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22 고향 진외가 成成柱 外叔喪 진주중앙장례예식장에 조문하다./264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때가 가장 유토피아였기에 그렇다.
어릴 적 이웃하여 오밀조밀 어울려 살던
그때가 인생의 꿈이 많았고,
그때가 평안했고
그때가 살가운 정이 있었기에 그렇다.
앞뒤 옆집에 다닥다닥 모여 살며
내 아이 너 아이 구별없이 챙겨주던
따뜻한 추억이 아이들을 장성하게 키워냈다.
부모님이나 이웃집 아재가 울타리였다.
여시미 모팅이 동네 양촌댁 둘째 아들 덕정 아재
어제 천국으로 승천하셨다는 소식이 슬프다.
"우리 문태 왔나?"
항상 금속성 맑고 다정한 목소리로
등 쓰다듬어 주시던 그 행위가 그립다.
향년 88세 가실 나이도 되셨지만
먼저 돌아가신 나의 숙부님을 형님으로 모시고
예전 군대에서 헌병상사로 근무한 경력으로
늘 절도 있고 맺고 끊음이 있는 성품
진성초등학교 총동창회를 결성하여
초대부터 연이어 10여년 이끄신
대단한 결속 단합을 강조하는 위인이셨다.
그의 어른 양촌 할배께서는
당시 종진외가 할배로서
진성초등학교 육성회장을 하셨는데
꾸중하면 무섭지만 따뜻한 할배이셨다.
내 어릴적 신우병으로 죽음을 헤맬 적에
나를 죽음에서 건져내신 은인이셨고
양촌 할매 역시 우리 엄마와 동년배로서
날 챙겨주신 따뜻한 이웃이었다.
큰 아들 승산아재(동주)는 진성면서기하며
날 경남병무청 징병검사 모범장정이 되도록 도와주셨고
첫 교사로 창녕 계창학교 부임시
교복 말고 입을 양복이 없어 걱정하던 때에
아재 양복 빌려입고 부임했던 일이 생생하다.
그 아재 딸 숙희, 숙점이,종희, 정임이, 지혜, 꼭지 6자매
그들 몰래 많이 예뻐서 업어 주며 컸다.
망자 둘째 덕정(故 성주)아재는
역시 우리집에 자주 내왕하며
숙부님과 절친하였고
예전 우리 누이 시집갈 때
구만 자형과 신랑방 친구 되어
어울린 헌병복 입은 사진
한동안 사진첩에 끼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어릴 적 추억에서 헤어짐이 슬프다.
오늘 장의실 빈소에 엎드려 슬픈 잔 올리며
정성을 다해 재배하였다.
절이 어찌 그리 천천이 하게 되었는지
그 절한 시간이 슬픔의 정도를 나타냈다.
이제 국립묘지로 갈거라면서
자녀들 하나하나 연관지어 설명했다.
덕정아지매 만나 오래간 만에 손잡고
"문태 얼마만이냐"고
"이제 아재는 편한 곳 천당에 가셨다"고 위로했다.
득찬 형제가 종형상 백관노릇 다하고 있더라.
환기 형 내외도 뵈니 반갑다.
다른 가족들 친척들 모두 고향 선후배들이라
만남이 고마운 내 울타리들 이었다.
한 분씩 또 한 분씩 곁에서 지워져간다.
그래서 인생은 슬프다.
한 두어 시간 고향에서 놀다가
해가 질 무렵 어둠 속에 떠나왔다.
노스탈쟈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고향을 떠나면 우주에 던져지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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