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 1067

재양서당기(載陽書堂記)

재양서당기(載陽書堂記) 생각하건대 재령이씨는 우리나라의 저명 종족으로 이름난 유학자와 큰 학문을 배출하여 충정, 절의, 효우가 역사상 책에서 끊어지지 않았고 그 시조는 신라개국 원로공신 휘 알평이고 고려초에 이르러 보조공신 문하시중 휘 우칭으로 재령군에 봉해졌으며 고토 재령으로 관향을 옮기게 되었다. 지난날 대한민국 경오(1990)년에 재령이씨 모든 후예들은 그 득관조 재령군의 경덕사를 창건하고 밀양 덕대산 아래 조음리에 온당한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어찌 받들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규모는 이미 간단하고 또 잠자는 장소가 부족하여 참제한 후손들이 재사에 불편을 많이 느끼기에 대종회 웅호 회장은 그걸 알고 성역화를 구상하고 크고 넓은 계획을 추진할 추진위원회를 친히 만들고 그 일에 전국의 후예들의 성금을 모..

사재령 재령이공 배 영인이씨 묘갈명 병서

고려 사재령 재령이공 배 영인이씨 묘갈명 병서                  (高麗 司宰令 載寧李公 配 令人李氏 墓碣銘 幷序) 구의(丘儀)의 마강비(馬江碑)에 부인 묘의 명(銘)을 재록(載錄)으니 완구이씨(宛丘李氏)가 처음이다. 이르기를 “종온(終溫)하고 숙신(淑愼)했으니 함칭여사(咸稱女師 : 모두 함께 이르기를 "여자 스승"이라) 하였단다.모년 모월 모일(某年 某月 某日)에 졸(卒)하였으며 그 아버지(父) 할아버지(祖) 결혼 출가(出嫁) 낳은 아이 수 이름 (生子某) 등은 불록(不錄)했다.무릇 고자(古者)가 묘비(墓碑)를 불수(不修)한 까닭은 현관하광(懸棺下壙)하고는 후인이 그 성명 관작(官爵)을 간략하게 기록함에 그쳤는데 이는 문질(文質: 중국 은(殷)은 질(質)을, 주(周)는 문(文)을 숭상함)을 ..

사재령공 묘표(司宰令公 墓表)

사재령공 묘표(司宰令公 墓表)  공의 휘는 일선(日善)이고 성은 이씨(李氏)이다 처음에는 월성(月城)을 본관(本貫)으로 하다가 중간에 재령(載寧)으로 쓰게 되었으니, 연유는 고려(高麗) 때 시중 벼슬을 지낸 휘 우칭(禹偁)이 채지(采地)를 하사받아 분봉되었기 때문이다. 공은 밀양 서조음촌(西召音村)의 사제(私第)에서 생장하셨는데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관직(官職)이 사재령(司宰令)에 이르렀으며 세상을 뜨자 조음산(召音山)에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생졸연월일 및 역임한 자급(資級)은 병화(兵火)를 누차 겪어 가첩(家牒)이 남아있지 안아서 자세히 알 길이 없음으로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배위는 영인으로 이씨이며 묘소는 벽암산(霹岩山) 손향(巽向)의 언덕에 모셨다. 공의 가계(家系..

재령군(載寧君) 휘(諱) 우칭(禹偁) 사적(事蹟)

재령군(載寧君) 휘(諱) 우칭(禹偁) 사적(事蹟) 재령군(載寧君) 휘 우칭(禹偁)의 관계(官階)는 보조공신(補祚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재령군(載寧君)으로 봉군(封君)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월성(月城)과 재령(載寧)으로 분관(分貫)되었다. 묘(墓)는 재령(載寧) 서산(鋤山)에 있고 경향(庚向)이다. 표암공(瓢巖公) 휘(諱) 알평(謁平)의 뒤 원대(遠代)에 휘(諱) 거명(居明)은 관직(官職은 소판(蘇判)이오, 휘(諱) 금서(金書)는 삼중공신(三重功臣) 중원태수(中原太守)로서 계림군(鷄林君) 봉군(封君)되었으며,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태조(太祖의 따님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드셔서 낳은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니 즉 이분이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 김씨(金氏)이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윤홍(潤弘)은..

