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 장군(將軍) 생애 공훈
서(序)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그의 징비록(徵毖錄)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순신(純臣)이 없었던들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고서는 군량이 없고, 군량 없이는 원병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오늘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이 호남을 보존하고 남해 제해권을 확보하기까지 절대적인 공로가 있었던 당시 옥포만호(玉浦萬戶) 李雲龍(1562~1610)장군의 업적을 여기 약술하고자 한다.
1. 천 거
亂(壬辰倭亂)前 병조 판서였던 류성룡은 불차승용원칙(不次陞用原則…인재를 등용함에 서열을 무시 초월함)을 주장하면서 ⌜장차 국가 중책을 맡을 인재를 등용함에 서열을 가릴 수 없다.⌟하였다.
당시 선전관이던 28세의 이운룡을 해군 요충지 거제도의 옥포만호로 기용했다. 정읍현감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등용된 것도 류성룡의 이 불차승용원칙(不次陞用原則)에 의한 천거였다.
2. 역사적 위업
부산에 상륙한 왜(倭) 육군이 스무날이 못되어 서울에 입성할 즈음, 왜 수군(水軍)은 낙동강 하구를 거쳐 거제도로 침공해 왔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무기와 병선을 바다에 함몰시키고 도주하려 하였다. 이 때 31세의 옥포만호 이운룡은 상사인 원균을 꾸짖어 말하되 ⌜영공(令公)은 경상 우수사 직책으로 여기를 지키다가 죽음이 마땅하거늘 어찌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려 하느냐! 이곳이 무너지면 호남이 위태롭고 호남을 잃으면 국가가 무너질 것이 아니냐! 아직 호남 수군이 건재하니 급히 청원하면 응원 올 것이다. 그리하여 합동작전으로 이 거제를 방비하여 적의 서진을 끊어야 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원균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렇다면 전라 수군을 그대가 청해오라.⌟하였다. 장군이 답하기를 ⌜율포(栗浦) 군관 이영남(李英男)이 평소 이순신을 잘 아는 사이니 심부름을 보냄이 마땅하다.⌟하였다.
원균은 장군의 말대로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놓고 남해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장군은 홀로 남아 영등포만호 우치적(禹致績) 현령 김준민(金俊民) 등과 함께 토적(討賊)을 맹세하고, 전라 수군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사전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 때 전라 좌수영의 이순신은 모든 포구에 있던 수군을 여수 앞 바다에 집결시켜 놓고, 적이 그 경계선 안에 침공해 옴을 기다려 요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영남의 전언(傳言)을 듣고 급히 제장들을 불러 옥포 방면 원군 출동 여부를 놓고 토의하였다. 제장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우리 해역을 지키기에도 오히려 병력이 부족하거늘 무슨 겨를이 있어 남의 구역까지 원정하려 하겠는가!⌟하는 반대 의사였다. 그러나 오직 녹도만호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 두 사람만은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머금고 ⌜적을 치는데 어찌 누구의 도(道)냐, 아무게 구역이냐를 따지겠는가! 먼저 적의 예봉(銳峰)을 꺾는다면 본도(本道)의 방비 목적도 스스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겠느냐!⌟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크게 기뻐하여 출동 결의를 확정하고 조정에 장계하여 선조의 윤허를 얻어 출정하였다.
이리하여 이루어진 옥포, 당항포, 한산도 三대첩은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로잡아 주었다. 옥포 앞바다에서 전라 좌수사 이순신을 맞이한 이운용은 당연히 향도요, 선봉장일 수밖에 없었다.
위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조선 중기 사(四)대 한학자이며 문장가인 이식(李植)은 그의 문집 ⌈택당집(澤堂集)⌋에서 ⌜이순신과 원균을 합종(合從)시켜 국운을 바로 잡은 이운룡의 공이 양수(兩帥) 아래 있지 아니하다.⌟고 격찬하였다.
