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제7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운룡장군 기적비 제막식에 제하여/노산 이은상

황와 2013. 6. 7. 18:25

 

第7代 三道水軍統制使 李雲龍將軍 紀蹟碑 除幕式에 제하여

                                                                                                                                                  /鷺山 李殷相

英名竹帛에 적어 百世하는 반드시 偉人이 아닌 것이며, 業績史乘에 숨겨져 後人이 알지 못하는 者 中에 오히려 民族恩人이 적지 않음을 發見하는 것이니, 過去歷史를 새로운 角度에서 再批判 再修正해야 할 것을 여기서도 또 한 번 느끼는 것이다.

家族主義勢力中心社會組織 아래 民族正義抹殺 當하고 歷史良心蹂躪되었다. 虛僞粉飾文字를 남겨 後世耳目을 어지럽힘도 그 때문이요, 民族하여 피와 땀을 흘린 이로서 그 이름이 草野에 묻혀버림도 또한 그로 한 것이다.

壬亂歷史 中에서 忠武公民族的 大恩功을 저 無知婦幼들까지라도 傳誦하여 온 것은 너무나 거룩하고 어마어마한 存在이시매, 본시부터 私情人爲히 그이 앞에는 이르지 못함으로써 그렇거니와, 그 밖에 當時節士 義人功臣 名將으로서 그 이름과 行蹟은 나타나고 은 숨겨져 稱誦落寞不一함은, 반드시 그 勳功評量結果가 아니라 血族後孫有無門閥勢力强弱緣由한 바 적지 않음도 否認하지 못할 事實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正明觀察하여 이미 나타난 이로되 盲目的으로 그를 崇敬하려 아니하며, 또한 숨겨진 이로되 그대로 그를 버리고자 아니하는 , 일찍이 普傳되지않은 李雲龍將軍을 새로금 一般紹介하려는 所以然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의 景見이요 元來慶州李氏였으나, 高麗初載寧으로써 을 삼고 다시 後世에 이르러 淸道에서 世居하였으며, 忠武公보다 17떨어져 明宗17年(1562) 9月 16日에 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채 塾師를 쫓아 文字를 배우고 다시 20歲 年長寒岡 鄭逑先生門下負笈하여 儒學으로 受業하다가 24奮然히 붓을 던지고 武擧에 오른 뒤, 26때에 咸鏡北道 慶興郡 鹿屯島에서 저 忠武公을 도와 野人 賊徒 沙送阿 甲靑阿等擊退함에 을 세웠으며 28巨濟玉浦萬戶가 되어 軍備整備함으로써 장차 올 壬辰大國亂己任을 다 할 수 있었다.

마침내 壬辰亂이 일어나자 은 나이 31, 當時慶尙右水使 元均逃亡하려는 것을 보고 愛國 報恩正論으로 慷慨 抗言함과 아울러 栗浦權官 (下級將校) 李英男全羅左水營 (麗水)으로 보내어 忠武公에게 後援할 것을 하도록 한 분이 바로 그 분이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 盟誓하고 下海하여 忠武公赴援軍들과 合力하여 5月 7日 第 1次 玉浦海戰大勝捷을 거두니 最高 指揮 首功이야 勿論 忠武公에게 돌리는 바이로되, 當時 玉浦主人公인 그의 功勞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記念日하여 統營 忠烈祠 正門 곁에 그의 紀蹟碑를 세우게 된 것을 當然할 바라 생각한다.

李植忠武公 謚狀 中忠武公玉浦萬戶 李雲龍 永登萬戶 禹致績引導를 받아 玉浦에 이르러 먼저 倭船 30船擊破하였다는 記錄으로써 這間情景을 짐작할 수 있음에 하다. 그가 忠武公幕下에 있었다 하여 반드시 忠武公補佐에만 그친 것이 아니니 湖南舟師去就로서 自己 進退를 삼던 元均을 오직 正義로써 責勵하던 이가 그이었음을 헤아려 보면, 獨立人格氣慨 자못 凡倫을 뛰어났음을 알 것이며, 또한 저 有明閑山大戰에 있어서도 忠武公과 함께 邦家安危一身死生問答한 것을 보니 마침내 戰略相議後 一死하고 賊船先犯한 분이 바로 그이었음을 생각하면 果然 英雄兒風貌가 눈앞에 彷彿하는 바 있다.

