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15 (음 4.8) 부처님오신날은 내 아버지 가신날 산소 청소하고 성묘했다./264 코스 : 차 운행, 마산-남해고속도-진성IC-월아산 질매재 생양부모님 산소 수동 벌초-성묘-성득찬 집-진성IC-마산 거리 작업시간 : 2,423보, 2.0km, 혼자 낫으로 벌초작업 특색 : 부처님 오신날은 내 생아버지 가신 닐 제사대신 성묘하러 갔다. 달음산 질매재 밝은 오월의 신록 녹음 우거지고 뻐꾸기 멀리서 바람타고 숲 아래서 울고 부모 잃은 난 퍼질고 앉아 부모님 등에 기대 앉아 낫질 벌초 힘에 부쳐 쉬다가 하고 하다가 쉬고 멍하니 응석부렸다. 아마 이런 벌초는 난생 처음이다. |
내 나이 겨우 5살
1950년 6월25일 북한인민군 남침
두 달도 되기전에 북한군 선발대
제2번 국도 신작로 삼거리 앞
여시미 모팅이 대밭집 우리 사랑방에
느닷없이 총들고 군인들 밥 지어 내란다.
그때 양모 혼자 청상과부되어 집안 살림을 맡고 있었다.
증산어른 시아버지는 식자선비로 훈장을 하며
집안 아이들 사랑 열어 가르쳤고
증산댁 시어머니 창녕성씨 덕성스런 어른으로
아이들 키우고 집안 거두는 따뜻한 가난한 양반이었다.
그러니 사랑방에선 항상 글 읽는 소리 그치지 않았고
그 소리 듣고 어린 나도 천자문 동몽선습을 외우곤했었다.
그런데 어쩌랴 죽지않기 위해 밥을 해 주어야 했고
우리 먹을 식량도 그들 밥 짓는데 보태야했었다.
내 어린 기억에 어디서 가져왔는지
당시 그렇게 나올 시기가 아닌데
두 가마니 오이 가지 호박 반찬재료를
집 안마당에 쏟아 놓는 것이 아닌가!
저녁을 해서 집안에서 밥을 먹게 하고
그날 저녁 깜깜한 밤에
나이가 많다고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기고
우리집 여자들(어머니 동서, 고모, 누이)과 우리 아이들만
피난길 우리는 고모와 누이 등에 엎히서 가고
양엄마 생엄마는 피난용구(솥 밥그릇 숫갈, 들통, 홑이불, 옷등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어디에도 오라는 사람이 없어도 연비가를 찾아 떠나야 하니
미끄러운 밤 논두렁길 타다가 빠지고
나무내강 다리걷고 건너다 흠뻑 빠지고
그리하여 겨우 자정께 도착한 곳이
사봉 등건부락 큰나무 밑 비까지 뿌리니
나무밑에 엉겨붙어 지내고
집집마다 잘 곳이 없어 외양간 거름간에서 비를 피하고
며칠간 버티다가 밤이 되면 비행기에서 불을 쏟으며
기총소사를 피해 숨어야했다.
거기서 다시 지소를 거쳐 마진으로 갔다가
다시 큰집의 자골할배댁으로 금산면으로 가고
인민군 소식만듣고 그들이 오지 않는 골짜기로 숨어다녔다.
항상 밤에 다니다 보니 홑옷에 겨우 살아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한편 집에 계신 할배 할매는 그들의 음식해주며 견뎌냈으나
첫째 양아버지는 지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노무자로 취업했다가
전쟁준비 발악하던 일본에서 산업재해로 현장에서 사망하셨으니
1936년 독일이 올림픽을 개최하여 군국주의를 드높이던 그때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로 마라톤 우승했던 그해 화장하여 잿상자로
하아버지와 양어머니가 함께 가서 안고 돌아왔고
이어서 둘째 세째 아들은 15살까지 10살까지 잘 자라다가
질병으로 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집안이 온통 어쩔수 없이 어수선한 때였다.
이때 네째 내 아버지는 젊은 장부로 선망의 대상자로 이름 났었는데
전쟁으로 인민군에 차출되어 장부 굳센 체력으로 군보급품을 운반하는
당시 미군과 인민군이 방어산을 방어선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때 저녁에 탄약을 한짐지고 방어산 전선으로 오르던중
어깨가 아파서 쉬어 가자고 하다가 주의가 허술한 틈을 타서
도망쳐 집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 생물학전으로 전장에 미군과 인민군이 콜레라균을 살포하였기에
바로 아버지가 거기에 감염되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들을 위해 간호하였으나
최고 전염병이라 결국 다음해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 돌아가심에
전염병이라 낭모지 주릉선에 가매장하여
약 한달간 육탈하고 장례는 거적대기에 뼈를 골라 둥글게 말아 싸서
상여도 없이 지게에 지고 난 어린 상주로 저멀리 따라가다가
위험하다고 태기태 도랑둑에서 이별하고 돌아와야만 했었다.
