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동산공 김명윤 선생

황와 2018. 4. 24. 21:11

처음으로 도봉서원의 천망권을 받아 헌관으로 참여함에 먼저 동산 김명윤 선생의 행적을 알아보았다.  


  동산공(東山公) 김명윤(金命胤) 선생




조선 중기 창원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상산(). 자는 경찬(), 호는 동산().

아버지는 김한()이고, 어머니는 감찰을 지낸 이옥성()의 딸로서 전의이씨()이다.

임진란 장군 제7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우리 선조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 장군과 처남남매간이시다.

[활동사항]

김명윤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석산리에 살았다.

1583년(선조 16) 19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1584년 사헌부감찰에 이어 선전관이 되었으며,

1585년 훈련부정에 이어 인동부사가 되었다.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 학봉() 김성일()의 종사관이 되어 일본에 갔다가

1591년 돌아와 일본의 풍토·민요·풍속과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을 그림 그리듯이 기록하였는데,

           선조가 김명윤의 글을 보고 곧 파주목사에 제수하였다.
1592년 파주목사로 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온 힘을 다 썼다.

1594년 충주목사로 재임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성을 포위하자 이를 크게 물리쳤다.

1599년 진주목사가 되었고,

1602년-1604년 홍주목사가 된 데 이어 제주목사가 되어 임기를 마쳤다.

1605년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그 뒤 창원으로 돌아와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 『동산실기()』가 있다.

[묘소]  경상남도 마산시 회원동 삼학사 뒤편 무학산 기슭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유재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원종 1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713년(숙종 39) 지역의 유림에 의해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석산리에 도봉사()를 세우고 봉향하였다.

도봉사(道峰祠)는 1844(헌종 10) 도봉서원()이 되었고,

대원군 때인 1869년(고종 6) 훼철되었다가 1974년 복원되었다.


      [유물]


임진왜란 때 일등공신이 된 김명윤 선생의 검(劒) 2점이다.

김명윤(1564∼1609)은 임진왜란 때 파주목사로 큰 전공을 세웠다.
선조가 직접 내려준 것으로 전해지는 검(劒)으로  보통 한쪽 날만 가진 칼(刀)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이 검은 양날을 가지고 있으며, 검의 등쪽에 가지가 붙어 있다.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훼손되었고,

나무 손잡이가 없는 검은 길이 73㎝, 폭 5.2㎝이며, 다른 검은 62㎝이다.
검(劒)은 현재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도봉서원에 보관 중이었으나

지금은 진주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도봉서원(道峰書院)]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5칸의 강당, 3칸의 동재(東齋), 외문(外門) 등이 있으며,

묘우에는 김명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왔으나, 복원 후 3월 13일 한 차례만 향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