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갈암집에 나와 있는 글로서 갈암 선조가 문하생 김수연과의 주고 받은 편지 글이다.
김수연(金粹然)
1669년(현종 10)~ 1700년(숙종26)영주 출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유청(幼淸),아버지는 김정하(金鼎夏)
어려서 외조부 홍빙(洪凭)에게 배웠고 관례를 한 뒤에는 갈암의 문하에 들어왔다.
숙종(肅宗) 17년(1691) 생원시 합격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며, 갑술환국을 당하여 갈암선생이 귀양 갈 때에 찾아와 전송하였고 선생이 귀양살이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오시겸(吳始謙)의 딸과 혼인하여 두 딸을 두었는데, 유광렴(柳光濂)과 김행원(金行遠)에게 출가하였다. 밀암 이재(李栽)가 묘지명을 지었다.
갈암집
김수연(金粹然)의 자설(字說) 서(序)
선성(宣城)의 김생 수연(金生粹然)이 남악(南岳)에 있는 집으로 나를 찾아와 의심나는 것을 묻고 학업을 익혔는데, 어느 날 그 자(字)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자를 유청(幼淸)이라고 지어 주었더니 또 자를 그렇게 명명한 뜻을 청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나의 고루한 말이 무슨 취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찍이 들으니, 사람의 기질에는 청탁(淸濁), 수박(粹駁), 선악(善惡)이 같지 않고, 선(善) 중에서도 맑기는 하나 순수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순수하기는 하나 맑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릇 기(氣)가 맑은 자는 밝아서 통효(通曉)하고, 질(質)이 순수한 자는 순수하여 잡박(雜駁)하지 않다. 그러므로 맑기는 하나 순수하지 않은 자는 식견은 트이지만 행실이 돈독하지 않은 면이 있고, 순수하되 맑지 않은 자는 행실은 돈독하지만 아는 것이 투철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성(性)을 바로잡아 모두 아름답게 한다는 교훈이 있게 된 까닭이다. 그대가 나에게 와서 배울 때부터 찬찬히 보고 깊이 살펴보니, 보고 듣는 것이 전일하고 언행이 신중하니, 질이 순수하고 박잡하지 않은 데에 가깝다고 하겠다. 다만 의리를 사색함에 있어 몇 겹의 막(膜)이 있음을 면치 못하니, 어쩌면 심체(心體)의 밝음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진실로 식견이 지극하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겨 끝내는 밝은 경지에 나아가려고 한다면 배움을 통해 뭇 이치를 자기 안에 모으고 모르는 것을 물어서 분변하여, 알지 못하면 그치지 않는 데에 달려 있다. 진실로 이 방법을 잘 쓴다면 반드시 장차 선에 처하기를 편하게 여기고 이치를 따르는 것을 즐겁게 여겨서 실제 일에 적용하는 것이 날로 더욱 광명하게 될 것이다. 지금 자를 명명한 뜻으로 인하여 삼가 그 설을 이와 같이 추론하니, 그대는 노력하기 바란다.
무진년 9월에 재령(載寧) 이현일(李玄逸) 익승보(翼昇父)가 쓴다.
金粹然字說序
宣城金生粹然訪余于南岳之廬。以質疑請業爲事。一日求所以命其字者。余奉字以幼淸。又請所以命字之義。余謂鄙言何足取。然嘗聞之。人之氣質。有淸濁粹駁善惡之不齊。而就善之中。又有淸而不粹粹而不淸者。夫氣淸者明而通曉。質粹者純而不雜。是故淸而不粹者。識則通而行有不篤。粹而不淸者。行則敦而知有不徹。此所以有矯性齊美之訓也。自子之從我遊。徐觀而深察之。其視聽專。其言行謹。庶幾其質之純而不雜矣。但其思索義理。不免有數重膜子。豈心體之明。有所未盡而然邪。吾子誠自病其識之未至。欲卒進乎明也。則亦在夫學聚問辨不得不措而已。苟能此道。必將安處善樂循理。而措諸行事者。日益光明矣。今因名字之義。而敬推其說如此。唯吾子勉之哉。著雍執徐月旅無射。載寧李玄逸翼昇父書。
서(書)
김유청(金幼淸) 수연(粹然) 에게 답함 을해년(1695, 숙종21)
여러 차례 질문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셨는데, 제가 전후로 편지를 받은 것이 두 차례입니다. 중간에 답장을 써서 향리 사람 편에 부쳤는데 아직 받아 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어 7월 하순에 보내신 편지를 받고 서늘한 가을에 가내가 두루 평안하심을 알았으니 그리워하던 마음에 크게 위안이 됩니다. 죄인의 몸인 저는 노년에 궁벽한 변방에서 추위와 더위에 시달려 질병으로 노쇠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이런 기력으로는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낙심이 되기는 합니다만 모두가 명(命)인 것을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쇠하고 게으른 심신을 가다듬어 노년에라도 공부를 하고 싶지만 뜻이 기운을 이기지 못해 정신이 혼모하니 아무런 소문도 없이 죽을 듯합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제가 전에 이 수재(李秀才)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한, “학문을 하여 넓혀서 그 지(知)를 극진히 하고, 경(敬)을 하여 요약해서 그 지킴을 엄히 한다.”라고 한 것에 대해, “잡아서 준수(遵守)할 곳이 없으니 초학자(初學者)가 노력하여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먼저 그 성품이 치우친 곳에 나아가 극복한 뒤에야 넓히고 요약하는 공부를 이룰 수 있다.”라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 이 말은 거꾸로 말한 것으로, 선후의 차서를 심히 잃은 것입니다. 이른바 박문약례(博文約禮)는 실로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일러 준 것입니다. 