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뜰 소식/만사참례기

외숙부 장례와 왕고모 성묘, 증외가 방문

황와 2020. 2. 19. 22:59

20.2.19 진주 미천면 반지리 장례 참석-지석리 왕고모 성묘-단목 진양하씨 세덕사 유적답사, 

            관동 외가 점심,-진성  진동 김형보(증외가) 김령김씨족보 촬영/264.



꿈속에서 외숙부가 날 부른다.

말은 꼭 씨를 만들어 피운다.

내가 가야지 당연히

혼자 자동차 몰고 남해고속도로 달렸다.

이미 발인제 지내고

진주화장장 불속에서 육신 모두 타고

이제 유(有)가 무(無)로 되어 재촉해 댄다.

그건 찬란한 현수막 깃발이 된다.

그러나 한 세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후손들이 강제로 한 등급 상승하는

슬픔일까? 축복일까?

어느새 나도 그 끝으로 달려나온 것 같다.

어머니 세대도 이모 둘만 남았다.


    


관동 집으로 둘러서

단목 동리 세덕사(世德祠) 앞에서 노제(路祭) 지내고

미천면 반지리 17번지 장지 선산에 올라가서

망자가 이미 조성해 둔 가족묘지 평장으로 조성해 두었고

그 속에 마지막 줄 끝에 두 달전 돌아가신 

외숙모 곁에 나란히 누워 잠드셨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일생 침묵에 묻혔다.

마지막 이별 잔 올렸다. 

따뜻한 봄날 생의 잔치는 마감되었다.

모든 이에게 이제 맘속에 부모님 묻었다고 전했다.

수고한 분들께 감사드리고 내려왔다.


    

    


다시 지석마을로 들어가 

동곡댁 우리 왕고모님 뵈려 들렀다.

우리 할배의 바로 아랫동생 

진양하씨 양반동네로 시집 와서

아무 자식도 하나 놓지 못하고 

외롭게 착하게 사시다가 

우리들 친정 손자들 들릴때면 

꼭 껴안아 맞아주시고 

땅콩 볶고 홍시 까 주시며 

즐거워 했던 그 모습 눈에 선하다.

종가를 잇느라 도산댁 아들을 양자를 정하여 안심했건만  

늙은 양모에게 부리는 못된 행패로

친정인 내 숙부님이 나서서 파양하고

종동서 행정댁 둘째 아홉살 코흘리개를 다시 양자 세워

양육하다가 돌아가셔서 지석마을 뒷산에 묻히셨다. 

외로운 그 삶 더욱 외로운 듯

산속 소나무 숲에 묻혀

바위돌과 친구하여 놀고 계시네 

묘 주변에 널린 바윗돌 그건 명당의 표적

고모할머니 묘표를 내신하여 기억되었다.

바위돌에 앉아 할머니 명복 빌었다.

친정 가족이 찾아본 것도 오래간 만이리라 

그래서 미안하고 죄송하다.


    


단목골로 들어가서 기와집 고가가 몰려있는 

진양하씨 세거지 훑었다.

대밭뒤 옛외갓집 터는 이미 없어졌고 

올라가는 골목길마져 끊어져버렸다.

마을 안길로 들어가니 기왓집 대문 모두 잠겨지고 

안쪽을 볼수 없으니 겉만 훑고 지난다.

옛행정댁 집 2층양옥 신발이 비었고

세덕사터가 옛 고모할머니 동곡댁 집터라 

그속에 묻혀 버렸으니 애닯다.

세덕사 진양하씨 시조 고려장수 하공진을 모신 사당이다.

용이 타고 오르는 묘정비가 우람하게 물속 거북대 위에 섰다.

돌계단 공원을 올라가서

맨 위에 세덕사(世德祠)와 동사, 서사와 내삼문인 사경문(思敬門) 

진양하씨 시조공과 두 분 상선조를 모셔 두었고

사당 계단 아래에는 7칸 대 회당 염수당(念修堂)이 있고 

그 아래에는 경모재(景慕齋), 선장각(璿章閣) 현판이 붙어 있더라.

이 모든 경비를 하경완(河京完)이란

재일거류민단 단장을 한 갑부가 헌납했다고 선정비가 서 있었다.

도로곁에는 하진태(河鎭兌)의 효도정려각이 있는데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하진태 지려'라 적혀 있다.

바로 곁에는 하경완의 종택 큰돌에 세겨 졌는데

청우재(聽雨齋)라는 5칸 대 재실이 우람하다.

들여다 볼수 없어서 빢어서 넘어다 보았다.

큰 부자로서 잘난 후손이 결국 조상을 드높인다.


    


     


     


      



관동집으로 들어가서

외숙부 내외가 묻혀 살던 그집에서

노인네 내음이 배인 상주 가솔 백관들이 점심 먹고

멀리서 온 손자들 직장간다고 흩어져 가고 

외종 상주와 앉아 집안이야기 

외삼촌 생전이야기 소설 쓰듯이 내놓고  

생전 사진들, 외할머니 이모들 사진

그속에 우리 엄마만 없다.