그 묘지가 그간 이장하여 여기 당시 도로도 없는 고갯길 아래에
아무도 모르게 이장하였기에 여기에 있다.
또 할아버지는 아들이 죽자 20일 후에 콜레라에 감염되어
음력 5월초하루에 돌아가시니 마찬가지로 여시니 모롱이에 가매장하여
아침저녁으로 숙부님과 함께 큰손자로 상주가 되어 방문하니
특히 새벽 안개낀 가매장터에 오면 귀신나온다고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리고 육탈후 뼈만 추려 입관하고
발인 전일 '대 으른다'고 안마당에서 상두군들 상여놀이를 하는데
종구쟁이 슬픈 앞소리에 상주들 눈물 온통 다 쏟아냈다.
그때 난 애기라 얼마나 세근 없었던지
"우리 할배 죽었다 떡 얻어 먹으러 오라"고 했다더라.
장례는 그때 장례행렬이 약 200여미터 이름있는 선비로
종중은 물론 마을 어른들과 사람들이 구경하느라 슬퍼했었다.
그 이름있는 선비가 증산어른댁이 갑자기 사그러 들때
3년상 삭망제 그대로 지켜내느라 사랑방에 빈소가 늘 설치되어 있었다.
그후 막내 숙부는 굼실 전주최씨와 혼인하였고
그후 군대로 입대하게 되니 1953년 마지막 전쟁 참전으로
남북휴전협정때 겨우 제대하게 되었기에
그간 집안에는 할머니가 호주로 덕성스럽게 이어갔고
양어머니는 집안경제를 책임있게 선조봉제사와
할아버지로 알려진 외부 손님들이 사랑에 들면
접빈객에 정성을 다해 범백있는 집안이란걸 이끌었고
여자 밖에 없어서 머슴을 둘이나 이끌면서
집안을 이끄는 역할을 다해 주셨다.
그런데 그 중간에 병춘 누이 구만의 함안이씨로 시집보냈으나
3년만에 외손자 키우다가 분만후유증으로 죽고 아이도 갔다.
그때 얼마나 울어댔는지 마루에 앉아 바닥을 치며 울어댔다.
그래서 내가 큰아버지 앞으로 양자갔으니 양모 굼실댁이나
생엄마 다못골댁도 할아버지가 학자 집안 훈장끼리 만나
굼실에서 셋이 교유하며 서로 "우리 사돈함세"하고선
아들 딸 서로 선도 보지도 않고 아버지끼리 정혼되었으니
양어머니는 진양정씨 청맹과니 우곡선생의 후인
정호주의 네째딸로 당시 지수공립초에 다니던 양아버지와
아버지 14살, 어머니 16살로 혼인하셔서
학교인 지수 승산을 30리길 갔다가
돌아올 때는 처갓집인 굼실로 가서 신행전 처가에서 자고오곤 했엇다
생어머니는 단목 진양하씨 하경좌 학자 훈장의 세째 딸로서
당시 단목에 살지 않고 외가인 굼실 너머 방촌에 기거하며
집안과 동네 자제들을 가르치던 가난한 훈장이셨고
그때 장부로 이름난 팔대장 아버지와 키가 큰 다못골댁 어머니로
슬하에 누나 2살 많고 내가 다음 동생은 여년생으로 태어나니
그리고 네째가 있었는데 3살쯤에 애장이 되었단다.
그래서 진외가 씰미 가는 돌탑길에는 귀신나온다고 무서워했었다.
아버지 26에 전염병으로 가시고
어머니는 혼자 집안의 머슴처럼 농삿일 부역일 다 하고
베짜기 빨래 음식, 그리고 특기는 농요 앞소리쟁이로
농사일에는 모심기할 때마다 서로 불리러 갔고
월아산 골짜기 못을 막을 때는 제방을 만들때 흙과 자갈을 다져넣을 때
망깨 놀이 앞소리쟁이로 언제나 우리 집 부역을 전담했었다.
그렇게 씩씩했덩 그 엄마도 나를 낳은지 10개월 여년생으로 동생을 낳았으니
젖을 먹일 수 없어서 난 큰엄마 손으로 길러지게 되었고
지반장손으로 대를 잇는 사손노릇을 맡게 되었고
아기를 엎고 동네에 나가서 우리아들 젖동냥왔다면
퉁퉁 불은 젖응 내가 먼저 받아 먹었다고 했다.