현자께서는, “이것이 어찌 초학자가 노력하여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여기시겠지만, 성인의 말씀은 철상철하(徹上徹下)하여 초학자라 하더라도 노력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니, 상지(上智)의 자질을 갖춘 뒤에야 여기에 종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자가 만약 그 공부를 극진히 하려고 한다면 순서에 따라 책을 읽어서 의리를 강명(講明)하고, 언행을 삼가서 공경히 지켜서 잃음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점차 견해가 밝고 투철하며 잡아 지키는 것이 견고하게 되면 이 또한 박문약례의 일일 것입니다.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지 어찌 잡아서 따를 곳이 없겠습니까. 무릇 성품이 치우쳐서 극복하기 어려운 곳은 참으로 우선 시급히 극복하여 다스려야겠지만 이 또한 힘으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반드시 먼저 물리(物理)를 널리 궁리하여 심술(心術)을 열어 밝혀서, 이치를 따르는 것이 즐겁고 기질의 작용을 따르는 것이 작음이 된다는 것을 안 뒤에야 차례로 치우친 것을 없애 나아가 점차 완전히 없어진 지경에 이르는 것이니, 한때의 기력으로 깎아 내고 제거하여 극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리는 정자가 일찍이 말하였고, 주자가 《대학혹문(大學或問)》에 매우 자세히 말하였으니, 현자가 그 책을 다시 가져다 익숙히 완미한다면 저의 말이 내력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지금은 우선 종전의 자기 견해를 놓아두고, 다만 글을 읽어 의리를 밝히고 일에 따라 삼가는 데 노력하고 따라서 잊지도 않고 조장(助長)하지도 않는 공부를 다한다면 오랜 뒤에는 절로 본 바가 점차 밝아지고 치우친 곳이 극복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것을 벗어나 다른 방법을 구해서도 안 되고, 또한 빨리 이루려고 가까운 효과를 구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주]잊지도 …… 공부 : 맹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방법에 대해 말하기를,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는 데 종사하되 그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속에 잊지도 말고 억지로 조장(助長)하지도 말라.”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答金幼淸 粹然 ○乙亥
承諭累度。枉問前後承領。至於再耳。中間亦嘗裁答。附之鄕便。未及關照。續得七月念後書。就審新涼。侍奉眷集。次第安勝。大慰瞻戀之懷。纍人白首窮荒。載罹寒暑。疾病潦倒。日甚一日。量此氣力。非久於人世者。以此意緖忽忽。然莫非命也。亦且奈何。惟思策勵衰懶。以收晩聞拙修之工。而志不帥氣。昏耄及之。恐遂無聞而死耳。來諭以纍前答李秀才書。所謂學以博之。以致其知。敬以約之。以嚴其守者。爲無把捉遵守處。非初學所能企及。必須先就其性偏處克將去。然後可致博約之工。鄙意以爲此却是倒說了。殊失先後之序矣。夫所謂博文約禮。實孔子之告顏淵者。賢者之意以爲此豈初學之士所可跂及。然聖人之言。徹上徹下。雖初學之士。亦可勉而至之。不但上智之資然後可以從事乎此也。學者如欲致其工程。循序讀書而講明義理。致謹言行而敬守無失。馴致至於見解明透。持守堅固。則是亦博文約禮之事。人患不爲耳。豈無捉摸持循處乎。夫性偏難克處。固當急先克治。然亦難以力勝耳。必先有以博窮物理。開明心術。知循理爲樂。徇氣質之用爲小。然後可以節次消磨。漸至融化之域。非一時氣力所可剗除克治也。斯義也。程子固嘗言之。而朱子載之大學或問中。極其詳悉。賢者更取其書而熟玩之。則可知鄙言之有來歷矣。今且放下自家從前見解。但從讀書明理隨事致謹上。勉勉循循。致勿忘勿助之功。則久久自當有見處漸明。偏處可克之效。誠不可外此而他求。亦不當欲速而求近效也。
김유청에게 답함 병자년(1696, 숙종22)
지난겨울부터 금년 가을까지 고향 소식이 한번도 이르지 않아 고독하게 혼자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마치 딴 세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8월 보름 이후에 자식이 와서 5월 22일에 부치신 편지를 받고 비로소 존조모(尊祖母)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알았습니다. 그 놀랍고 슬픈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겠습니까. 멀리서 생각건대, 효심이 순순하고 지극하시어 애통함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실 텐데 어떻게 부지하고 계십니까? 죄인의 몸인 저는 3년 동안 위리안치되어 이미 70세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질병으로 노쇠하여 점차 수년 전의 기력이 아니니 어찌 먼 앞날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전번 편지에서 우연히 말씀드린 것이 있었는데, 지금 편지에서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하시어 현자가 겸손하게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의리를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이렇게 계속 하신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탄복스럽고 탄복스럽습니다. 봄에 이군 만부(李君萬敷)가 또 전날 논한 것을 반복해서 자세히 말하여 매우 긴 편지를 보냈기에 꽤 자세하게 답장을 썼는데, 지금 전송하느라 바빠서 써서 보내지 못하고 훗날을 기다려야겠습니다.
