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子 이상일(李尙逸)
광해군3년(1611)~숙종4년(1678).
석계 이시명의 첫째아들로 자는 익세(翼世), 호는 정묵재(靜默齋).
인조 11년(1633)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장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32세때 단산서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우율척향소(牛栗斥享疏) 영남소수(嶺南疏首)를 올리기도 하였다.
유집으로 정묵재집 3권이 있다.
次子 이휘일(李徽逸 )
광해군11년(1619)~현종4년(1673).
석계 이시명의 둘째 아들로서 자는 익문(翼文), 호는 존재(存齋)
경당 장흥효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제자백가서를 비롯해서 근사록, 심경, 성리대전, 역학계몽, 주자서절요, 퇴계선생문집 등
이학에 관한 저서를 두루 탐독하고 그 원리를 찾는데 힘을 썼다.
특히 맹자의 수심양성(收心養成)에 뜻을 두고 구도에 전념하였으며,
상제의례의 제도와 절목을 상세히 연구하였으며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집필하던 도중 향년 54세로 타계했다.
홍범연의는 아우인 갈암 이현일에 의해 총 13책으로 완성을 보았다.
특히 경당 장흥효의 이학을 동생 갈암 이현일에게 전해줌으로써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그 외에 천문, 지리, 역법, 역학 등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예학에 밝았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명서암(冥棲庵)이란 누정을 짓고 소요자적하면서 풍류을 즐기기도 하였다.
저서로 존재선생 문집 3권이 있다.
三子 이현일(李玄逸)
인조5년(1627)~ 숙종30년(1704).
석계 이시명의 셋째아들로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10세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창 앞 네 그루의 매화나무는
달을 향해 피고 있구나,
꽃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싶으나
오랑케가 성궐을 포위한 것을>
란 시를 지어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15세때 마을 소년들을 모아 놓고 팔진도 모양을 배치한 다음
단에 올라 소년들을 마음대로 지휘하는 등 병서와 사서를 탐독하였으나
18세 때 자경잠(自警箴)을 지어 병서의 뜻을 포기하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0세때 석계 이시명의 명에 따라 초시에 합격한 바 있으며,
22세때인 인조 27년(1649)에도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정치에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고
도산서원을 비롯,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등 선유들의 유적을 두루 살피면서
석계초당에서 학문탐구에 전념하였다.
현종 8년(1667) 40세때 영남 유림을 대표하여 서인 우암 송시열의 예설을 비판하는 상소를 지었다.
현종 15년(1674) 48세때 영릉참봉에 제수 되었고,
숙종 2년(1676)에 사직서 참봉에 임명, 이듬해 장악원 주부, 이어 공조좌랑,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숙종 4년(1678) 52세때 소명을 받고 상경하여 공조정랑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다.
숙종 12년(1686)에는 홍범연의를 속성(續成)하였으며, 그뒤 성리학을 연구, 퇴계학설을 지향하고
율곡학설을 비판한 율곡사단칠정변을 이때에 논하였다.
숙종 15년(1689)에 성균관 사업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고 다시 공조참의에 특승되었으며
이어 이조참의에 전임되었으며 그뒤 예조참판 겸 성균관 제주, 원자보양관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면서 앞서의 관작을 겸직하였다.
숙종 17년(1691)에는 사육신의 복관치제를 적극 찬성하였으며
그뒤 이조참판에 이어 세자시강원 찬선에 제수 되었으며
숙종 19년(1693)에는 병조참판에 이어 의정부 우참찬을 거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숙종 20년(1694)에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자
그해 4월에 함경도 홍원으로 유배되었다가 5월에 다시 서울로 압송, 7월에 함경도 종성에 위리 안치되었다.
숙종 22년(1696)에는 주서절요, 대학혹문 등을 강론하면서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숙종25년(1699)에 남구만, 윤지선 등의 주선으로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되었으며
1701년에 방귀전리(放歸田里)(조선시대에 벼슬을 떼고 그의 시골로 내쫓는,
귀양보다 한 등(等)이 가벼운 형벌)의 명이 내렸고,
이듬해에 안동 임하 금소로 옮겼다가 금양에 소옥을 짓고 문생들에게 학문을 강론하였다.
숙종 30년(1704)에 인덕리로 이거 하였다가 금소로 돌아와 병석에 들었으며
병중에 다시 금양으로 옮겼다가 향년 78세에 타계하였다.
숙종 36년(1710)에 죄명이 풀렸으며 고종 8년(1871)에 문경의 시호를 내렸다가 환수된 바 있으나
순조 2년(1908)에 복관 복시 되었다.
선생의 학문은 퇴계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거두로 율곡학설에 반대하고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하였으며,
이 학통은 밀암 이재→외증손인 대산 이상정 등으로 계승되었다.