3, 통제사(統制使) 이운룡
당시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은밀히 묻기를 ⌜만약의 경우 공의 후임을 천거한다면 누구를 추천할 것인가?⌟하였더니 이운용이라 하였다.
이 문답으로 17세 연령 차이에도 불구하고 존경하고 사랑한 두 장군 사이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운룡을 경상좌수사로 기용한 것은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요, 이운룡을 이순신 사후(死後)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한 것은 후에 영의정이 된 이원익이다.
4, 선조 교서(敎書)
평란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선조대왕은 비단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써서 옥새를 찍어 내리셨다.
⌜기울어진 국가를 구해 주었고, 헝클어진 왕실의 위엄을 바로잡아준 너의 공을 표창하여 선무(宣武)공신에 녹(錄)한다. 초상을 그려 후세에 보존케 하고 자손에게 영세면책특권(永世免責特權)을 부여하며 부상으로 토지와 노비 등을 하사한다. 그리고 단을 쌓아 식성군(息城君)에 봉한다.⌟
5, 정인보(鄭寅普)의 기적비(紀蹟碑)
광복 후 통영 땅에 당대 석학 정인보(1892~ ? )는 기적비에 이렇게 새겼다.
⌜당신은 충무(忠武)에게 바다를 제압하는 위업을 마련해 드렸고, 충무는 당신에게 三군에 으뜸가는 대우를 하였더라.⌟
주장이니 부장이니를 초월하여 의로써 맺어진 사이더라. 충무가 한산대첩에서 적을 외양(外洋)으로 유인 섬멸한 전법은 바로 당신의 전법이더라. 바닷길의 험이(險易), 섬들의 개합연절(開合連絶)에 전통했고, 화기(火器) 다루는 법은 더욱 신통했던 당신이 충무를 도와 꺾인 시세를 승리로 이끌어 온 사실을 국사(國史)가 바로 전해주지 못한 점 많도다. 당신께서 통제사 시절 기용하신 강예수(姜禮秀)와 분동(噴동), 우수(禹壽), 나대용(羅大用)과 전함 등에 관하여는 국사에 뜻있는 후진들이 더욱 연구해야 할 것이로다.⌜당신은 충무를 못 잊어 곳곳에 사우(祠宇)를 세우셨고, 三○○여년 지난 오늘 우리는 당신을 못 잊어 이곳에 비를 세우노라.⌟
6, 장군의 생애
장군은 천자(天資)가 총명하여 24세에 약관으로 무과에 급제하였고 한거시(閑居時)에는 서책과 친했고 서한(書翰)은 유생(儒生)과 같았다 하였으니 바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격자라 하겠다.
평시에는 천품이 온후하였으나 급변(急變)과 대절(大節) 앞에서는 신채(神采)가 날카롭고 언론이 산해(山海)를 가르고 사기(事機)를 결단(決斷)하고, 의지를 확정하고는 태산 부동이었다. 충(忠)으로 국가 민족을 위했고 근(勤)으로 직분(職分)을 다한 위인이었다.
장군의 전리품을 원균이 수습하여 나라에 장계하여도 개의치 아니했고, 선무공신 三등 말미(末尾)에 기록해도 개의치 않았다. 살아생전에 그러하셨으니 사후(死後) 300여년이 지난 오늘, 이 나라는 온통 자주(自主)니 주체의식(主體意識) 등으로 선인들의 위업 발굴에 바쁜 세상이건만 당신께서는 묘소에 추초(秋草)만 흩날려도 스스로 한가하신가!
현재를 사는 우리의 임무는 이러하다. 30세 전후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셔서 불편부당(不偏不黨) 나라를 사랑하셨고 시대를 뚫어 보는 정확한 판단으로 이 민족의 오늘이 있게 하신 당신의 업적을 발굴 연구하여 후세에 귀감으로 이어줄 의무를 통감한다.
맺는말
장군은 손자대(代)에 무후(无後)하여 외손 밀양 손씨가 봉사해 왔다.