바라건대, 상을 당한 근심으로 몸을 상하지 마시고, 일마다 정밀히 연구하고 때에 따라 체인(體認)하여 먼 곳에서 기대하는 저의 바람에 부응해 주십시오.
答金幼淸 丙子
自前冬迄今秋。鄕信不一至。夐阻幽寂。無異隔世事。八月半後家兒來至。承五月廿二書。始知尊王母夫人奄忽違世。其爲驚怛。如何盡喩。遠惟孝心純至。哀慟摧裂。何可勝任。纍人棘裏三年。已作七十歲人。疾病潦倒。漸非數年前氣力。豈可圖於久長哉。前書偶有所獻。今承奉以周旋之諭。不易賢者謙虛取人之義。若循此道以往。亦何事不濟。歎尙歎尙。春間。李君萬敷又申前日所論縷縷數百千言。供答頗詳。今因送行卒卒。不得錄往。當俟後日耳。只祝勿以喪患憂慼。便自摧沮。須逐事硏精。隨時體認。以副遠地之望。
김유청의 별지에 답함
살펴보건대, 《의례》 상복편(喪服篇)에,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하여 자최부장기복(齊衰不杖期服)을 입는다.”라고 하였고, 송(宋)나라 건륭(建隆) 연간에 예관(禮官)이 헌의(獻議)하기를, “내칙(內則)에 이르기를, ‘며느리가 시부모 섬기기를 부모 섬기듯 한다.’ 하였습니다. 부부는 한몸이므로 복제(服制)에 다름이 없어야 하는데 《의례》에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한 복을 기년(期年)으로 끊은 것은, 어찌 지아비는 거친 최복(衰服)을 입는데 아내는 비단을 입는 이치가 있어서이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 삼년복을 입게 하소서.”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습니다. 주자의 《가례》는 현행 제도를 준수하여 감히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 삼년복을 입는 것은 주공(周公)이 만든 옛 제도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후사(後嗣)가 된 자의 처가 본생(本生)의 시부모를 위해 대공복(大功服)으로 강복(降服)하는 것은 바로 《의례》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이니, 이는 그 지아비가 부장기(不杖期)로 강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아비가 부모를 위해서 응당 삼년복을 입어야 할 자의 처가 입는 복은 송나라 제도에서 삼년복으로 늘렸더라도,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의 처가 입는 복은 《의례》의 본문 외에 더 이상 의논하고 헤아릴 곳이 없기 때문에 주자의 《가례》에서 옛 제도를 그대로 본떴습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예는 후한 쪽을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의심도 하지 않고 자기 정이 쏠리는 대로 한다면 경(經)을 지키고 옛것을 믿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 유폐가 장차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하는 병통에 빠져들어 갈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현자는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1]다른 …… 것이니 : 이 내용은 《의례》에 있지 않고,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있는 내용인데 오인한 듯하다.
[주2]의례의 본문 : 《예기》인데 《의례》로 오인한 것이다.
答金幼淸別紙
按儀禮喪服篇。婦爲舅姑。服齊衰不杖朞。至宋建隆中。禮官獻議以爲內則曰婦事舅姑。如事父母。蓋夫婦齊體。服制宜無異同。而儀禮婦爲舅姑。服以期斷。豈有夫服麤衰而婦襲綺紈之理。請自今婦爲舅姑三年。制曰可。朱子家禮遵時王制而不敢違。然則婦爲舅姑三年。非周公舊制也。至於爲人後者之妻。爲本生舅姑。降服大功。自是儀禮本文。蓋其夫降服不杖朞故也。夫爲父母。應服三年者之妻之服。則雖以宋制。加服三年。至於爲人後者之妻之服。則儀禮本文外。更無議擬。故朱子家禮只仍其舊。今輒以禮宜從厚之意。率情任意行之不疑。則恐非守經信古之道也。其流之弊。必將入於不知而作之病。可不懼哉。惟賢者之更入思議焉。
김유청의 문목에 답함
예에 설치(楔齒)하고 철족(綴足)한다는 글이 있는데 《가례》에서는 채택하여 넣지 않았고, 김사계(金沙溪)는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보충해 넣었습니다. 대체로 철족을 하는 것은 뒤틀릴까 염려해서이니, 이 일은 참으로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설치는 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설치하고 반함(飯含)한 뒤에 끝내 입이 닫히지 않는다면 도리어 미안(未安)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고례(古禮)에 비록 설치하고 철족한다는 예문이 있기는 하지만 《가례》에서 채택하지 않았으니 쓰지 않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
진습의조(陳襲衣條)에, ‘늑백과두(勒帛裹肚)’라는 말이 있는데, 사계는, 과두(裹肚)는 배〔腹〕를 싸는 것이고 늑백(勒帛)은 정강이에서부터 무릎까지 묶는 것이라고 하였고,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의 《가례고증(家禮考證)》에서는 구씨(丘氏)의 설을 인용하여, “비단으로 시신의 배를 싸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소동파(蘇東坡) 시의, “붉은 요대(腰帶) 옆구리를 둘러 빛나네.〔紅線勒帛光繞脅〕”라는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이미 ‘옆구리를 두른다’고 하였으니, 정강이에서부터 무릎까지 묶는다는 말은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늑백과두의 제도는 사계의 설이 맞는 듯하고, 조호익(曺好益)의 설은 분명치 않은 듯합니다.
