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우산(于山) 이훈호(李熏浩)

황와 2013. 6. 7. 19:17

 

              우산(于山) 이훈호(李熏浩)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장내마을. 마을 입구 세워진 고색창연한 비석의 고려동학(高麗洞壑)’이란 글귀가 눈길을 끈다.

고려동학은 고려동 골짜기란 뜻이다. 고려 말 성균관(成均館) 진사 모은(茅隱) 이오(李午) 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유민으로서 절의(節義)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개성 근처 두문동을 떠나 백일홍이 만발한 이곳을 택하여 담장을 쌓고 거처를 정했던 곳으로, 지금도 후예들이 이 땅을 지키고 있다. 땅만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은 선생의 정신 또한 면면히 계승해 오고 있다.

 조선말 학자 우산(芋山) 이훈호(李熏浩) 역시 모은의 후예이다.

행동은 성현의 길을 잃지 않았고 말은 후학들의 교훈이 되었다. 생전에는 어두운 거리의 빛과 같았고, 세상을 떠났을 때는 밝은 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선비들이 경애하고 애석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잊을 수 없으니 우산 이공이 이런 분이다

 그의 묘갈명 첫 구절이다. 모은의 후예 우산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우산은 1859년 함안 산인 갈전리(葛田里)에서 선흠(善欽)의 아들로 태어났다.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우산은 어릴 때부터 형들의 지도아래 공부에 매진했으며, 15~6세쯤에 이르러 문리가 보통이 아니었다.

 약관의 나이로 삼가에 살고 있던 매옥(梅屋) 박치회(朴致晦)를 찾아가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학문을 연마했다. 매옥은 한말 대학자 만성 박치복의 아우로 학문이 뛰어난 선비였다.

 우산이 학문을 연마하는 동안 매옥이 크게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재주가 범상하지 않다. 노력하면 옛날 훌륭한 사람들 못지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우산은 젊었을 때 청운(靑雲)의 꿈을 가지고 과거 공부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향시에 나가 부정이 개입되는 것을 목격하고 이후로 청운의 꿈을 접고 오로지 성현의 학문 요체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심혈을 기울여 인근에 명성이 자자했다.

 과거 공부를 접은 우산은 성현의 책을 가지고 무릉산(武陵山) 아래에 기거를 하면서 독서에 전념했다. 무릉산은 현재 함안군 칠원면과 칠북면에 걸쳐 있으며 칠서면의 무릉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산 아래 무릉마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 선생의 숨결이 깃든 마을이다.

 우산은 당시 흉년이 빈번히 들어 끼니를 굶을 정도가 되어도 독서를 그만 두지 않았다. 마치 공자의 제자 안연이 끼니를 거르면서 학문에 정진했던 것처럼 우산도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끼니를 굶을 정도로 곤궁한 생활을 했지만, 인근의 학자들과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면 학문을 토론하며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40세가 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향에 돌아오니 우산의 명성을 듣고 글을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이 넘쳐 났다. 우산은 찾아오는 제자들을 사양하지 않고 모두 가르쳤다. 자질이 현명하거나 어리석은 것을 가리지 않고 자세히 가르쳐 주면서 깨우칠 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문장력이 뛰어났는데도 글 짓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글을 지을 때는 극구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지어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유림들은 당시 강우지역에는 진주의 회봉과 함안의 우산이 문장으로는 명성을 날렸다라고 하면서 우산의 문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당시 지역 선비들이 남명집을 중간(重刊)하면서 학기(學記)’를 산정하는 것을 보고, 글을 보내 이르기를 "남명 선생은 우리나라의 대현(大賢)으로 선생의 학문이 모두 학기에 있으며, 그 본지가 명약관화하다. 혹 조그마한 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큰 뜻에는 해침이 없는데 어찌 고치려고 하느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남명의 학기 산정(刪定)을 반대하기도 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북망통곡(北望痛哭)을 하면서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동지들과 더불어 나라를 떠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2년 여름에 일산(一山) 조병규(趙昺奎), 금계(錦溪) 조석제(趙錫濟), 신암(信庵) 이준구(李準九), 서천(西川) 조정규(趙貞奎), 일헌(一軒) 조병택(趙昺澤) 등 지역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 한천재(寒泉齋)에 모여 강학하고 토론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겨울에는 서천 조정규와 계속 머물면서 주역을 읽기도 했다. 이 지역 선비들은 당시 한천재에서 학문을 토론한 우산을 비롯한 6명의 선비들을 한천육로(寒泉六老)’라고 하면서 이들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우산은 거창 다전에 가서 면우 곽종석 선생을 배알(拜謁)하고 학문을 질정했다. 우산이 찾아오자 면우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명성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이렇게 늦게 만나는구나. 내가 그대의 글을 보니 모두가 고문(古文)의 체재이니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경북의 유학자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도 또한 여러 번 편지을 보내어 우산의 자질과 학문을 인정했다. 1922년 서울과 개성을 둘러보고 궁궐과 포은 사당, 기자묘 등을 둘러보고 감개한 마음을 시로 드러냈다.

 1925년 진주에서 윤백호집(尹白湖集)을 직각(直閣) 이의국(李義國), 참봉(參奉) 신홍휴(申鴻休), 김대림(金大林), 송릉필(宋凌弼) 등과 교정하기도 했다.

일찍이 우산은 형들의 많은 보살핌으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형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가세마저 기울었지만 조카들을 보살피고 양육하면서 부모 기일이 다가오면 정성을 다해 제사를 봉행했다. 집안을 다스리면서 항상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자제들에게는 충신(忠信)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공부에 매진하게 했다.

 우산은 고향에서 자제들과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나니 1932년이었다.

 일찍이 면우 곽종석, 척암 김도화 등 당대 명유들은 우산의 문장을 당송고문가들의 문장과 비길만하다고 칭찬했다. 이처럼 후세에 길이 빛날 우산의 문장은 5책의 문집 속에 담겨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