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촌(葛村) 이숙(李潚)
함안 선비<갈촌 이숙> 임란 때 함안서 의병 모집
임란 때 함안 소모관(召募官)의 직책을 맡아 많은 의병들을 모집한 남명 문인 모촌(茅村) 이정(李瀞)의 동생이다.
또한 그는 임란 당시 경상감사의 막하에서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우기도 한 무과 출신 장수이기도 하다.
갈촌은 재령인(載寧人)으로 1550년(명종5년) 증 병조참판 경성(景成)과 여주 이씨 사이 4형제 중 막내로 함안 모곡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여징(汝澄)이다. 타고난 자질이 남 달라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특출하였으며, 장성해서는 활쏘기에 통달하였다 한다. 남명 선생이 모곡으로 부친 참판공을 만나러 왔다가 4형제가 의좋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이 '모촌 연보'에 전하는 것을 볼 때, 갈촌은 어려서 부친과 형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27세 때 무과에 합격을 했으나 곧 물러나 벼슬하는데 뜻을 두지 않고 중형 모촌공을 따라서 고을에 있던 여러 현인들과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하였다. 이때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고을 자제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갈촌도 여기에 참여하여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였다.
임란이 일어나기 한 해전인 1591년. 남쪽 왜적이 침입할 기미를 보이자 조정에서는 이를 대비하기 위하여 장수들을 가려 뽑았는데, 이때 갈촌은 제포만호(薺浦萬戶)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였다. 제포는 웅천현(熊川縣) 남쪽 5리 지점에 있으며 김해부 경계까지는 15리 거리이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갈촌은 천성진(天城津: 현재 가덕도 근처) 만호 신초(辛礎), 생질인 박진영(朴震英)과 함께 김해에 들어가서 적을 막아낼 계책을 세우려 했으나 부사 서예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 성이 텅 비어 있었다. 갈촌은 박진영과 신초에게 이르기를 "텅 빈 성은 지킬 수가 없다. 또 우리들이 이곳에서 무익한 죽음을 하는 것보다 겹겹의 포위를 빠져나가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칼 한 자루로서 서로 맹서하고는 달려서 영산현의 멸포진(蔑浦鎭)에 도착하였으나, 적병은 추격해 오고 강에는 배도 없었다. 갈촌은 즉시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 말다래를 끊고 말을 뛰게 하여 마침내 강을 잘 건너게 되었다. 감사 김수가 이 말을 듣고는 장하게 여겨 조정에 청하여 자기 막하에 소속케 하였다. 이 때 갈촌의 형인 모촌은 초유사 김성일을 따라 진양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으며, 홍의 장군 곽재우는 의병을 거느리고 의령에 진을 치고 있었다. 갈촌은 진양으로 가면서 망우당 곽재우를 찾아보니, 망우당이 말하기를 "감사 김수가 방비를 소홀히 하고 적을 피해 도망만 다녀 적이 우리 도에 들어와 백성들이 왜적에게 무참히 살육되고, 임금 서쪽으로 피난 가게 했는데도 조정에서는 내버려두고서 그 죄를 캐묻지도 않으니 내가 격문을 보내어 이를 목 베어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갈촌은 이를 말리면서 말하기를 " 공의 말은 진실로 충의 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김수는 나라의 중요한 임무를 맡은 감사이고 공은 곧 서생인데 왕명도 없이 사사로이 서로 공격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 듯 합니다. 내가 돌아가 마땅히 감사에게 알려서 정성을 다하여 적을 토벌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밀암(密菴) 이재(李栽)가 지은 유사(遺事)에 나오는 구절이다.
갈촌은 김수의 막하에 있으면서 항상 군대의 앞장에 서서 적을 쳐 적의 머리를 삼십 여개나 베었는데도, 끝내 공로를 자랑하는 뜻이 없으니 초유사가 이 일로써 장하게 여겨 영산(靈山)의 가수(假守)로 삼았는데 여러 가지 사무가 모두 잘 처리되었으므로, 마침내 조정에 아뢰어 정식 현감으로 삼았다. 영산 고을은 적병이 침입하는 요충에 있었는데도 그가 관직에 있던 날에는 왜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한다.
정유년에 적이 재차 침범할 때 적병이 낙동강 오른쪽 여러 고을에 나누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듬해 여름(1598년)에 조정에서 또 공을 합천군수로 임명하니, 통제사 정기룡과 더불어 적을 토벌하는 계책을 서로 도와서 적을 뒤쫓아 미숭산까지 가서 적을 쳐서 부수었다. 이 해 가을에는 또 별장 조 계명과 더불어 힘을 합쳐 적을 뒤쫓아 쳐서 적의 머리 사십여 개를 베고, 사로잡혀 갔던 남녀 오십 여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합천군수로 재임할 때 정사가 간결하고 송사가 공평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왜란이 끝나자 갈촌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함안 고을의 동쪽 봉명정(鳳鳴亭) 위에 정자를 짓고서 자연을 벗 삼아 스스로 즐거움을 삼았다. 낙향하여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던 갈촌에게 관찰사 이용순(李用淳)이 찾아와 벼슬에 나갈 것을 권하며 "난리가 평정된 후 낙향을 한 것은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닌 것 같다"라고 하니 갈촌이 말하기를 "시대는 이미 태평스럽다. 태평성대에 일개 백성으로서 고향에서 늙어 가는데 무엇이 싫겠는가."라고 하며 또 "선비가 갈 길이 있는데 공명을 어찌 구하겠느냐"하였다. 갈촌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나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태평한 시절을 만나면 물러나 한 백성으로서 편안한 삶을 누리고자 하였다. 공명을 차지하기 위해 남을 해치는 일이 다반사인 현대인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일화이다. 이후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던 갈촌은 을묘년 향년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갈천이 세상을 떠난 후 함안의 선비들은 어사에게 글을 올려 이르기를 "도내 함안군에 전 합천군수 이숙 공이 있는데, 그가 임진왜란 때 충성을 다하여 세운 훈공은 마땅히 조정에서 표창을 내려야 하는데도 지금까지 없으니 저희들이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갈촌의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갈촌의 행장에서도 "뛰어난 공훈과 충절이 이와 같이 환하게 빛나는데도, 벼슬은 군수의 직위에 그치고, 나이는 칠십세에 미치지 못했으니 하늘의 보답한 것은 어찌 그리도 어긋나는가."라고 하여 갈촌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후일 함안의 선비들은 도계(道溪)에 사당을 세워 갈촌을 향사지내고 있다.
/(1997.9.12. 경남일보)
함안 가야읍 인곡 갈촌선생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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