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장군

황와 2013. 6. 7. 17:14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 장군(李雲龍 將軍)

 

 

1562(명종 27)부터 ~ 1610(광해군 2) 선조 때의 무신이다.

본관은 재령이씨(載寧李氏)요, 아버지는 남해현령 몽상(夢祥)이요, 어머니는 밀양박씨로서 1562년 명종 17년 9월 16일 청도군

매전리 명대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견(景見), 호는 동계(東溪).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고생스럽게 자라면서도 공부를 부지런히 하였고 사물을

관찰하는데 명료하였으며 나라 걱정을 하였다.

24세 때 武科에 급제하여 26세에 선전관을 제수 받았다.

당시 병조판서 류성룡의 뒷받침으로 옥포만호로 부임한 3년 만에 임진란을 만났다. 임진란 당시 옥포는 거제 7진의 하나로

주위 330m, 높이 5m의 큰 성이 있고 항만이 잔잔하고 깊숙하여, 인근에 아주 아양과 조라 덕포 송정마을이 있어 해안 경계의

요새지이다.

지금은 그곳에 옥포조선소가 1973년부터 건설되어 주택 단지로 구획 정리를 하고 있어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다.

당시의 만호는 무관 종4품을 진방케 했다. 임진란때는 이운룡장군의 나이 31세로 혈기 왕성 할 때다.

임진란 때 만일 이운룡장군과 같이 용맹한 장군이 없었다면 청사에 빛나는 옥포 대승첩과 남해 노량, 고성 당항포 같은

대첩의 전승은 없었을 것이요, 이순신 같은 영웅도 나오지 않했을지 모른다.

이운룡 장군이 옥포를 방어하여 첫 승전하므로 해적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만큼 가장 초긴박하고도 중요한 때에 승리의 계기를 마련한 이가 바로

이운룡 장군이다.

거제도는 그 당시 경상 우수사 원균의 지휘 아래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침입한 일본의 고니시유키가(小西行長)등의

육군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전라도를 향하여 가던 중 옥포에 이르렀다.

원균은 적의 기세가 강세한 것을 보고 육지로 도피 하려 하였다. 이것을 본 옥포만호 이운룡 장군이 항언하여 말하기를,

이곳은 전라, 충청 양도의 인후인데 이곳을 버리면 전라, 충청이 위태로울 것이니 끝까지 지켜서 왜적을 격퇴해야 합니다.

우리 병사로서는 도저히 적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께 구원을 요청하여 좌·우수사 병력이 합세하여

적을 격퇴 하여야 합니다.

적의 기세가 너무 등등 하니 전세를 거두어 잠간 퇴각 했다가 기회를 보아서 적을 무찌르도록 합시다.

아니 되옵니다. 이곳에서 적을 막지 못하면 전라, 충청이 떨어지고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곳은 소장(李雲龍)이 끝까지 사수 하겠아오니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이 영남 장군을 오늘밤 안으로 전라 좌수영에 보내어

구원병을 오게 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이영남 장군이 전라좌수영 이순신 장군께 가서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장군께 아룁니다.

무엇이냐?

4월 13일 부산포에 침입한 왜적들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전라, 충청의 길목인 옥포성에 도착하여 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왜적들은 훈련을 받은 용맹스러운 군사요, 숫자적으로 많은데다 신무기 조총을 사용하고 있어 불가항력이오니 장군께서

출동 하시어 격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이순신은,

사정은 퍽이나 딱하고 위태롭다마는 그곳은 나의 관할이 아닐 뿐더러 조정의 승낙도 없이 관영을 버릴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얼굴에 나라 걱정의 수심이 가득찬 채 입을 다물고 묵연히 생각에 잠겨 있을 뿐 도저히 말이 없다. 엄숙한 순간이다.

장군 옥포도 이 나라 땅이요 그곳 백성도 내 부모 형제요, 이 나라 백성입니다. 이 나라 백성이 왜적에게 짓밟히는 긴박한

시기에 어지 관할과 조정의 승낙을 기다리겠습니까? 속히 단안을 내리시어 출동케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눈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묵연히 앉아서 무엇을 깊이 생각한다. 몇 시각이 흘렀다.

