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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와(篁窩)

황와 2020. 4. 24. 23:15

집이란 그 가문의 문화의 전당이다.

그집에는 흘러내려오는 정신이 있고

변하지 않는 내력이 있고

가솔들이 지켜야 할 덕목이 있다.

그래서 조상으로 받은 말 한마디 글 한 문구

쉽게 꺾지 못하는 집안 계율이 있다.

 

선조는 자손을 너무나 사랑하고

자손은 선조를 받들어 모심이 효성이다.

보이지 않는 철심 든 동앗줄 같은 명령이

우리를 고난에서 살아나게하는 용기를 주고

어긋난 생활을 꼼짝못하게 얽어매서 훈계한다.

 

내겐 롤 모델이 되는 두 선조가 있으니

6대 조부 황재공(篁齋公) 휘 우(嵎)자 할아버지와

조부 직와공(直窩公) 휘 현자지자(鉉祉) 할아버지시다.

두 분 모두 종중 자녀들을 위해 서당을 열어 

집안 후손들에게 문명의 눈을 뜨게 하시고 

예학 연마와 시문 창달로 집안 얼을 기록하셨고

솔선수범, 근검 실천으로 숭앙 받는 선비이셨습니다.

 

6대조 할아버지께서는 우리 진주향토지에 실린 명사로

문집을 남기셨고 유림(儒林) 유월장(逾月葬)을 치르셨고

조부께서는 유림 학자 훈장(訓長)들과 교류하며

늘 손님이 끊이지 않는 행의(行儀)와 긍휼식(矜恤食)을 실천하셨습니다.

매일 안개 새벽 개똥망태 메고 나가시는 근검정신(勤儉精神)

책을 가까이하는 학문정신

난 어릴적 그 할아버지가 그리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얼과 근면 성실한 가난한 농부이지만

그 근본의 본능을 보여주신 은혜에 

나의 새로운 자호(自號)로 

양 선조의 호에서 한 자씩 받아서 

황재 할아버지의 황(대밭 篁)자와 

직와 할아버지의 와(움집 窩)자를 따서 

나의 별호로 황와(篁窩)라 칭하고 

황와(篁窩)란 사랑방을 열고

선조의 분부대로 조신하면서 바르게 살아갈까 합니다.

 

원래 내가 자라던 여시미 모팅이 집터에도

400평 대밭이 안채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사랑채 외양간, 거름간채 둘러 싸이고

돌감나무 높다랗게 까치들이 울어대고

돌틈 속에서 솟아나는 얕은 샘물 

대밭 속의 움집 같은 우리 집이었습니다.

 

사랑채는 글 읽는 소리 끊이지 않았고

밤이면 사랑방이 동네 머슴들 새끼 꼬며

글 읽는 소리 들어 스스로 깨우치게 하고

흙간채 디딜방앗간에는 마을 사람들

두 사람 발 디뎌 곡식 찧는 소리

콩닥콩닥 동네가 정다웠으며

정지방에는 연중 베짜는 소리 찰깍찰깍

어머님들 잠 허리 끊어지고

우리 아이들은 소치고 꼴 베고 나무하며

온가족 큰 소리 하나없이 화목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6.25 동란후 호열자가 집안을 쓸어버렸고

어린 내가 10살전에 상주 노릇 네 번씩이나 했으니 

삼 남매 학비 없어 나혼자만 학교 다니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은 불쌍한 가세에도

재령이씨 지조와 효애 정신은 바르게 이어졌으니

난 조상님께 감사 감사하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자호(自號)한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