소렴장(小斂章)의 괄발문발조(括髮免髮條)에서, 괄발은, “삼끈으로 상투를 묶고 또 베로 두수(頭)를 만든다.”라고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피발(被髮)은 개원례(開元禮)에서 나왔고, 고례에 괄발이라는 글이 있으니, 머리를 풀지 않는다면 어디를 묶는단 말입니까. “부인의 복머리는 비녀와 머리싸개를 제거하여 상투를 드러낸다.”라고 하였는데, 처음 상을 당했을 때 남녀가 곡을 하고 가슴을 치며 머리를 풀고 맨발을 하는데 어찌 소렴을 기다려 비로소 머리싸개를 제거한단 말입니까. 지산은 구경산(丘瓊山)의 말을 인용하여, “남자가 문(免)을 착용할 때 부인 역시 포좌(布髽)를 착용하고, 성복(成服)에 이르러…….”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풍속에 부인은 환계(環髻)를 하고 머리를 싸지 않으니, 좌마(髽麻)의 절차는 베풀 곳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례》 〈상복도식(喪服圖式)〉에, “괄발은 삼끈을 사용하여 목 뒤에서부터 앞으로 넘어와 이마에서 교차하고 다시 상투를 감는다.”라고 하였으니, 애당초 피발하기를 기다린 뒤에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람들은 그 제도를 알지 못하고, 피발한 사람이 소렴 뒤에 삼끈으로 목 뒤에서 머리를 묶는 것을 괄발이라고 하는데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좌(髽)는 부인이 상투를 묶는 꾸밈인데 그 제도는 남자의 괄발과 대략 같습니다. 이는 중국에서는 부인들도 머리를 묶어 상투를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싸개는 비단으로 만들기도 하고 베로 만들기도 하는데 머리카락을 여미는 도구입니다. 소렴을 하고 나서 머리싸개를 제거하는 것은, 옛사람은 피발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인 듯합니다. 우리나라의 풍속에 부인은 머리를 묶어 상투를 하는 제도가 없으므로 좌(髽)를 베풀 곳이 없다는 말씀은 참으로 옳습니다. 다만 풍속을 따르는 것이 비록 매우 모양새는 없지만 이미 때에 임하여 갑자가 바꿀 수 없으니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소렴 후에 단(袒), 괄발(括髮), 문(免), 좌(髽)를 하는 것은 《가례》의 본문에 있는 내용인데, 사계는 또 습질(襲絰)의 절차를 보충하여 넣고, 인하여 〈사상례(士喪禮)〉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빙시(憑尸)한 뒤에 주인(主人)은 단, 문, 괄발, 교대(絞帶)를 하고 중주인(衆主人)은 포대(布帶)를 한다. - 자최 이상의 친속이다. - 천시(遷尸)한 뒤에 습질의 절차가 있다.” 하였고, 또 양씨(楊氏)의 설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습질의 질은 요질(腰絰)과 수질(首絰)의 총칭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소렴 뒤에 빙시하여 곡벽(哭擗)하고, 단, 문, 괄발, 교대를 하고, 천시한 뒤에 수질과 요질을 모두 착용하는 예를 모두 행할 만합니까? 다만 관(冠)을 하지 않은 것이 혐의스러워 문을 하고, 또 괄발하고 두수(頭)를 하고, 또 그 위에 수질을 더하는 것은 너무 번거로운 형식이 아닌지요? 그리고 습질이 고례(古禮)라면 《가례》의 소렴장에 대략도 보이지 않는 것은 왜입니까? 소렴 뒤에 습질하고 배빈(拜賓)하는 절차가 이미 고례이고, 또 구씨(丘氏)의 설도 있습니다만 경황없고 망극한 때에 너무 번거로워 지리하지 않겠습니까? 성복(成服)한 뒤에 서로 조문하는 것은 의식과 같지만, 배빈한다는 문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절을 하고, 대상(大祥)과 소상(小祥)에 와서 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절을 하니, 이것이 비록 시속의 예이기는 하지만 행하더라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살펴보건대, 〈상복도식〉에, “소렴을 하고 나서 괄발하고 단을 하고, 담장 동쪽에서 습질을 하고, 교대를 하고 나서 원래 위치로 돌아온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습이라는 것은 앞에서 단을 했던 옷을 습하는 것이고, 질이란 괄발의 위에 수질을 더하는 것입니다. 소렴을 한 뒤에 빙시하여 곡벽하고, 괄발, 단, 교대를 하고, 천시한 뒤에 요질을 하여 산수(散垂)한다는 예문이 있으니, 《가례》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주자가 일찍이 사마광(司馬光)의 《서의(書儀)》가 소략하다는 말을 하였으니, 예를 좋아하는 가문에서 고례를 준용하는 데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처음 상을 당하였을 때 배빈하는 절차는 참으로 너무 지리하고 형식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성복한 뒤에 배빈하는 것과 대상과 소상 뒤에 배빈하는 의식은 예문에는 없는 예이지만 행하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
아직 장사 지내기 전에 속절(俗節)을 만나면 예에 의거하여 제사 지내기를 사당에 제사 지내는 예처럼 합니까? 제 생각에는 명절(名節)의 다천(茶薦)은 길제(吉祭)인데 장사 지내기 전에는 길제가 없고, 집에 중상(重喪)이 있으면 사당에도 정월 초하루와 동지(冬至)와 삭망(朔望)에 참여하는 것을 폐하니, 폐하더라도 괜찮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사 지내기 전에는 매사를 평상시에 준해서 하는 것이니, 속절을 만나 시물(時物)을 써서 술을 올리고 다천을 한다고 해서 무슨 해 될 것이 있겠습니까.
