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5 작성/264
[追遠齋 時祭 解說資料]
司宰令 贈宗簿寺正(휘 日善)府君 公
公의 휘는 日善, 성은 李氏로 처음에는 新羅 開國佐命功臣 瓢巖公 謁자平자를 鼻祖로 月城 本貫을 지내다가 고려초 휘 禹자偁자 始祖公이 高麗 顯宗朝에 門下侍中 補祚功臣 載寧君으로 分貫되어 載寧李氏가 되었다.
公은 密陽西쪽 召音村에서 생장하였는데 高麗朝 司宰令 벼슬을 지내시다가 돌아가시니 德大山 줄기 酉坐卯向 묘소에 장사지냈다.
公의 生卒日과 歷任 자료는 소실되어 알수 없으나 上先祖 유일하게 公의 內外分만 墓所가 남아 時祭焚香하고 있고 그 윗대 조상은 載寧君 묘소는 북한땅 黃海道 載寧 鋤山 庚坐에 있다고 하나 가 볼 수 없고 나머지 선대조는 墳墓와 記錄을 찾을 길 없다.
配位는 令人李氏이며 묘소는 초동면 霹岩山 乾坐巽向에 모시고 齋舍로 感慕齋가 있다.
公의 家系는 祖考는 휘 根자仁자 令同正이고 考는 휘 小자鳳자 고려 上將軍이며 妣는 恭愍王의 딸이시다.
아래로는 아들 6남을 두셨는데 맏은 司憲府持平 溪隱公 휘 申자로 太宗朝에 孝子旌閭를 하사받고 밀양 五賢中 首班이시며 이곳 孝子洞이 그 緣由로 名稱되었고, 次는 司正公 휘 戌자, 三은 生員公 휘 丑자, 四는 成均進士 兵曹參議 茅隱公 휘 午자는 麗末 杜門洞 72賢中 한 분으로 罔僕節義 先師로 여러 書院에 配享되어 尊崇받으며 함안 高麗洞 유적이 이름났고, 五는 處士公 휘 酉자, 六은 휘 寅자이시다.
손자로는 溪隱公의 아들 司直公 휘 義同이시고 司正公의 아들은 휘 榮中 全羅監司이시다. 生員公의 아들은 判官公 휘 永叔과 奉事公 휘 永林이시다. 茅隱公의 아들은 參判公 휘 介智이시며 處士公의 아들은 휘 丞宗이시다. (孫 總 6분)
曾孫으로는 司直公은 강(絳)과 즙(緝) 형제를, 監司公은 長孫과 군수 繼孫 형제를, 判官公은 縣監 치(緻)와 部長 경(經) 형제를, 奉事公은 萬戶 成長과 秀長 형제를, 參判公은 副提學 孟賢 仲賢과 士人 叔賢 司議 季賢 4형제를 丞宗은 興復을 두셨다.(曾孫 總 13분)
고려 司宰令 벼슬은 宮中闕內에 魚鹽과 港灣管理를 맡았던 職責을 충실히 완수하였고 특히 다른 문헌에 全羅 按廉使(觀察使 역할)를 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으나 확실한 근거를 더 찾지 못해 宗中에서 論議中에 있을 따름이다. 贈職으로 宗簿寺正을 하사 받은 바 있어 국가에 기여한 功績과 德業이 훌륭한 偉人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하 자손들은 繁盛하여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살고 있으며 顯達한 後孫들이 國家發展에 기여하고 있다.
공의 묘소아래 墓齋舍로 追遠齋를 건립하여 시제를 매년 지내왔으나 수십년 낡고 기왓장 비새는 헌 재사를 雄浩 大宗會長의 發議와추진, 臺山齋 종중의 喜捨金으로 개축 준공하여 새로이 등걸한 齋舍를 완공하여 올해로 세 번째 時祭를 지내고 있으니 얼마나 多幸인지 모른다.
晩醒 朴致馥이 쓴 令人李氏 할머니 墓碣銘에
子孫은 南方 大姓이 되었고, 後人은 背光毓德之士가 가득하니 그 根本이 令人의 賢德을 알 수 있으리라.
우뚝한 이 무덤은 子孫이 千億이 丞丞하니 陰功積德을 알만하네
樵夫 牧童할 것 없이 보는 이마다 이 碑가 징포(徵抛)임을 알수 있으리라 노래했다.