그런데 근래 장군의 혈손(血孫)이 면면 이어 와서 밀양 산내면에 살고 있음이 동소공(同韶公 : 李林浩))의 고증(考證)에 의하여 확실해졌다. 그 후 국사편찬위운회 최영희 팀에 의하여 더욱 확실해졌다.
장군의 사자(嗣子)는 엄(儼)이요. 엄(儼)은 이녀(二女) 있었고 측실(側室)에 二子가 있었는데 장자(長子) 중화(重華)는 요사(夭死)하고 차자 재화(再華)가 있었다고 족보에 기록되었을 뿐이었는데 이번 나타난 혈손이 바로 재화 후손이다.
당시 조선 풍속은 외손봉사가 인정되었고, 또 적서 차별의 사회적 제약으로 이 혈손은 빛을 잃고 영남 각 읍을 전전하면서도 한대(代)도 누락 없이 호적단자를 하여 오늘의 주민등록 등본까지 이어 갖고 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혈손이 지난날의 사회적 병폐였던 적서차별 대우에서는 벗어났다 하더라도 현대사회에서 다시 가난과 무학의 음지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장군의 위대한 역사적 업적을 계승 보존 발전시킬 구심점이 필요한 이때에 혈손이 나타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우선 이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어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해여는 뜻 있는 분들의 배려가 요청된다.
또 한 가지는 현재 발굴되어 있는 사료(史料)들을 영인 혹은 출판하여 학계의 연구 자료로 공개하는 일도 시급하다.
신문 잡지 드라마 등을 통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일, 나아가서는 학교 교재에 수록하는 일, 흩어져 있는 유물 유적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일 등을 추진하기 위하여 기념사업회의 설립도 요청된다.
아울러 이 글은 방조(傍祖)란 나약한 인정이나 혈연(血緣)을 떠나, 사실(史實)을 고증(考證)하여 썼으며 끝으로 장군의 연보와 유적을 참고로 첨부한다.
附錄
1. 연보(年譜)
1, 탄생 : 1562年 (明宗 壬戌) 9月 16日, 청도태생
2, 등과(登科) : 1585年 (24세) 무과 합격
3, 관직(官職)
1587年(26세) 선전관(宣傳官)
1589年(28세) 옥포만호
1593年(32세) 웅천현감
1596年(35세) 경상좌수사
1604년(43세) 선무공신 삼등, 식성군(息城君)에 함.
1605년(44세) 삼도수군통제사
1607년(46세) 함경남병사
1609년(48세) 충청수사
4, 別世 :
1610년(49세)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포도대장 화기도감제조 추서
2, 유적(遺蹟)
1, 묘소 : 경남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웅산 묘비명 (택당 이식 撰)
2. 서원 : 금호서원(琴湖書院 (淸道 琴村)), 기강서원(岐江書院 (의령 묘소 앞))
3. 기적비 : 통영소재
4. 거영일기(居營日記)
5. 계본등록(啓本謄錄)
6. 영정(影幀)
7. 녹권(錄券)
8. 호적단자(戶籍單子)
西紀 1980年 4月 20日
방후손(傍後孫) 정희(定熙) 쓰다.
※ 참고문헌 :
① 한국사대계(韓國史大係)
② 택당집(澤堂集)
③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
④ 정인보(鄭寅普)의 기적비문(紀蹟碑文)
⑤ 선조교서(宣祖敎書)(철권(鐵倦)=녹권(錄倦))
경북 청도 이서면 금호서원
'따뜻한 만남 1 > 조상사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갈촌(葛村) 이숙(李潚) (0) | 2013.06.07 |
|---|---|
|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천재 전략가 이운룡 (0) | 2013.06.07 |
| 제7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운룡장군 기적비 제막식에 제하여/노산 이은상 (0) | 2013.06.07 |
| 이운룡(李雲龍) 장군(將軍)과 기강서원(岐江書院) (0) | 2013.06.07 |
|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장군 (0) | 2013.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