졸곡(卒哭) 뒤에 슬픔이 이르더라도 곡하지 않는 것은 조석곡(朝夕哭)이 아직 있기 때문인데, 조석곡이란 상식(上食)할 때 곡하는 것을 말합니까? 새벽과 저물녘에 살피고 절을 할 때 묵묵히 참배만 해서는 안 될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석곡이란 새벽과 저물녘에 곡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식할 때 하는 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은 해가 뜨고 해가 질 때 애모(哀慕)하는 정이 더했기 때문에 새벽과 저물녘을 중시했지만, 지금 사람은 상식을 중시하니 어찌 폐할 수 있겠습니까.
장사 지낸 뒤 우제(虞祭)와 부제(祔祭) 때에 비로소 목욕하고 빗질한다는 글이 있으니, 이는 참으로 심신을 가다듬고 가지런히 하려고 하는 것인데 머리를 싼다는 글이 없는 것은 왜입니까? 일찍이 한두 경재(京宰)가 포망건(布網巾)을 써서 머리카락을 수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포건(布巾)은 두건(頭巾)과 다름이 없어서 머리카락을 수습하여 깨끗이 할 수 있는데,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장사 지내고 나서 우제를 지낼 때 목욕을 하여 정결히 하고 직접 전헌(奠獻)을 한다면 포건으로 머리카락을 수습하여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시속을 따라 두건을 쓰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돌림병으로 상(喪)을 당했을 경우 추후에 성복(成服)을 하면 초상(初喪) 때부터 성복 때까지 서너 달을 넘기기 십상인데, 상을 벗을 때에는 매양 기일(忌日)을 표준으로 삼고 있어 일찍이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변고를 만나 비로소 주자가 증무의(曾無疑)에게 답한 편지를 상고해 보니, 성복하는 날을 기준으로 제사를 지내고 상을 벗어야만 비로소 인정에 극진할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증무의와의 문답이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어류(語類)》에 기록되어 있는, “먼저 기한이 찬 자는 먼저 상을 벗고, 뒤에 기한이 찬 자는 뒤에 상을 벗는다.”는 뜻으로 미루어 보면 날을 헤아려 절(節)을 삼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불행히 때를 넘겨 성복을 한 자는 마땅히 이 예(例)에 의거하여 날을 헤아려 상을 벗고, 그간에 기일을 만나면 별도로 제전(祭奠)을 마련하여야 비로소 자식으로서의 지극한 정을 펼 수 있는 것입니다.
[주1]예에 …… 있는데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복(復)과 설치(楔齒)와 철족(綴足)과 반(飯)과 설식(設飾)과 유당(帷堂)을 함께 한다.”라고 하였는데, 주(註)에, “설치(楔齒)는 모난 각목을 시신의 치아에 받쳐서 입이 열리게 하여 반함(飯含)할 때 닫히지 않게 한다. 또 연궤(燕几)를 써서 시신의 두 발을 묶어 곧게 하여 신을 신길 때 뒤틀리지 않게 한다.”라고 하였다.
[주2]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 개원(開元) 20년에 중서령(中書令) 소숭(蕭嵩)이 새로운 예를 지어, 매년 하늘에 제사하는 예와 땅에 제사하는 예를 정하고 고조(高祖)와 태종(太宗) 등을 배사(配祀)하는 법을 정하였다. 《舊唐書 卷21》 《新唐書 卷13》
[주3]빙시(憑尸) : 시신을 어루만지거나 붙잡고 슬퍼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임금은 신하에 대해 가슴께를 어루만지고, 부모는 자식에 대해 옷을 부여잡고, 자식은 부모에 대해 끌어안고, 며느리는 시부모에 대해 옷을 받들어 잡고, 시부모는 며느리에 대해 어루만지고, 아내는 남편에 대해 옷을 끌어당기고, 남편은 아내와 형제에 대해 옷을 부여잡는다.”라고 하였다.
