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산인면, 붉게 피는 자미화 꽃그늘의 고려동/더함안신문

황와 2018. 1. 9. 21:44

산인면, 붉게 피는 자미화(배롱나무) 꽃그늘의 고려동




산인면 모곡리에는 600 여 년 전, 고려가 망하자, 그 비운을 안고 이곳에 들어와 평생 고려인으로 살다간 모은(茅隱)이오(李午) 선생의 올 곶은 얼이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한 선비가 말을 타고 터벅터벅 정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귀공자 모습에 아주 귀한 말을 탄 그의 모습은 왕자나 아니면 그보다 더 지체 높은 고관처럼 보였다.
선비의 얼굴 모습은 그의 기품과는 달리 무언가를 떨쳐버리고 싶은 깊은 고뇌에 차 있었다.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선 기분, 깊은 바다 한 가운데 선 그런 기분이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들판의 봄 아지랑이 같이 온갖 생각이 피어올랐다.
‘고려가 한 왕조의 막을 내린 지금, 내가 과연 어느 곳에 둥지를 튼단 말인가’
선비는 자신이 가고 있는 앞쪽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자연의 법칙이야.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새로 서는 것도 자연의 순리야.’
‘아니야, 두문동에 72현의 선비가 두문불출하고 고려의 절개를 지키고 있는 것은 고려를 다시 세우자는 강한 의지를 말하는 것이야.’
선비는 말을 타고 천천히 가고 있지만 어느 한 곳을 정한 곳 없이 무작정 가는 것이다. 그러다 해가 지면 어느 불 켜진 주막으로 찾아들어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정처 없이, 또 길을 떠나는 것이다.
선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힐 겸 잠시 아름드리 정자나무 아래에 말을 멈추었다. 무엇을 포근히 안을 듯한 산세라서 선비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 참으로, 산수가 아름답구나. ”
말에서 내린 선비는 말을 몰고 천천히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앞쪽 멀리 한 곳에 눈이 머물렀다.
“아! 저 아름다운 자미화(배롱나무)가 꽃 대궐을 이루고 있구나.”
선비는 그 붉은 자미화를 보자, 정신이 차려지고 황홀해지기까지 했다. 자미화 꽃나무 아래에까지 천천히 걸어간 선비는 몰고 있던 말 고삐를 그 자미화 나무 가지에 메었다.
선비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돌아보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꽉 잡아주며 포근하게 감싸주는 산수를 본적이 없었다.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 걸까! 선비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오래토록 머무르고 싶었다.
앞 뒤 주변을 찬찬이 훑어 본 선비는 그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살폈다. 땅이 기름져서 농사짓기도 좋을 것 같았고, 개울에 물도 풍부해서 가축을 기르기에도 좋았으며, 앞 뒤 산이 높아서 적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여기에 자리 잡을 것을 생각한 선비는 그날로 즉시 사람을 그가 은거하던 응천으로 보내어 그를 따르던 하인을 비롯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 분이 바로 고려동을 최초로 일구어 낸 모은(茅隱) 이오(李午) 선생이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여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려를 그리워하며 그날로 돌아가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오 선생은 그를 찾아 모여든 사람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놓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뜨거운 말을 토해내듯 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과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은 아직 아무도 자리를 잡은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최초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
여기까지 말한 이오 선생은 숨을 크게 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결연한 의지를 담은 말을 했다.
“여러분, 지금 이 땅은 고려의 유민만 사는 곳으로 만듭시다. 비록 조선이라는 왕조가 있지만 우리기 일군 이 땅은 고려의 땅이고 우리는 고려의 유민임을 천명하노라.”
목청을 돋우어 내는 이오 선생의 당당한 말에 모두가 흥분되어 손뼉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
“맞습니다. 우리는 고려의 유민이고 이 땅은 고려의 땅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함성을 지르는 고려 유민들의 열기로 그 곳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을 분담하기 시작했다. 땅을 일구어 농사를 준비하는 사람,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집을 짓는 사람, 옷을 짜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일터에서 자기의 맡은 바 일에 열중했다.
다음날부터 이오 선생은 우선 임시로 지어진 움막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며, 위로하였다.
