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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고대역사 탐방 여행 계획

황와 2020. 2. 10. 12:24

경북 고유적지 탐방 안내

 

1. 일시 : 2020.2.11 (화) 09:00-17:00

2. 코스 : 마산역 09:00-도리사(桃李寺)-(점심)-김수환 생가-조문국(召文國)-인각사(麟角寺)-마산역

3. 거리 및 시간 : 400km, 5시간 소요

 

[여행지 안내]

 

 

1. 도리사(桃李寺) 아도화상(阿道和尙)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태조산(太祖山)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아도(阿道)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여 있음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이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처음의 절터는 태조산 기슭에 있는 옛 절터로 보고 있으며, 지금의 절이 있는 곳은 금당암(金堂庵)이 있었던 곳이다.

 

창건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1677(숙종 3)의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린 뒤, 1729(영조 5) 대인(大仁)이 아미타불상을 개금(改金)하여 금당암으로 옮겨 봉안하고 금당암을 도리사로 개칭하였다. 1807(순조 7) 절을 중창하였고, 1823년 조사전(祖師殿)을 중수하였다. 1876(고종 13) 극락전을 중건하였으며, 1922년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766월 아도의 석상(石像)이 발견되었으며, 19774월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을 해체, 복원하다가 금동육각탑 형태를 띤 사리구(舍利具)와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 1과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구는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태조선원(太祖禪院삼성각(三聖閣조사전·요사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극락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 양식을 띠고 있고 높이 129, 무릎너비 92.5로서 1731·1764·1876년에 개금하였다. 조사전은 정면 3, 측면 1칸의 건물이며 창건주 아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아도화상 석상·세존사리탑·아도화상 사적비, 조선 후기의 탱화 등이 있다. 이 중 아도화상 석상은 높이 97의 입상으로서 전면 너비가 좁아 기이한 감을 주나 조각의 윤곽이 뚜렷하다. 아도화상 사적비는 총 높이 296, 비신 높이 197로 그 뒷면에 자운비(慈雲碑)가 음각되어 있으며, 사적비는 1639(인조 17), 자운비는 1655(효종 6)에 새긴 것이다.

 

특히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무색투명하고 둥근 콩알 크기의 큰 사리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사리로 평가되고 있다. , 1876년에 그린 후불탱화(後佛幀畫)를 비롯하여 1881년에 그린 신중탱화(神衆幀畫독성탱화(獨聖幀畫칠성탱화(七星幀畫) 등이 있고,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판목(板木) 24매가 보관되어 있다.

 


2. 스테파노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생가

 

1922~2009. 가톨릭 성직자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추기경.

본관은 광산(光山). 192263일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조부 김보현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 김영석, 어머니 서중하 또한 가톨릭 신자로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1941년서울 동성상업학교 졸업하고, 같은 해에 일본 조치(上智)대학에 입학했으나,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74년 서강대 명예문학박사, 1977년 미국 노틀담대 명예법학박사, 1988년 일본 조치대 명예신학박사, 1990년 고려대 명예철학박사, 1990년 미국 시튼홀대 명예법학박사, 1994년 연세대 명예신학박사, 1995년 타이완 푸젠(輔仁) 가톨릭대 명예철학박사, 1997년 필리핀 아테네오대 명예인문학박사, 1999년 서울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1년부터 1956년까지 대구대교구 안동본당, 교구장 비서, 김천본당 주임(성의중고 교장 겸임)을 맡았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독일 뮌스터대학 및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1964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이 되었다. 1966년 주교가 되었으며,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68년 대주교로 승품되면서 서울대교구장이 되었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이후 19701975(1), 19811987(2)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19701973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19751998년 평양교구장 서리, 1998년 아시아 주교회의 공동의장, 19981999년 실업극복국민운동 공동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평생을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헌신해 왔으며, 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섰다.

주요 저서로하느님은 사랑이시다,평화를 위한 기도,이 땅에 평화를,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김수환 추기경의 세상사는 이야기·,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등이 있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년 제13회 심산상과 제2회 인제인성대상, 2001년 독일 대십자공로훈장, 2002년 칠레 베르나르도오히긴스 대십자훈장 등을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2009216일 선종하였으며 그의 묘소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3. 삼한 부족국가 조문국(召文國)

 

경상북도 의성군 지역에 있었던 삼한 시대 초기 국가.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라고 하는 삼한 시대 초기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 고려 시대 의성부(義城府)였던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조문국이었다고 기록된 이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서도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읍지(邑誌)에는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라고 밝혀 놓고 있어 조문국의 중심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후 벌휴왕 때에 신라에 병합되어 조문군으로 편제되었다.

 

조문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금성면 일대의 고분군이 있다. 의성 지역 전역에 많은 고분군이 있으나, 금성면 일대의 고분들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규모가 월등히 크며 탑리리에는 봉분의 지경이 20m가 넘는 것이 16기나 되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동서 41m, 남북 30m, 높이 8m에 이르는 대형분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이 중심 고분군이라 할 수 있겠다. 기록에 나타나는 조문국의 중심지와 문헌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탑리 고분에서는 공작새 날개 모양 3개의 입식(立飾)을 가진 금동관[조문국 금동관]도 발굴되어 이곳이 의성 지역 유력 지배층들의 분묘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조문국의 중심지는 금성산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금성면 탑리리, 학미리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고려 시대 의성부(義城府)였던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조문국이었다고 기록된 이래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서도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조문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지지읍지에는 현재의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라고 밝혀 놓고 있어 그곳이 조문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4. 삼국유사 탄생지 인각사(麟角寺)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산(華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말사이다. 643(선덕여왕 12)에 의상이 창건하였다. 절의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기린이 뿔을 이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307(충렬왕 33)에 일연(一然)이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하였다. 당시 이 절은 크고 높은 본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앞에 탑, 좌측에는 회랑, 우측에는 이선당(以善堂) 등이 있었고, 본당 뒤에 무무당(無無堂)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연은 총림법회(叢林法會) 등 대규모의 불교행사를 개최하였다. 시대는 미상이나 조정의 명으로 김용검(金龍劍)이 절을 크게 중건하고 밭 100여 경()을 헌납하였다. 조선 중기까지 총림법회를 자주 열고, 승속(僧俗)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2동의 요사채 뿐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인각사보각국사탑 및 비(麟角寺普覺國師塔)가 있다. 이 탑비는 1153(의종 7)에서 1155년 사이에 사승(寺僧) 죽허(竹虛)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글자의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 그 밖에도 법당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정조탑 앞에는 높이 1.5m의 석불이 있으며, 절 앞 길가에는 만월당(滿月堂)과 청진당(淸眞堂)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