[주4]천시(遷尸) : 시신을 옮겨 놓는다는 뜻이다. 초상에 시신을 옮기는 일이 여러 번 있는데, 여기에서의 천시는 소렴(小斂)을 마치고 나서 대렴(大斂) 전에 습상(襲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시신을 옮겨 놓는 것을 가리킨다. 《家禮 喪禮》
[주5]주자가 …… 듯한데 : 주자가 증무의(曾無疑)에게 답한 편지에, “보내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상기(喪期)는, 예에 부음(訃音)을 들으면 바로 성복(成服)해야 합니다. 당시에 성복이 너무 늦었으니 참으로 앞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련(祥練)하는 예는 마땅히 성복한 날부터 오늘 날짜까지 실제 날수를 계산하여 절(節)을 삼아야 합니다. 다만 그간의 기일(忌日)에는 별도로 제전(祭奠)을 차려야만 비로소 인정에 극진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60 答曾無疑》
[주6]어류(語類)에 …… 벗는다 : 《주자어류》 예육(禮六) 관혼상조(冠昏喪條)에, “부모상에 형제 중에서 먼저 기한이 찬 자는 먼저 상을 벗고, 뒤에 기한이 찬 자는 뒤에 상을 벗는다. 이는 외지에서 부음을 들은 날짜에 선후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答金幼淸問目
禮有楔齒綴足之文。而家禮不採入。金沙溪補入於喪禮備要。蓋綴足恐其辟戾也。斯固不可已。而楔齒有難行者。楔齒飯含之後。終不得合。則反有所未安。未知如何。
於古禮雖有楔齒綴足之文。家禮旣不採入。則不用似無妨。
陳襲衣條。有所謂勒帛裹肚。沙溪稱裹肚爲裹腹。勒帛爲束脛至膝。芝山家禮考證引丘氏說。以帛裹尸腹也。仍引東坡詩曰。紅線勒帛光繞脅。旣云繞脅。則束脛至膝之稱。何所見也。
勒帛裹肚之制。沙溪說似爲得之。曹說恐不分曉。
小斂章括髮免髽條。括髮謂麻繩撮髻。又以布爲頭也。按被髮出於開元禮。而古禮有括髮之文。髮旣不被。則從何而括婦人之髽。卽去笄纚而露其髻云云。喪初。男女哭擗。被髮徒跣。何待小斂而後始去纚也。芝山引丘瓊山語云。男子著免時。婦人亦著布髽。至成服云云。國俗。婦人環髻而不韜髮。則髽麻之節。無所施之。未知如何。
按儀禮喪服圖式。括髮者。用麻繩自項而前。交於額上。却繞髻。初不待被髮而後用之也。今人不識其制。謂被髮之人。小斂後。以麻繩束髮於項後。謂之括髮。其誤甚矣。髽是婦人撮髻之飾。其制與男子括髮略同。蓋中國婦人。亦束髮爲髻故也。纚或繒或布。所以斂髮之具。小斂而去纚。古人無被髮之事故然耶。國俗。婦人無束髮爲髻之制。髽無所施之說誠然。但當隨俗爲之。雖其無模樣之甚。然旣不可臨時猝變。亦無如之何矣。
小斂後袒括髮免髽。乃家禮本文。而沙溪又補入襲絰一節。因引士喪禮曰。旣憑尸。主人袒免括髮絞帶。衆主人布帶。齊衰以上之親。 旣遷尸。有襲絰之節。又引楊氏說曰。襲絰之絰。腰絰首絰之總稱。然則小斂後。憑尸哭擗。袒免括髮絞帶。遷尸後。並著首絰腰絰之禮。皆可行之否。第嫌於不冠而旣免矣。又括髮而頭矣。又加絰於其上。不是文煩否。且襲絰是古禮。則家禮小斂章。不少槩見何哉。小斂後襲絰拜賓之節。旣是古禮。且有丘氏說。而當蒼黃罔極之際。無已大煩而易乎。成服後相弔如儀。未見有拜賓之文。今人多拜之。大小祥。來見之人必拜之。此雖俗禮。行之亦不妨否。
按喪服圖式。旣小斂。括髮袒。襲絰于序東。絞帶反位。凡言襲者。襲前所袒之衣。絰者加絰於括髮之上也。小斂後。憑尸哭擗。括髮袒絞帶。遷尸後。有著腰絰散垂之文。雖家禮所不言。朱子嘗稱書儀爲疏略。好禮之家。遵用古禮。何不可之有。初喪拜賓之節。誠若喪易而文。成服後拜賓及大小祥後拜賓之儀。是無於禮者之禮。行之恐無妨。
未葬遇俗節。依禮設祭。如祠堂之禮乎。愚意以爲令節茶薦是吉祭。而葬前無吉祭。家有重喪。祠堂亦廢正至朔望之參。雖廢之可也。未知如何。
葬前每事象平時。如遇俗節。用時物酌酒陳薦。亦何妨。
卒哭後。哀至不哭。猶存朝夕哭。朝夕哭者。是上食哭耶。晨昏省拜。又不可嘿嘿參拜而已。未知如何。
朝夕哭。謂晨昏哭。非謂上食時哭也。古人以日出日入之時。尤增哀慕。故以晨昏爲重也。雖然。今人以上食爲重。亦何可廢也。
至葬後虞祔時。方有沐浴櫛之文。固欲收斂齊整。而無韜髮之文何也。嘗見一二京宰有著布網巾斂髮者。蓋布巾無異於頭巾。而斂髮可以齊潔。未知當否何如。
旣葬而虞。沐浴澡潔。親自奠獻。則斂髮以布巾。使之齊整。無所不可。然從俗著頭巾行事。似亦無妨。