戰亂  2年 3月에 그가 으로 起動이 어려웠을 때 三師 諸將兩道 軍人으로 問疾하지 않은 이가 없었더라는 것도, 그가 平素軍中衆心을 얻은 바 있었던 것을 證左하는 것이다. 戰亂 第 3年 그의 나이 33歲時 4月 6日忠武公閑山陣中에서 武科 別試開場하고 戰時 人材登用할 적에 當時 熊川縣監으로 있던 그를 試官一人으로 選擇했던 것을 보면(忠武公 亂中日記) 그의 實力이 어떠했던 줄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慶尙左水使陞進한 것은 戰亂 第 5年(35) 正月이었던 바 忠武公日記하면 그는 慶尙左水使陞進에도 매양 忠武公에게 極盡히 하였고, 忠武公도 그와 함께 酒盃를 나누고 舟中에서 同宿하는 그를 敬愛하였던 것을 隨處隨處에서 發見할 수 있거니와 6塩浦로 옮겨 附賊人民 五百餘戶救出하고 戰艦建造함에 專力을 하였던 바 翌年 正月加藤淸正蔚山 西生浦로 돌아와 通譯人에게 一名將右道로부터 이리로 왔다고 하더니 이 사람이 그 사람이냐고 물었다는 것이 바로 그를 指稱함이요, 또는 그것은 곧 그대로 그가 倭賊畏憚하는 人物이었던 것을 알려주는 消息이었던 것이다.

戰亂 6年 3月 忠武公投獄後 元均統制使가 되었다가 마침내 再亂이 일어나 7元均하여 우리 水軍全沒狀態에 빠진 다음 으로부터 나온 忠武公海域戰船을 거두어 다시 海戰하는 때에 慶尙左水使 李雲龍都元師命令으로 陸戰하게 되었거니와, 그는 에 있어서도 永川 倉巖野戰에서 大勝함으로써 安康 以北淸正하였던 것이요. 다시 그 다음 해 第 7年 終戰時忠武公露梁에서 戰歿하던 때 그는 釜山前洋에까지 尾擊하여 最後戰功을 세우기까지 一役完遂에 드디어 水營 舊域으로 돌아와 洗兵하였다.

7年戰亂終焉後 翌年 38歲營舍重創하고 軍卒再整備하는 一方 人民募集하여 屯田하여 軍糧饒足케 하고 다시 그 다음 해에는 釜山浦移駐하여 무너진 舊城修築하는 等 戰亂中傷痕을 어루만지는 途中謀略中傷으로 遞職하니 그날의 政界依然히 그 可憎醜態를 숨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시 그 다음 해 40때에 漢陰 李德馨嶺南體察할새 海路에 가장 익숙하다 하여 幕將을 삼고 同伴하여 海上周觀하여 傍海營樓 海賊 往來要衝我師 遮遏를 일일親察을 일컬어 海門主人이라 하고 朝廷에 다시 推擧하여 左水使復職케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41때에 釜山城修築하고 軍營改作하매 門樓壁壘精彩一變하였다.

그해 9鄕里 慈堂病勢하매 淸道奔省하였던 바 當時 統制使 柳珩元來 그를 猜忌하던 나머지 이것을 彈劾하여 마침내 10拿令이 내려 投獄되었다가 11西生浦杖流되었는데 그가 出獄하자 母夫人凶訃가 이르렀으니 저 忠武公境遇恰似한 것을 생각할 때 다시 한 번 歎息할 수 없다.

