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시조(始祖) 유허(遺墟) 표암(瓢巖)선생 비문(碑文)

황와 2024. 6. 8. 22:52

   始祖 遺墟 瓢巖先生 碑文

    시조 유허 표암선생 비문

 

삼가 살피건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옛 족보에는 시조께서 처음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밑에 내리셨다. 일컬었으니 이는 사람의 강생(降生)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태악에서 신이 내려 큰 사람을 낳아 퍼진다.”라 했으니 소자첨(蘇子瞻)2)의 출생도 또한 큰 뫼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것이라면 예로부터 전해진 말이 공연한 거짓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영(精英)의 엉킨 기운으로 어진 사람을 낳은 것은 이치이다.

동경지(東京誌)에 실려있는 육부대인(六部大人)이 하늘로부터 내렸다는 것,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단목(檀木) 밑에서 내려 단군(檀君)이 되셨다는 것, 나정(蘿井)서 알을 쪼개므로 하여금 신라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는 전설이 나라에 퍼져있는 것도 실로 믿어지기가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여기 표암(밝바위)은 급량대인(及梁大人)이 남긴 고장이며, 우리 이씨(李氏)의 근본을 이룬 터전인 것이다. 시조이래 쌓아올린 어진 덕을 복 받아 번진 자손은 신라 고려에 걸쳐 높은 벼슬과 큰 학자를 냈고, 조선조에 들어 줄기가 여러 갈림으로 퍼져간 후손들의 혁혁한 인걸(人傑)의 배출로서 20년 동안 그 미덕(美德)을 빛내어 이 나라의 이름난 씨족(氏族)이 되었음은 오직 급량공(及樑公)의 거룩한 은덕이 덮힌 것이다.

! 금오산(金鰲山) 골짜기 어딜까? 여기는 시조께서 계시던 곳인데

아득한 연대의 전래를 고증한 기록이 없어졌으므로 지금에 후손들의

추모될 대상은 다만 저 표암(瓢巖)이 있을 뿐이다.

지난 정미년(정조 11)에 영천군수 이집성(李集星)3)이 바위에 새겨 그 남긴 자취를 표식했던 바 다시 경주 여러 자손들의 성력으로 돌을 세우고

요신(堯臣)이 나를 찾아와 그 기문을 청할 새 생각컨대 이는 사람마다 의견이 있을 수 있으니 그 근본을 이행한 것이 하나의 도리이므로 비를 세운 뒤에 아이들의 훼손을 없애고 길이 수호되는 것은 경주에 있는 여러 겨레들의 책임이 아닐까?

그 보존을 돕기 위해 이 글을 적는 바이다.

 

          후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원임(原任) 좌의정(左議政) 오은군(鰲恩君) 경일(敬一)1)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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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경일(李敬一) : 호는 청헌(聽軒), 문충공 이항복의 6대손으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고 시호(諡號)는 효정(孝定)이다.

2) 소자첨(蘇子瞻) : 이름은 식() 호는 동파(東坡) 중국 남송시대  대문호 당송필대가이다.

3) 이집성(李集星) : 호는 파서(琶西) 서예에 능했고 순조때 문신으로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원문]

 

  瓢巖先生 碑文

 

新羅佐命功臣及梁部大人李公諱謁平遺墟碑謹按慶州李氏舊譜曰始祖諱謁平初降于 辰韓之瓢巖峰下初降云者降生之謂歟詩曰維巖降神生甫及申蘇子瞻以爲申呂者嶽古今所傳不可誣也 蓋崧高靈淑之氣鍾精毓英篤生哲人理之所必然者而獨東京誌所載六部大人皆從天而降云者異焉 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而爲檀君與蘿井剖卵遂爲佐命功臣等說自古沿襲以齊東之言疑信固難定惟此瓢巖一區之爲及梁大人之遺墟而爲我李根本之地則明矣 自始祖以來積德累仁慶流雲仍羅麗之間簪組蟬聯名碩相望逮于 我朝枝達派分子孫千億迺公迺卿世濟厥美二千年之間赫舃爲吾東望族者惟及梁公之餘蔭是庇是庥耳金鰲之麓何處是我始祖衣屨之歲而年代渺茫文獻無徵遂失基傅在今後孫之追遠而想慕者獨瓢巖在 耳歲丁未後孫集星之守永陽也 鐫刻于巖上標識之慶之諸孫以爲此不足表揚遺蹟迺伐石爲穹碑將樹於巖下宗人堯臣甫來徵記文於敬一余以爲此事不謨於衆似有甲乙之論而基爲不忘本則亦或一義旣樹之後永世衛護无俾童敲而角勵則顧非在慶諸人之責乎遂爲之書

                              後孫 大匡輔國崇祿大夫 原任 左議政 鰲恩君 敬一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