癘疫之喪。追後成服。則自初喪至成服。動踰三四朔。而除喪之時。每以忌日爲準。竊嘗怪之。及遭變故。始考朱子答曾無疑書。似當於成服日設祭除之。始盡人情。未知如何。
非但曾無疑問答爲可據。以語類所記先滿者先除後滿者後除之義推之。計日爲節。更無可疑。不幸過時而成服者。亦當依此例。計日以除。其間忌日則別設祭奠。乃可以伸人子之至情耳。
김유청의 문목에 답함 기묘년(1699, 숙종25)
부제(祔祭)라는 것은 그 조상에게 천묘(遷廟)한다고 고하고, 새로 죽은 이에게 입묘(入廟)한다고 고하는 것입니다.……적손(嫡孫)이 사당에 들어가게 된 경우에는 진실로 그 조상에게 천묘한다고 고하고……만약 방지(旁支)로서 사당에 들어갈 수 없는 자까지도 종가(宗家)에서 제사를 지내고 장차 옮기고 장차 들어간다고 고하는 것은 형식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부제는 장차 옮긴다는 것과 장차 들어간다는 것을 고할 뿐만 아니라 새로 죽은 이로 하여금 의지할 곳이 있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손(庶孫)이라 하더라도 부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예에 사(士)는 대부(大夫)에게 부(祔)하지 않고 대부의 형제에게 부한다는 글이 있으니, 이 뜻을 미루어 보면 부제는 천묘하고 입묘하기 위해서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책에서 본 바가 없어 할 수 없이 제 생각으로 말을 하였는데 과연 예의 본뜻을 잃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계실 경우 어머니를 위하여 11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내니……일 년에 미치지 못했더라도 소상(小祥)의 예에 의거하여……조석곡(朝夕哭)은 삭망곡(朔望哭)만 합니까?……지금 만난 바가 또 예의 변절(變節)로, 성복(成服)한 날로 계산하면 기일(忌日)을 지나 한 달 뒤가 연기(練期)인데, 연상(練祥)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비록 11개월 만에 연제를 지냈더라도 조석곡은 기년(期年)으로 기준을 삼아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애시(哀侍)께서 만난 바가 이와 같으니 기일(期日)에 미치지 못하여 조석곡을 그칠 염려는 없습니다.
담복(禫服)의 의관 제도(衣冠制度)는, 《가례》에 ‘참사복두(黲紗幞頭)’라는 글은 있지만 다른 상고할 만한 것이 없고, 노선생께서도 일찍이 확정하여 말한 곳이 없습니다. 존가(尊家)에서 전날 담복을 입을 때 어떤 복색을 썼습니까?
마땅히 《가례》의 ‘참색(黲色)’이라는 글을 따라야 하겠으나 그 제도가 자세하지 않으니, 차라리 현행 제도를 따르는 것이 허물이 적겠기에 현일이 담복을 입을 때 백립(白笠)을 쓰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신상(申喪 심상(心喪)과 같음) 때에 공복(功服)이나 시마복(緦麻服)을 만났을 경우 복을 입습니까? 복을 입는다면 조석에 전(奠)을 올릴 때 신상복(申喪服)의 띠를 착용합니까, 공복이나 시마복의 띠를 착용합니까?
비록 중상(重喪) 중이라도 공복이나 시마복을 입는데, 더구나 신상에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전을 올릴 때는 신상의 복식을 써야 할 듯합니다.
여염(閭閻)에 돌림병이 있을 경우 제사를 폐합니까?
이미 시속에서 꺼리는 것이니 시속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그러나 집안 어른의 처분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의 처가 그 본생(本生) 시부모를 위해 대공복을 입는다는 것이 비록 예에 명문(明文)이 있기는 합니다만, 노선생께서 기년복을 무방하다고 하셨습니다.……이에 의거하여 행한다면 크게 해롭지는 않겠습니까?