밤이면 뜨물 암죽으로 젖배를 곯았지만 정성으로 먹여 키웠기에
동네에서는 굼실댁아들이라고 소문났었다.
나를 낳은 어머니 생물반찬 마련하려고
깊은 물속에서 조개 대칭이 잡다가 물속에서 나오지 못했으니
내가 중학교 일학년적 교무실에서 부른다기에
갔더니 "너는 얼른 집으로 가봐라"라고 이유도 모르고
기차를 타고 혼자 역에서 집까지 3KM 혼자 터덜터덜 내려왔는데
이웃집 승산할배가 한길가 밭을 훌챙이질하다가 하는 말
"너거 엄마 죽었다. 공굴 밑에 가봐라"
눈이깜깜 눈물흘리며 애기쏘옆 공굴아래에
온집안 사람이 모여 내가 온 후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래서 집에 빈소도 마련하지 못하고
36년 생애를 외갓집 딸중에서 맨 먼저 가셨다.
그 엄마 섶지서 산기슭에 작은 무덤으로 묻혔다.
또 상주가 되니 동생이 주상주고 난 백부앞으로 양자갔다고
백관이 되어 숙부님 지도 받으며 상주가 되었다.
장례후 얼마되지 않아 영혼을 보내는 용왕굿을 하는데
난 그때 허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나무내강가에서 달아나 엄마 묘에 가서
밤새워 몇번이나 절했는지 아이가 없어졌다고 집안이 난리났었었다.
나중에 찾으니 무덤가에 쓰러져 있었던걸 찾았었다.
그 어머니 또 사라지고나서 세월이 흘러
그 묘지가 남해고속도로 부지에 들어가게되어
묘지 보상금을 받아 이장하면서
택동 골짜기에 있던 생아버지 묘소와
배망골에 있던 양아버지 묘소
택동에 있던 양어머니 묘소도 고속도 부지에 들어가
지금의 자리 질매재 고개머당 부근에
당시 중촌동네에서 지게짐으로 금산면 넘어가는 고갯길
석호, 기호 태호 아재와 숙부님이 등짐으로 지고
동향 양지바른 국유지에 묘군을 쓰니
네 봉분 즉 양부 양모 생부 생모 묘군이 멀고먼 산골 외딴묘였다.
그러니 추석 설 벌초때마다 성묘 벌초 하다 보니
늘 어려운 곳이었으나 어느때 갑자기 갈매재에 고갯길이 생긴다기에
진성에서 금산면을 넘어가는 진주가는 지름길
옛날 진주 한들시장에 갈 때는 나무한짐 지고 가서
시장에서 팔고 그돈으로 돌아올 때는
도동배추나 대평무우를 한 짐 지고
지게다리에 간갈치 한마리 달고
다시 자골나루를 건너서 금산면 달래미고개를 넘어오는 옛길이다.
그길을 신작로가 지나게 되다니
길가에 차대고 들어가면 바로 길가
성묘와 관리에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명당이 되었다.
풍수반에서 교수와 학생이 모두 그길 지나다가
부모님 산소라고 좀 봐 달라니까
학생들과 교수 들어가 평가하더니 생어머니 자리가 명당이란다.
그때 이미 동생의 아이들이 잘 되고 있었다.
조카 창훈이는 KBS 맹인 앵커되었고
조카 지은이는 이화여자대학교 이학박사를 받아 현재 세종대 수학교수로 있다.
양어머니는 나를 기르며 오로지 그 희망만 갖고 사셨으나
내가 5학년적에 신우신장병에 걸려 몸이 부어 100여일 결석하였으나
당시 돈이 없어서 오로지 할수 있는 일이 움고모가 하는 작은 굿
그러나 약이 될만한 것은 캐러다니고
붕어 잉어가 좋다고 군북장까지 걸어가서
그걸 곰을 만들어 먹이고
들말할배에게 부탁하여 부산에 있는
영남상고 일가 이우용 한의원장까지 다녀가고
양촌할배가 함께 노력하여 겨우 졸업하게 되었는데
더 큰 정성은 8년간 기차통학하는데
집에 시계가 없으니
혹시 보름에 구름이라도 끼인 날이면
6시에 맞춰 나간길이 역에 가서 5시간이상 기다린 일이 있었다.
