營軍의 騎馬者가 4천名에 達하고 精銳步卒이 오백餘名을 突破하였으며, 破壞된지 오랜 甲山城을 重新시키고 北靑의 東南 門樓를 創建하는 等 자못 軍聲이 大振하였으나 48歲에 다시 忠淸道水使로 左遷當하였다가 그나마 誣告를 입어 遞職되고 그 翌年 49歲된 7月 2日에 病으로 卒하니 忠武公이 가신지 12年後이었다.
이 같이 公의 最後가 不遇로써 끝마친 것에 우리는 憐憫한 情을 참지 못하거니와, 그의 一生을 通하여 冷靜히 觀察한다면 澤堂 李植이 公의 墓誌銘을 쓴 中에 公을 忠義 信讓의 人이라 한 것이 適評이라 하겠다. 忠義 信讓의 四德을 實踐하여 軍民間에 師範이 된이요 忠武公 一去後에 海門의 主人이라 일컫던 이라 한데, 士人의 請狀으로 琴湖書院을 세워 祭祀하고 黑石里에 影堂을 지어 眞影을 걸었건만, 公의 直系血孫이 끊어지자 돌아보는 이 하나 없고 마침내 記錄의 殘片조차 숨어져가는 오늘, 마침 그이 傍孫中에 數人이 있어 진작 작년중에 爲堂 鄭寅普氏에게 請囑하여 紀蹟碑文을 撰하게 하였던 바, 이제 金石에 올려 由緖깊은 忠烈祠 正門 곁에 세우고 그 除幕式을 擧行한다. 하기로 나도 또한 一文을 草하여 歷史上 忠義의 人物과 그 精神을 再宣揚함에 一助코져 하거니와, 이제 숨겨진 人物이 다시 나타나게 됨은 吾人의 本懷라, 즐거이 생각하는 바이로되, 다른 한편으로 撰者 爲堂이 北虜에게 묶여간 채 오늘의 式典에 一席이 비어있음을 슬퍼하지 않을수 없다.(다만 愛國의 同志君子는 古今도 없고 生死도 없음을 깨달으면서 除幕式 前日 釜山旅舍에서)
註·本文은 當時 新聞에 連載된 것임.
除幕은 1951年 6月 11日임.
의령 지정 웅곡 묘소 동네앞 5백년 쌍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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