이 오 선생은 특히 집을 짓는 목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에게 특별히 당부할 말이 있었다. 특별히 도목(으뜸 목수)에게 신신당부 했다.
“이곳은 고려의 땅입니다. 사당, 종택 등의 건물을 지을 적에 반드시 고려의 건축 양식을 따르시오. 대문간의 모양, 창살, 문살의 모양까지도 고려양식으로 만드시오. 담장까지도.... .”
집을 짓는 일에 가장 으뜸 목수인 도목이 이오 선생의 깊은 뜻을 알아듣고 입술을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아하, 내가 고려의 개성 땅에 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하지요.”
그 작은 골짜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었다. 뚝딱 뚝딱 망치질하는 소리, 쓱싹쓱싹 나무를 베는 소리 그리고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랫소리도 들렸다. 마을길을 반듯하게 닦는 사람들도 구슬땀을 흘렸다.
마을의 모양이 하나씩 갖추어져 갔다. 웅장하고 정교하게 꾸며진 선비의 대문간은 흡사 고려의 개성 땅에 간 것 같았다.
이오 선생은 그들과 매일 함께 일하며 고려촌을 만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목수 일을 하던 젊은이가 이오 선생 앞으로 달려와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했다.
“선생님, 배가 아파서 숨이 막힐 듯합니다. 살려주십시오.”
“뭐? 배가 아파? "
젊은이는 배를 움켜 안고 마당에 뒹굴며 마악 숨이 넘어가는 신음을 하고 얼굴이 파래졌다.
“어허 이를 어쩌나?”
이오 선생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나이 많은 할머니들 중심으로 응급 처치하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잠시 후, 한 할머니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바늘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그 바늘로 신음을 하고 있는 젊은이의 엄지손가락 손톱 위 부분을 가볍게 찔렀다. 그 시술이 있자, 젊은이가 금세 거짓말 같이 아픔이 나아 숨을 ‘휴우-’ 내쉬었다.
다음날 아침나절, 이오 선생은 학식이 갖추어진 선비 몇 사람과 나이 많은 어르신들 몇 사람을 임시로 마련된 마을 회의 장소에 모았다.
“오늘 이렇게 모이게 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좋지만 예상하지 않은 일들이 구석구석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이오 선생에게 갑자기 듣는 말이라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오 선생이 그런 마을 사람들의 의중을 재빨리 관파하여 말을 구체적으로 했다.
“오늘 젊은이의 경우처럼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위험스런 일들이 어떤 일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 모인 사람들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노인이 나서며 말했다. 외모가 아주 준수하고 평소에도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참 좋은 모임입니다. 저도 이런 모임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첫째가 오늘처럼 갑자기 아픈 사람이 있으면 처리할 의원이 필요합니다. 둘째가 마을의 야생 짐승, 혹시라도 모를 외부 사람들의 침입에 대한 경비 같은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모여 앉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의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이오 선생도 감사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꼭 잘 처리하겠습니다. 또 다른 걱정되는 일이 있을까요?”
그때 젊은 아낙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일어서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마을 사람들이 먹고 마실 물을 이곳저곳에서 길러오지만 가물 때나 장마가 지면 어렵습니다. ”
이오 선생인 그 여인의 말에도 크게 공감을 표시했다.
한 젊은 선비가 일어서드니 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진정한 고려인이라면 고려의 얼을 계승할 후진 양성을 해야 합니다.”
그 말에 이오 선생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참 말 잘했네. 나도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말할려고 했는데 서당을 짓고, 학문을 연마시킬려고 하오.”
이오 선생은 그날, 회의에서 수렴된 안건들을 한 개씩 정리하여 일을 맡을 사람들을 정하고 그 일을 추진했다. 응급처치에 밝은 사람들 중심으로 의원을 구성하여 야생초 등을 이용한 치료법도 연구하게 했으며,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마을을 경비하는 일에도 치밀하게 했다.
마을 우물은 이오 선생이 직접 나서서 그 위치와 크기를 설계하여 깊게 팠다. 이후 이 우물은 복정(효성의 전설을 담은 우물)이란 전설을 낳게 된다.