[ 재령군사적, 사재령공 묘표, 영인이씨 묘갈 참고]
司憲府 持平 溪隱(휘 申)先生 府君
순군부도만호(巡軍府都萬戶)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李公의 諱는 申자요 字는 伸之, 自號는 溪隱이시다.
司宰令公과 令人李氏 사이에 장자로 태어나 밀양 南召音村에서 世居하셨다.
공의 天稟은 剛正하고 義理에 밝았다. 어릴 적 金洞驛路에 適値한 熊山天王神을 끌어내려 요사스런 氣運을 물리쳐 백성을 訓戒하였으며, 몸가짐이 勤愼하고 言行이 篤實하여 孝悌를 실천하였고, 부모의 喪을 당하매 상양례(喪襄禮)에 동생들과 三年 거상(居喪)하여 밤에도 喪服을 벗지 않고 粥을 마시면서 정성을 다하니 鄕民이 敬服하였다. 淸溪에 齋舍를 짓고 朔望에 여러 형제가 省墓한 후에 堂中에 모여 情話 敦睦하여 同宿하였는데 이 집을 ‘소계(召溪)’라 하고, 사람들은 ‘효우당(孝友堂)’이라 하였다고 한다.
高麗 恭愍王朝에 孝廉으로 陞次하여 官職이 都萬戶, 司憲府侍史, 持平으로 昇進하였고, 金震陽 등과 어울려 趙浚, 鄭道傳, 南誾, 南在, 尹紹宗, 趙璞 등의 罪狀을 밝혀 上疏하는 隊列에 동참하였고 이어서 姜淮伯, 鄭熙 등과 더불어 연일 上疏를 올려 그들이 流配되었으나 鄭圃隱이 李芳遠에게 打殺 當하매 상황이 逆轉되어 上疏 同調者로 혹독한 拷問과 70대 棍杖으로 遠地로 流配當하여 가는 도중 卒하셨단다. 아들 휘 義同이 棺을 받들어 멀리서 밀양 本家까지 運柩하여 案山 東向之原 考의 묘 아래에 返葬하였다.
뒷날 太宗大王은 1405년에 그 孝義를 褒賞하여 特命으로 石旌閭를 하사하였으니 ‘孝子 持平 李申之閭’라고 1786년 정조 4년에는 한번 중건하였고, 현재 있는 정려비는 1990년대 한번더 중수하여 경남 문화재자료 제281호로 1999년 8월 3일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고 현재 종중에서 景德祠 境內로 이전코자 노력 중이다. 그리고 대왕은 아들 義同에게는 비순위산원(備巡衛散員)이란 벼슬을 내려주었다. 지금도 묘소 아래 동리를 ‘孝子洞’이라 일컫는다.
선생의 충효사례는 성종 17년에 편찬한 東國輿地勝覽과 密陽都護府傳記, 密陽誌, 麗末忠義列傳, 五休子文集, 茅村文集 등에서 傳記가 전하고 있으며
특히 光海君朝 五臺山史庫에 내장한 東國新續三綱行實 孝子條에 ‘이신부토(李申負土)’라는 제목으로 孝行을 版畫로 찍고 한글로 설명해서 百姓의 敎育資料로 활용하게하였다.
孝子는 百行之源이니 忠臣은 求於孝子之門이라는 교훈을 수범하신 忠孝行績을 公認한 최초의 龜鑑 사례이다.
선생은 鄭圃隱 門下에서 공부하였고 博學 孝行하며 朝廷에선 忠誠을, 鄕里에선 百世之師表라 하였으나 그 자손이 衰絶하니 香火가 끊겼다.
[溪隱先生行狀 五休子 安迅 撰] 참고
주) 撰述者 安迅은 永川人으로 관향이 廣州고 號가 五休子다. 임진왜란시 울산전투 선봉장으로 전선에서 활동하다가 전후 낙향하여 교육활동에 전념 교재서적을 찬술한 선비로 溪隱 선조를 밀양 五賢중 首班이란 글을 쓴 분이다.
'따뜻한 만남 1 > 조상사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通政大夫 副護軍 (휘 琛) 府君 公 안내 자료 (0) | 2021.10.25 |
---|---|
첨소재 시사 선현(사의공, 첨지공) 안내자료 (0) | 2021.10.25 |
추석절 차례 다정한 상봉 (0) | 2021.09.22 |
통덕랑 종중 벌초작업 완료 (0) | 2021.09.12 |
청주목사(淸州牧使) 모촌(茅村) 이공(李公) 행장(行狀) (0) | 2021.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