경덕사 상량문

경덕사 상량문 지어보노니 사우(祠宇)는 반드시 조상의 제사함에 있고 예(禮)는 처음부터 근본을 잊지 않음이다.천고의 유음(遺蔭)이 끊어지지 않고 전지와 함께 장구할 것이며 조촐한 묘당(廟堂)을 이룩했음은 효사(孝思)의 법칙을 잊지 않음이라조음동학(召音洞壑)은 밀양의 대명지(大名地)이디. 공손히 생각해 보건대 우리나라 재령이씨(載寧李氏) 득관조(得貫祖)이신 순성보조공신(純誠補祚功臣) 시중(侍中) 부군(府君)은 표암공(瓢巖公)의 후손이요, 재령이씨(載寧李氏) 시조(始祖)이시다. 관작(官爵이 일품(一品))에 올랐으니 모습 그려 영정각(靈旌閣)에 모시니 환히 빛나고 사승(史乘)에 무궁하게 드리워 서적에 기록하였으니 빛나도다.선대(先代)는 비록 아득해졌으나 남기신 규범(規範)은 오직 자손이 지켜오고 상전벽해(桑田..

경덕사기(景德祠記)

景德祠記  고려 순성보조공신 문하시중 이공 휘(諱) 우칭(禹偁))은 본래 월성 대성(月城 大姓)에서 재령군(載寧君)으로 수봉(受封)된 까닭에 추대(推戴)되어 높이 숭상하니 월성에서 분봉(分封)된 재령이씨(載寧李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공의 선세대(先世代)에는 신라(新羅) 급량부대인(及梁部大人) 휘(諱) 알평(謁平), 소판(蘇判)이신 휘(諱) 거명(居明), 중원태수(中原太守)이신 휘(諱) 금서(金書), 사간(司諫)이신 휘(諱) 주복(周復)과 같은 명경(名卿)이 있었다.후손이 번연(繁衍)하여 온 나라 각 지방에 파(派)가 널리 분포되어서 드러난 관직과 홍유(鴻儒) 문장(文章)과 절의(節義)와 행의(行義)가 면면히 이어서 끊어지지 않고 손가락을 구부려서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배출되었다. 이제 대..

소판공(蘇判公) 휘(諱) 거명(居明) 사단(祀壇) 비문(碑文)

소판공 휘 거명 사단 비문 삼가 살피건대 공(公)의 휘(諱)는 거명(居明)이요 벼슬은 소판(蘇判)이니 소판은 신라 관제(官制에 달관(達官)으로서 진골(眞骨)이 받으며 그 진골은 곧 왕족(王族)인지라 공은 세록(世祿)의 가문(家門)으로 국사(國史)의 가승(家乘)에 실렸으며 고려발기 목은(牧隱) 이공(李公)의 익재(益齋) 선생 묘지(墓誌)에도 시조이하 소판공(蘇判公)을 원대손(遠代孫)이라 싣고 소판공으로부터 계대(系代)를 적었음이니 신라말기(新羅末期) 병화(兵火)로 인해 타버리고 흩어졌음으로 이씨(李氏)의 족보도 그때 없어진 것 같으며 경주이씨는 삼한(三韓)의 갑족(甲族)으로 중엽에 계대를 잃었으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단향축문(壇享祝文)]후손에게는 은택 흐르고백성에게는 공업(功業) 남기니..

시조(始祖) 유허(遺墟) 표암(瓢巖)선생 비문(碑文)

始祖 遺墟 瓢巖先生 碑文     시조 유허 표암선생 비문 삼가 살피건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옛 족보에는 시조께서 처음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밑에 내리셨다. 일컬었으니 이는 사람의 강생(降生)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태악에서 신이 내려 큰 사람을 낳아 퍼진다.”라 했으니 소자첨(蘇子瞻)주2)의 출생도 또한 큰 뫼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것이라면 예로부터 전해진 말이 공연한 거짓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영(精英)의 엉킨 기운으로 어진 사람을 낳은 것은 이치이다. 동경지(東京誌)에 실려있는 육부대인(六部大人)이 하늘로부터 내렸다는 것,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단목(檀木) 밑에서 내려 단군(檀君)이 되셨다는 것, 나정(蘿井)서 알을 쪼개므로 하여금 신라 좌명공신(佐..

아내의 잔소리

24.6.4 아내의 잔소리가 스님의 경읽기로 들린다./264                                                언젠가 모르게 여름 독감이 날 덮쳤다.                   콧물이 흐르더니 목구멍에 고추를 넣은 듯이 칼칼하다.                  아마 역마살 있는 내가 무리지어 다니다가 옮은 모양                   화요일 걷기  환자 조남과 악수한 게 화근인가 ?                  목요일 길사랑 걷기 시내 공원길 무리한 먼길 걷은 때문일까?                   난 곰탱이 모양 참고 견디는 버릇인데                   아내의 병원 안간다고 조르는 통에                     합성동 대로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