그러나 휘하 諸將訟冤 上書翌年放還됨과 同時甲辰錄勳時息城君으로 하니 息城載寧舊號다 다시 그 翌年 44歲母喪하자 2都摠府副摠管 兼 備邊司堂上 捕盜大將 火器都監提調하여 時局 收拾方略開陳하여 國家裨益이 많으셨고 9三道水軍統制使任命되니 무릇 忠武公으로부터 創設職制에 있어서 第 7代就任한 것이며 때는 終戰 後 7年이었다.

그가 巨濟忠武公遺廟를 세우매 모든 戰艦商船發行할 적마다 必告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또 지금 統營忠烈祠도 그가 統制使任命翌年 45歲 때에 國命을 받들어 그의 손으로 세운 것이며, 그는 救國 濟民忠武公 指導을 입은 忠武에게 이같이 崇禮心을 다하였던 것이다. 果然 後任 統制使에서도 그의 人格이 가장 뛰어난 분임을 記憶해야 할 것이다.

漢陰 李德馨白沙 李恒福에게 보낸 書信中嶺南에 이르러 李雲龍을 만나보니 자못 氣局이 있고 하며 事理에 밝을 뿐아니라 舟楫熟練함이 그 比類를 찾기에 어렵다 하겠거니와 前日 故 李統制(忠武公)古今島에 있을 때에(戰亂 最終年) 그가 내에게 雲龍을 가르쳐 此任할만한 이는 저 사람이라 말한 일이 있었는데 果然 그 말이 虛言이 아니었고一節이 있음을 보면, 일찍 忠武公도 모든 幕下 諸將中李雲龍人格實力信賴하였던 줄을 알 것이다.

그가 統制使職位에 있는 것이 무른 22個月軍政에 있어서 慈威兼行함이 果然 忠武公精神을 그대로 繼承하였다 하련마는, 마침내 構陷에 빠져 罷職되고 數個月이 지나 46歲 10月咸鏡道兵馬節度使任命되었다. 대대적으로 北方軍備再整頓하는 一方 膽力者를 모아 別隊編成하니 營軍騎馬者가 4천하고 精銳步卒이 오백餘名突破하였으며, 破壞된지 오랜 甲山城重新시키고 北靑東南 門樓創建하는 자못 軍聲大振하였으나 48에 다시 忠淸道水使左遷當하였다가 그나마 誣告를 입어 遞職되고 그 翌年 49歲된 7月 2日으로 하니 忠武公이 가신지 12年後이었다.

이 같이 最後不遇로써 끝마친 것에 우리는 憐憫을 참지 못하거니와, 그의 一生하여 冷靜觀察한다면 澤堂 李植墓誌銘을 쓴 忠義 信讓이라 한 것이 適評이라 하겠다. 忠義 信讓四德實踐하여 軍民間師範이 된이요 忠武公 一去後海門主人이라 일컫던 이라 한데, 士人請狀으로 琴湖書院을 세워 祭祀하고 黑石里影堂을 지어 眞影을 걸었건만, 直系血孫이 끊어지자 돌아보는 이 하나 없고 마침내 記錄殘片조차 숨어져가는 오늘, 마침 그이 傍孫中數人이 있어 진작 작년중에 爲堂 鄭寅普氏에게 請囑하여 紀蹟碑文하게 하였던 바, 이제 金石에 올려 由緖깊은 忠烈祠 正門 곁에 세우고 그 除幕式擧行한다. 하기로 나도 또한 一文하여 歷史上 忠義人物과 그 精神再宣揚함에 一助코져 하거니와, 이제 숨겨진 人物이 다시 나타나게 됨은 吾人本懷, 즐거이 생각하는 바이로되, 다른 한편으로 撰者 爲堂北虜에게 묶여간 채 오늘의 式典一席이 비어있음을 슬퍼하지 않을수 없다.(다만 愛國同志君子古今도 없고 生死도 없음을 깨달으면서 除幕式 前日 釜山旅舍에서)

                                                                                                 註·本文當時 新聞連載된 것임.

                                                                                                  除幕은 1951年 6月 11日.

 

 

 

의령 지정 웅곡 묘소 동네앞 5백년 쌍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