저서로 수주관규록을 비롯 존주록, 신편팔진도설, 율곡사당칠정서변 등과 갈암선생문집 등이 있다.
四子 이숭일(李嵩逸)
인조9년(1631)~숙종24년(1698).
석계선생의 넷째아들인 선생은 휘는 숭일(嵩逸), 자는 응중(應中), 호는 항재(恒齎)로 영해 인량리 출신.
이숭일은 공명에 뜻을 두지 않고 어린시절부터 존재, 갈암 두 형과 학문을 연마하고, 경사(經史)와 제자백가를 탐구했다.
특히 중용의 치성하는 과정을 터득하고 학문에 있어서
<진리는 천하의 공인데 어찌 사심이 개입하겠는가>라는 명언을 남겼다.
또 군신의 대륜(大倫)에 있어서 포의민초(布衣民草)라 해서 국가안위에 관한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보군덕(輔君德), 급현재(急賢才), 중책임(重責任), 제민산(制民産), 수학교(修學校), 항공도(抗公道)의
6항이 급선무라 지적하였다.
보군덕(輔君德)이란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군주의 심지는 치민에 근본이 있기 때문에 군주가 덕이 없으면 치화(治化)가 어렵다고 하였으며,
급현재(急賢才)란 어진 이를 구하라는 뜻으로,
현자를 얻으면 국가가 태평하나 그렇지 않으면 백성은 재앙을 받고 종사가 위태하다고 하였으며,
중책임(重責任)이란 책임을 중히 하라는 뜻으로,
국가의 기강은 군주에게 있으니,군주가 기강을 진작하고 적재를 임용하여 득실의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하였으며,
제민산(制民産)이란 백성들의 치산(治産)으로,
분전(分田)하고 부유한 자의 낙을 금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특히 구분전을 강조하였다.
수학교(修學校)에서는 학식이 있는 자를 구해서
주, 군 향교에 교도(矯導)하는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했으며,
항공도(抗公道)에서는 군주는 사심을 버리고 박애로 생민을 성심으로 열복(悅服)케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현종 15년에 석계 이시명이 돌아가시자 석보에 돌아와서
선공의 유지에 집을 짓고 당호를 항재(恒齋)라 하고 대를 지어 낙기(樂飢)라 하였다.
이곳에서 후진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일원소장도개본(一元消長圖改本)과
율곡이씨설변론(栗谷李氏設辨論) 등 성리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숙종 15년(1689)에 능서랑의 물망에 올랐으며, 이듬해 익위사세마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였고,
이듬해(1691) 장악원 주부에 제수되었고
다시 지의령사에 임명되어 부임하여 곧 혁폐, 소잔, 안민, 선속의 시책을 실시함으로써
고을 사람들은 모두 이불자(李佛子)의 재현이라고 환영하였다.
영남안찰사였던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가 사임하고 귀향길에 태학사 권유(權愈)를 만나 말하기를
<영남 70주에 고도(古道)로써 치민(治民)한 자는 이사군(李使君) 뿐이라고 감탄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병상에서도 후학에게 강론을 계속하였으나
병이 악화되어 68세를 일기로 광록서당에서 별세했다.
五子 이정일(李靖逸)
인조13년(1635)~숙종30년(1704).
석계 이시명의 다섯째 아들이며 휘는 정일(靖逸), 자는 경희(景羲), 호는 정우재(定于齋)
어린시절부터 경학은 물론 천문, 지리와 의서를 비롯, 음악이론에 이르기까지 조예가 깊었다.
숙종 10년(1684)에 정시에 응시하였으며,
특히 시정에 대한 상소와 또 나라의 인재 선발에 있어서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 실시를 극간하였다.
숙종 30년에 69세로 별세했다.
六子 이융일(李隆逸)
인조14년(1636)~숙종24년(1698).
석계 이시명의 여섯째아들이며 휘는 융일(隆逸)이며, 자는 자약(子躍), 호는 평재(平齋) 또는 인곡(仁谷).
7세때 이미 시문을 지었으며, 석계선생은 공의 글을 보고 장자의 국량이 있다고 하였으며,
남곡 권해는 걸인(傑人)이라고 하였다.
명농치포(明農治圃)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아들 7형제의 교육에 힘을 썼다.
七子 이운일(李雲逸)
인조21년(1643)~현종13년(1672).
석계선생의 계자(季子)로 휘는 운일(雲逸)이며, 자는 자진(子眞), 호는 광록(廣麓)
문장과 시문에 뛰어났다.
갈암선생이 난제(難弟)라 할만큼 절사가장(絶詞佳章)이 많았으나 29세에 요서(夭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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