마을의 집들이 하나둘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요한 생활 용품들을 만들거나 나누어 쓰는 방법도 익히게 되었으며, 간단한 의원도 마련하여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마을 높은 곳에는 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계 초소도 마련되었다. 자급자족하는 작은 왕국처럼 되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마을에 있는 서당에 앉아 글을 읽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노을이 붉게 탈 무렵, 이오 선생은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집들, 골목길, 대문의 생김새, 사당, 담장까지 흡사 개성 어느 마을에 온 것 같군.”
그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감돌았다. 고려를 다시 일으킨 것 같은 생각으로 마을의 집들 하나하나를 내려다보며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경계를 서든 젊은이가 헐레벌떡거리며
이오 선생 앞으로 달려와서 말했다.
“선생님, 큰일났습니다. 관가에서 한 포졸이 창을 들고 와서 이 마을을 조사하겠다고 합니다.”
이오 선생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당황한 기색도 없어 느긋한 마음으로 말을 했다.
“그렇지. 이리로 정중하게 모시고 오너라.”
얼마 있지 않아 그 포졸이 긴 창을 들고 당당한 걸음으로 이오 선생에게 왔다. 이 포졸은 이오 선생 앞에 서서 이오 선생의 위품을 보고 그 거만함이 한 풀 꺾이더니, 다소곳한 자세가 되어 공손하게 말했다.
“저는 고을 원님의 명을 받아 이곳을 순찰 중입니다. 마을을 돌아보아도 될까요?”
이오 선생은 아주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 포졸에게 말했다.
“그대는 조선의 관리 명령을 받고 왔지요. 이곳은 보시다시피, 고려 유민들이 일구고 가꾸는 고려의 땅이오.”
좀체 언성을 높이지 않던 이오 선생이지만 이날은 추상같은 목소리가 되었다.
“여기 한발이라도 발을 들여 놓으면 용서치 않을 것이며, 우리 고려유민들 어느 누구라도 관섭을 하지 마오.”
포졸은 당당한 이오 선생의 기품에 눌려 창끝을 내리고 뒷걸음질을 하여 천천히 물러나갔다.
포졸은 얼굴이 파래져서 고을 원님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원님, 오늘 그 마을을 순시하러 갔더니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보이는 한 선비가 준엄하게 저를 꾸짖으며 다시는 그 영역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합니다.”
“뭐이라? 못 들어오게 해. 대체 그 사람이 누구더냐? 감히 나라의 법을 어겨.”
“에, 그 분의 함자가 ‘이 오’라고 합니다.”
“뭐? 이 오?”
고을 원님이 ‘이 오’란 함자를 듣자 깜짝 놀랐다. 그는 포졸을 돌아가게 한 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이 오’ 성관과 진사에 합격한 덕망 높은 선비가 아닌가! 더구나 정몽주 선생 밑에서 학문을 배운 사람이 아닌가! ”
고을 원님은 숨을 크게 내쉬며 여태까지 그런 훌륭한 선비가 자기 마을 이웃에 와 있는 것도 몰랐던 것에 마음이 무거웠다.
“더구나 그분은 고려 공민왕의 외손이 아닌가!”
밤이 깊도록 원님은 깊은 시름에 싸였다.
다음날 저녁나절 무렵이었다.
이오 선생은 마을 청년들 몇 사람을 데리고 마을 입구로 갔다. 그곳에는 이오 선생의 친필로 된 ‘고려동학(高麗洞壑)’이란 돌기둥이 하나 있었다.
“그 기둥을 여기다 세워라. 이제부터 이 돌기둥 안으로 어떤 사람도 들여보내지 말거라.”
이오 선생은 아주 준엄한 목소리로 마을 청년들에게 말했다.
“고려 유민들도 이 돌기둥 밖으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여라.”
그때부터 어느 한 사람도 그 ‘고려동학’ 이란 돌기둥 안으로 들어온 사람도 없고, 또한 그 돌기둥 밖으로 나간 사람도 없었다.
그 후, 태종 임금이 이오 선생을 벼슬길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이오 선생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한 그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유언으로 그의 신주를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오 선생은 참으로 올 곶은 선비였으며, 그의 이슬처럼 맑은 삶이 지금도 고려동에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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