가장 빨리 청상으로 돌아가셨기에 그렇다.

족보 꺼내서 종보가 흘러간 길  알아보고  

외증조부는 우자범자(佑範) 자는 도일(道一)

외증조모는 진주강씨, 진주정씨였고

외조부는  경자 좌자(慶佐) 자는 치서(致瑞) 호는 단암(丹菴)

외조모는 상산김씨, 개성왕씨 였고

외숙부는 일자원자(一源) 자는 태선(泰善), 호는 은암(隱岩)

외숙모는 진양정씨 휘 기순(己順)

어머니 자매들로서

첫째 큰골이모는 보연(寶連) (이모부 李壽浩)

둘째 마진이모는 계연(桂連) (이모부 李次龍)

세째 우리 엄마 단목골댁 연수(連水) (이버지 李升浩) 

족보엔 연숙(連淑)이라 되어 있다. 

네째는 살아계신 매끌이모 연순(連順) (이모부 鄭萬植)

다섯째는 막내 거창이모 남순(南順)(이모부 尹永默) 이시다.

새로운 역사를 익혔다.

우리들 이름들이 뒤섞여 있어서 족보 고칠 곳 일러 주었다.

기록의 역사 그것도 보사를 잘못하니 얽힌 모습이고 

이름자도 틀린 경우가 많다.

교정을 자세히 보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돌아오며 금산 금호지 옆에 있던 유치원으로 

단목 고모할머니 양아들 찾았으나 

예전 그 건물 팔려 노인 복지시설이 되었고 

그 가족은 이미 알아봐도 어딘지 모르겠다.

이제 대를 넘어가니 남이 되고 말았다.

우리 집이 그들의 와갓집인데

어디 살던지 잘 살았으면 좋겠다.

오늘 고모할머니 성묘소식 전하려 했는데 .......



월아산 질매재 너머 부모님 묘소 넘어다 보고

진동 증조할머니 증외갓집 찾았다.

김령김씨 우리 증조할머니 역사 들으러

김형보(金炯甫) 아재 집을 무릎쓰고 찾아들었다.

외출했다가 호출로 이내 들어오셨다.

오래간만에 반가와 큰절로 인사드리고

증조할머니 소식 남은 한 조각이라도 듣고자 했다.

큰아재 고 형문(炯文)님의 서산만록(棲山漫錄) 발간 이야기로부터

자기의 할아버지께서 이름난 학자였기에 

서당을 열어 진성면 모모한 후학들을 길러 내셨다면서 

내 진외가 관동 할배도 그의 증조부 후학이었다고 전한다.

우리 아버지의 풍채와 학력도 전해 주신다.

훤칠한 키에 재주가 많았으며 자기 할배 서당 문하생이란다. 

내가 그 유전적 체격을 가진 것 같다.

옛날 증조할매는 처음에는 중촌 들터 집에 사셨다가

여시미 모팅이로 새집 지어 이사하여 사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학문도 깊으셨고

우리 집안에 학문 내림을 칭찬해 주셨는데

그건 전적으로 증조할머니 친정 증외가 덕분이라고

서로 칭찬 맞바꾸었더니 고맙다고 하신다.

옛날 결코 우리집은 못사는 집안이 아니었다고

우리집에는 손님들이 오가는 길도에 있어서

많이 왕래가 많았으며 자주 들렸다고 전한다.

증조 할머니의

할아버지는 휘 김선욱(金先旭) 호가 가남(柯南) 

할머니는 파산이씨와 파평윤씨 이셨으며

아버지는 휘 김기성(金琪聲) 호가 제담(霽潭)이셨고 

'제담만록(霽潭漫錄)'을 남기신 학자이셨단다.

어머니는  달성배씨이셨으며

3남 3녀 중 맞이로 사위 우리 할배 휘 수자영자(壽英)를

김령김씨 족보엔 이용규(李庸奎)라 잘못 적혀있다.

그 남동생 분이 용태(溶台)라고 호는 서산(棲山)

이름난 학자요 문필가요 진주 향교 유림 선비였기에 

'서산만록(棲山漫錄)'이란 한시집을 남기셨다.

그 시집에 '만자형(輓 姉兄) 이영서(李英瑞)'  7언율시가 담겨있다. 

학풍을 전해 닮은 덕에 내 핏속에 그기운이 전해졌으리라.

나라의 역사든 가정의 내력이든지 

알아가면 재미있는 탐구미가 즐겁다.

이야기 속에 결국 손님이 되어 저녁까지 대접 받고 왔으니

고마운 핏줄이 서로를 자랑하게 만든다.

아재의 배웅 속에 감사하며 왔다.

밤 고속도로가 기쁘나 집에서 기다림은 미안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