무릇 예의 변절을 만나 정(情)과 형식을 참작하여 조절하는 것은 성대한 덕이 있는 자의 일이고, 저처럼 천루(淺陋)한 사람은, “정도를 지키고 옛것을 믿으면 허물이 적다.”라는 교훈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答金幼淸問目 己卯
祔祭者。告其祖以當遷廟。而告新死以當入廟也。止 若嫡孫當入廟者。固當告其祖以當遷。止 若旁支不當入廟者。亦爲之設祭於宗家。而告以將遷將入。不幾近於文具乎。
祔祭不但告將遷與將入。所以使新死者有所依附之意。是以雖庶孫亦祔。而禮有士不祔於大夫。祔於大夫之昆弟之文。推此義則祔祭非但爲遷廟入廟而設也。然此無書冊可撿看。不免摸索爲說。未知果不失禮意否。
父在爲母。十一月而練則。止 雖未及期。當依小祥之禮。止 朝夕哭但朔望哭耶。止 今所遭又是禮之變者。以成服計之。過忌日後一月乃練期。而其爲練祥則一也。其所以處之當如何。
雖十一月而練。其朝夕哭則似當以期爲準。然今哀所遭如此。則更無未及期日。止朝夕哭之慮矣。
禫服衣冠之制。家禮有黲紗幞頭之文。而他無所考。老先生亦無質言處。未知尊家前日服禫時。用何等服色耶。
當遵家禮黲色之文。然未詳其制。不若從時王制之爲寡過。故玄逸之服禫也。以白笠從事耳。
申喪時。遭功緦之服。則爲之服否。服則朝夕饋奠時。著申喪帶乎。著服帶乎。
雖在重喪中。猶制功緦之服。況申喪乎。但饋奠時。似當用申喪服飾耳。
閭閻間。有癘疫則廢祭否乎。
旣是俗忌。從俗似無妨。然亦在家尊處分之如何耳。
爲人後者之妻。爲本生舅姑服大功。雖禮有明文。老先生以期服爲無妨。止 依此行之。不爲大害否。
凡遇禮之變節。參酌情文而損益之。自是盛德者之事。如淺陋輩。且當遵守經信古。庶幾寡過之訓矣。
김유청(金幼淸) 수연(粹然)에 대한 제문
생각건대, 그대는 품성이 단정하고 온량하며 학문에 뜻을 둠이 정성스럽고 독실했으니, 오늘날 그런 사람을 찾아보더라도 실로 그 짝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난초가 가을이 되기 전에 시들었고 옥돌이 그릇을 이루기 전에 깨졌으니, 이것이 어찌 나로 하여금 슬퍼하고 애석해하며 날이 갈수록 더욱 못 잊게 하는 것이 아니랴. 그대는 약관의 나이에 책 상자를 지고 와서 내게 배웠는데 묻고 답하는 것이 메아리와 같았고 마음과 뜻은 서로가 미더웠다. 은미한 것까지 묻지 않는 것이 없었고 깊은 속뜻까지 탐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대를 잘 이끌어 주어 점차 학문을 닦아 나가게 하려 했으니, 도의(道義)로 권면하여 기대가 참으로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마침 내가 귀양 가게 되자 그대는 근심이 얼굴에 가득했고 귀양길 삼천 리를 함께 가지 못함을 한스러워했다. 보내온 편지엔 정의(情意)가 가득했고 아름다운 시도 여러 편이었는데, 편지로는 의문을 질정해 왔고 시로는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더러 답장을 보내기도 하였고 아직 화답하지 못한 것도 있다만, 내 오롯한 마음은 항상 그대 곁에 가 있었다.
그대에게 재앙이 닥쳐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당했을 때 나는 마침 남쪽에 이배(移配)되어 있었으므로 편지로만 그대를 위로하였다. 그대가 내게 예(禮)를 물은 것이 이것저것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내 생각을 답장에 담아 기탄없이 모두 말해 주었다. 그대가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평소 몸이 수척하였기에 항상 그것이 염려되어 슬픔을 자제하라고 옛사람의 의리로 면려했었다.
나는 지난해 늦은 봄에 사면받아 고향으로 오게 되었는데, 행장을 꾸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그대의 부음을 들었으니, 마음이 무너지는 슬픔이 밀려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다.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고 보니 몸은 병들고 초췌해졌는데, 그대 있는 곳까지는 그래도 백리 길이 넘었으므로 또 한 해를 넘기도록 술 한잔 올리지 못하였다. 멀리 옛날을 생각하니 도리를 저버린 부끄러움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에 우리 손자를 대신 시켜 제문을 봉하여 내 뜻을 부쳐 보낸다.
祭金幼淸 粹然 文
惟君稟性端良。向學誠篤。求之今世。實難其儔。芳蘭不待秋而萎。良玉未成器而缺。此豈不使余悼歎傷惜。愈久而不忘也耶。君始勝冠。負笈來托。問答如響。情志交孚。無微不咨。無隱不討。謂當誘掖。漸就磨礱。道義相規。期待不淺。屬余竄逐。君有色憂。嶺路三千。恨未裹足。尺素盈匊。瓊琚聯篇。書以質疑。詩以慰勉。或致反復。或未及酬。一念憧憧。常在君側。子罹凶禍。母憂是丁。我適南遷。書疏致慰。君辱諮訪。不一其端。告之話言。不憚偲切。君雖少壯。素患淸羸。載念載虞。勉以古義。去歲春暮。蒙霈還鄕。束裝在途。遽聞君訃。心摧腸結。悲不自勝。漂泊歸來。疾病衰悴。彼此相去。猶百里餘。亦旣踰年。一奠莫致。永念疇昔。愧負何言。茲替兒孫。緘辭寓意。
'따뜻한 만남 1 > 조상사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선조 시사 향례일 안내 (0) | 2013.11.02 |
|---|---|
| 감사한 마음 추석 명절 풍경 (0) | 2013.09.19 |
| 운구서원(雲衢書院) 배향 인물 - 茅隱 조상 (0) | 2013.07.15 |
| 우산(于山) 이훈호(李熏浩) (0) | 2013.06.07 |
| 매당(梅堂) 이수안(李壽安) (0) | 2013.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