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가족사랑기

만당! 자네가 나보다 먼저? 미안하다.

황와 2024. 12. 9. 23:15

숙모로부터 급하게 전갈이 온다.

동생이 전화를 안받는다고 ......

어디 많이 아픈 것 아닌지 ?

깨죽 미음을 끓여 갖다주려하니 전화를 안 받는단다. 

그소리에 내가슴 울렁거린다.

어째야 하나  내가 먼전데

그러나 먼저 갈려고 하니 내가 애닯고 슬프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이미 선약이 있어서 빠져나갈 수 없다.

오후에 간다고 하고 여기 친구마중부터 나갔다. 

그러나 마음엔 동생에게로 맘이 가 있다.

무사해야 할텐데!

진주경상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잘 치료되길 기도하듯 빈다.

 

3시경 내차 끌고 올라간다.

고속도로 차선이 겹쳐보여서 외눈으로 달렸다.

 정확한 병원 이름도 모르고

거기 그쯤에 있을거라 근이만 채고

문산IC에서 내려 금곡쪽으로 가다가 

도로표지판 보고 골짜기로 드니

진주노인요양병원이  눈에 보인다.

염체 불고하고  원무과에서 물으니

501호로 올라가란다.

이미 그때는 면회시간이 지난 때라 안 될까봐 걱정했다.

바로 들어가니 동생이 누워있다.

내가 알아보니 동생도 알아본다.

얼굴 온몸이 뚱뚱 부웠다.

말은 알아듣고 말소리도 또렷하다.

그러나 코에 산소가스 마시며 숨이 가빠 허덕인다.

그 증상이 마치  돌아가신 숙부와 고모님과 같다.

마치 숨길이 단말마처럼 가쁘다. 

내 가슴이 아프다.

어쩌랴 !  아무도 이제 병을 나을수 없다고 

입원을 받을 요양병원이 없다고 할 즈음

이 병원장이 조카가 근무하는 진성골프장 출입으로

특별히 부탁해서 온 거란다.

동생을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며 안하던 스킨쉽을 한다.

어릴적 만지며 커던 느낌이 손에 익힌다.

저녁밥 대신 죽을 먹을 적 배가 고팠던지 

한숫갈씩 입에 떠서 넣는다.

한그릇의 절반 이상이나 씩씩하게 먹는다.

난 혹시 배탈 날까 봐 조심스레 말렸다.

그리고 나중에 토기를 느껴

등을 쓰다듬어 주었더니 가라 앉았다.

조금씩조금씩 기분 묻고 용기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다 없단다.

삼남매 중 누이 만날래 라고 물으니

희숙이 때문에 고생하는데 

안 만나는 것이 좋겠단다.

그러나 난 마지막으로 한번 보는것이 좋겠다고 

누이에게 집에와서 전화하니 

처음에는 만사가 귀찮다고 안 만난다더니

내일 함께 가서 보잔다.  

우리 삼형제 초등학교 다닐적 부모 다잃고 

모두 고아들처럼 숙모집에 얹혀 살다가 

난 어릴적 백부 아들이 없기에 양자 가서 주손이 되었고 

누이는 그 백모아래서 크다가

고모집 옆집에사는 김서방에게 시집가서 

현재 자형은 40대에 죽고 아들 둘 딸 둘 어렵게 키워

다 지남시키고  홀로 신기동에 외딴집 짓고 살고 있으나 

최근 막내딸이 몹쓸병에 걸려 서울병원에 나다니며 

항암치료중이라 세상비관하며 세월 한탄하고 있다. 

동생은  여년생이라 한살 아래이니

집에서 농사거들고 집안일 거들다가 

양계장 정미소일에 고생고생 일만하다가

나혼자 학비도 어려워 장자라고 나만 학교보내니

누이와 동생은 충분히 공부하면 따라갔을텐데 

나때문에 진학하지 못해 농삿군 일군으로 

눈과 귀를 뚫지못한 한이 나는 너무도 미안하다.

그러다가 23살에 해병대에 지원하여 훈련을 받고 

처음엔 김포지역에서 근무하다가

돈벌로 간다면서 월남청룡부대로 참전하여 

돌아왔으나 젊었을 때는 아무 탈 없었으나 

나이가 드니 고엽제 영향이 있어서 

60대부터 각종 후유증으로 

심장시술, 당뇨병, 담도수술, 최근 신장기능 저하로

완전 종합병원 환자가 되어 

고생하면서도 꾸준히 제 할 일인 양

신문지 3차분 먹갈아 붓글씨 써서 

서예를 연마하였고 

친구들과 어울려 질매재 비석글씨를 써서 세우고 

그 달음산고개 오르는 길가에 벗꽃 수십 주를 심어 가꾸어

최근 봄이면 벚꽃터널을 만들어 봉사하였기에 

두 차례나 진주시장의 감사장과 표창을 받았고

고향을 지키는 허리굽은 소나무가 되어

매년 우리 선조산소 벌초를 스스로 하였으니

물론 나도 거들었지만 주로 동생이 거의 다 완수했다.

그러면서 지역 친구들과의 교류는 물론 

서로 학문하는 분위를 조성하여

점포방을 서당으로 이용하여 글쓰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모든 행동을 신중하고 착실하게 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있게 행동하니 

한번씩 집에 가서 보면 신학문은 못배웠지만 

예의범절이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나쁜 말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니 

난 그를 진성 고향의 군자君子라고 생각했다.

비록 겨우 생활을 이어가는 처지였지만 

 

아내는 진성미장원을 운영하며 마을 인심을 얻고 

특히 딸 셋 아들 하나중 다 대학교육을 마치고 

아들은 세계최초 맹인 앵커로 KBS 뉴스를 소개했고 

대학원을 나와 장애인 라디오 를 지금도 운영하고 

요즘 각종 매스콤과 방송에 자주 소개되는 공인이 되었다.

둘째 딸은 수학박사로 지금 새종대학교 교수로 있는등

자식들도 바르게 잘 기른 가족이다.  

그렇게 착하게 살던 그 몸도 

근년에 당뇨와 당뇨합병증으로 시들어가다가

온갖병을 다 운동으로 몸써리치게 활동하더니

그것도 나이가 더 드니 세월앞에 병들어 

삼남매중 제일 먼저 갈 준비를 하니 안타깝다. 

오늘은 한맺힌 가슴 

율아 ! 와 네가 먼저 가려하나?

못지켜준 내가 미안하고 미안하다.

 

내일 또 오마고 하고 병원을 밀려나오며 

자초지종을 알고자 진성 삼거리 집에 들러 

지금껏 사태를 이야기 들으니 

나도 몰랐지만 몇 번이나 말문을 닫았고 

몸이 시체처럼 싸늘해 진 때도 있었고

서울대학병원서 부터 신장의 기능이 5%밖에 안남아서 

이제 피를 갈아넣어야하고 

더 이상 나아질 수 없기에 

그간 담당 주치의가 있는 제일병원과

다른 어느 병원에도 입원을 거절당하여

이제 마지막 진주노인요양병원으로 가게되었단다.  

간호에 고생했던 제수씨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하고 

어둠길 고속도로 조심조심 운전해 돌아왔다.

오늘은 내맘에  무슨 사고가 날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스스로  근신하며 돌아오니

아내는 저녁밥 먹지 않고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