그때 겨울이면 신발이 차다고 부억에 신을 데워 신고가게 했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한 양육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다학 1년때 징병신체검사에서 장정왕으로 선발되어
그 상품으로 어머님에게 인조양단옷감을 한벌 상품으로 진양군수에게 받았는데
그상품 한번 옷해 입어보지도 못하고
평소 집안살림 주장으로 이끌고 고모 누이 시집보내고
숙부님 전주최씨의 이혼과 산골처녀 김해허씨 숙모와 재혼 준비해주고
내 학교다닐적 등록금이 없어서
입학때마다 고모가 에서 배내기로 가져온 큰 소를 팔아 겨우 졸업하니
공부를 게을리 할수 없어서 열심히 기찻간에서 책과싸우며
장학생으로 겨우 등록금과 학용품비를 조금 면제받게 되어 학교를 이었다.
그러다보니 누이도 동생도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닌데
나때문에 중등학교를 가지 못한것이 늘 미안하다.
양어머니 얼마나 명석했던지 일제때 여성도 동사에 모여 훈련을 할땐데
그때 소대장 여성이 되어 매달 한번씩 훈련했다고 하는데
그때 제식훈련을 지휘하고 구령을 붙여 지도력을 발휘했다ㅣ고 한다.
특히 그어머니가 친정집에 가면 올키들이 옳은 소리를 해 대는 고모에게
항상 경계를 하게 되었다고 외숙모 구만 효대댁이 말하곤 했었다.
그 어머님도 강단있고 조리있고 항상 식구를 최우선 뭉치게 하는 열정도
평소 조악한 음식때문인지
자기의 밥을 손님에게 내어 주고
물을 바가지째 마셔야했던 그 배고픔
회갑도 오기전에 아프면 약을 먹어야하는데
모두 참고 참다가 더 이상 못참아 "엄마야" 울며
대장암으로 암이 자꾸 확장되니 그 고통에 이를 악물고
그래도 돈이 없어 병원다운 병원한번 가보지 못하고
사봉약방에서 진통제나 사먹고 버티다가
결국 아들 선생되어 가면 따라가서 밥 해주며 살겠다던 말
아들이 따온 비단옷감도 옷으로 맞춰 입어보지 못하고
내가 2학년 졸업전에 돌아가셨으니
난 효를 다할 시간도 없었다.
처음에는 택동 산기슭 언덕위에 썼으나
다시 한번 재너머 골짜기로 옮기고
결국 양아버지와 함께 질매재로 이장하여
처음으로 부부 동묘지에 묻혔다.
이 이야기 처음으로 풀어내서 이야기하지만
얼마나 처절한 집안역사였는지
그 고통을 이겨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숨은 가정사
또 삼동서를 이끌며 집안을 가난속에 이끌어 간 경영과
하나도 분가하지 못한 채 함께 어울려 살며
대가족제도를 이끄어 온 이력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오늘 아버지 찾아 왔더니 온통 풀밭이다.
거기에 절만하고 오자니 내 양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손으로 큰풀 하나하나 뽑아보았지만
그것으로는 도저히 가눌 수 없어서
차안에 있는 용구 꺼내 와서 예전처럼 손으로 제초해 보자고
낫만으로 베기 시작했다.
따뜻한 초여름날 무더위에 땀은 나고
심장 협심증으로 가슴답답한데다
작년도 오른무릎 수술로 꿇어 앉거나 쪼그리고 앉을 수 없으니;
구부려 하는 낫질이 숨길이 가쁘다.
그러니 쉬 피로해진다.
풀을 베다가 쉬고 쉬다가 베고 피로도가 겹치니
그 사이클이 자꾸 빨라진다.
네분의 부모님 나를 위해 배앓아 낳아주셨고
내 아들처럼 정성을 다해 자기 몸 대신 살려내신 그 은덕
어찌 서뿔리 벌초작업 중지 할수 없다.
나중엔 퍼질고 앉아서 조금씩조금씩 옮겨가며 베었다.
말끔하게 제초기로 벤것처럼은 할 수 없어도
너무 피곤하면 더 큰일이 일어날까봐
조심조심 봉분 주변은 다 베었고 뜯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보면 어찌저리 성의 없이 했다고 욕할 것 같다.
그러나 피로도가 너무 극심하여 마지막 재배를 하고 나왔다.
푸른 잔디밭이 드러나니 표석이 새까맣게 섰다.
이 표석을 모두 세운 날이 1997년에 이장을 완료후에 세웠다.
당시 이 표석도 지게로 져다 날랐기에 고생했었다.
내가 할 일 처음으로 혼자 해보니 정말 혼자하기 어렵다.
지금껏 동생이 아픈 몸으로 혼자해 왔기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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