천년 만년의 세월이 흐르는 것과 같이 이영남의 마음은 초조했다.

긴 초여름의 밤이 드디어 새고 먼동이 튼다. 이순신장군의 눈빛이 빛나면서 장검을 빼어 높이 허공을 가르면서,

여봐라 곧 출동 준비를 해라. 그래 그곳도 내 나라, 내 민족이 사는 우리의 땅이다.

이리하여 오월 초사일 축시에 발선 명령이 내렸다.

판옥선 21, 협선 15, 포작선 46척으로 출동하여 소비포에서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고 초5일 당포(고성 앞바다)에서 우수사

원균과 만나자는 장소에 가니 원균은 없었다.

초6일 원군이 한산도에 전선 한 척을 타고 왔다. 전투할 계고를 의논하였다.

남해현령 이기호 미조항 첨사 김승용 평산포권관 김추동 사랑도 만호 이활 소비포권관 이영남 영등포 만호 우치적 지세포 만호

한백록이 송진포에서 하룻밤 자고 초7일 새벽 한 시에 출선하여 오(午)시(12시 정각) 옥포만에 도착 왜선 30여척을 격침하여

맨 처음 옥포 대승첩을 거두었다.

이운룡 장군이 끝까지 옥포성을 사수하였고 또 이충무공의 구원병이 와서 합세하여 대성공을 한 것이다.

만일 그때 이운룡 장군과 같은 용장의 옥포성 방어와 이충무공의 원군이 아니었더라면 청사에 빛날 옥포해전도 없었을 것이요,

이 충무공 같은 영웅도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의 말 한 마디와 마지막까지의 옥포선 방어 결전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임진란 중 4차 해전 십도접전에서 매양 큰 공을 세우고 이듬 해에는 웅천현감이 되어 충무공 막하에서 용맹을

떨친 것은 충무공 난중일기에 운룡 장군의 전승 기록이 자주 나온다.

1596년 병신년 35세로 경상우수사가 되자 이듬해 정유년 정월에 재침한 적의 선봉장 카토오키요마사(加藤淸正)가 와서 보고

무서워 당황 했다고 한다.

해상에서 원균이 패전하였지만 육지에서는 이운룡 장군이 왜장 카토오의 군대를 무찔러 크게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이 많은 공을 세웠건만 관운은 평탄치 못해 파직 되었다가 다시 재임명되기도 하였다.

그 후 44세에 제7대 통제사가 되어 부임하자 충무공을 사모한 나머지 충무에다 충렬사를 건립하여 충무공의 영정과 명조,

팔사품을 모시고 춘추 향사를 올렸다.

그 뒤 장군은 관운이 쇠퇴하여 통제사에서 파직되어 함경남병사, 충청수사로 전전하다가 결국은 충청수사 때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

장군은 옥포만호로부터 웅천현감, 통제사, 함경남병사, 충청수사, 도총부부총관, 포도대장, 화기제조를 거쳐 식성군(息城君)

봉해졌지만 임진 공신록에 선무삼등공신록권을 내려 후세에도 그의 공에 비해 낮은 훈공에 분개한다.

장군은 오직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마침내 광해 2년 경술 7월 초2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장군을 사모하는 후인들이 경북 청도에 금호서원(琴湖書院)을 세워

영정(影幀)을 모시고 향사를 지낸다.

1977년부터 옥포 대승첩지인 옥포만 만두를 성역화 하고자 임란공신 거제 태생 22공의 후손들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요로에

건의하고 있으며, 옥포리 주민의 공유림 8만 6천평을 기부 채납 받아, 1982년 3월에 거제군유로 이전등기하였다.

이 성력화 사업은 충무공을 주벽으로 이운룡 장군과 거제 의병장 22공신을 함께 배향하는 충의사(忠義祠)를 건립할 것이다.

이운룡 장군의 공훈비가 옥포성내의 마을 복판에 있는 것을 1970년 그곳 경로회가 주동이 되어 옥포초등학교 뒤의 밭에다

마지막 만호를 지낸 김형구(金亨九)의 비석과 같이 옮기고 작은 공원을 만들었다.

                                                                                                                   출처/ 巨濟郡誌

 

 

        의령 지정 웅곡 기강서원내 장군 사당 충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