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
함안 고려동 유적지
절개와 지조를 목숨처럼 강조했던 옛 시절에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요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 하여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하였다.
이 말은 사람이라면 절개를 지킬 줄 알아야 훌륭한 인격자로 존중된다는 뜻이다.
학문은 배움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길 때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며 평생을 살다간 모은(矛隱) 이오(李午) 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이름 하여 고려동(高麗洞) 유적지라 불리운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강행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키자
고려의 충신들은 모두 관직을 버리고 신왕조의 녹을 먹을 수 없다하여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른 바 두문동 72현이 그들이다.
두문동에 동서로 문을 세워 걸어 잠그고는 평생을 두고 나오지 아니하였는데
여기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 후 이성계가 이들을 회유하였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자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 마침내 두문동에 불을 지른다.
불 속에서 두문동을 나온 이는 오직 한 사람이었는데 세종조의 명재상 황희가 바로 그다.
그래서 두문동 73현이 된다.
고려가 망하자 함안의 충절 모은(矛隱)도 처음엔 두문동으로 들어갔으나
만은(晩隱) 홍재(洪載), 전서(典書) 조열(趙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하였다.
이윽고 함안 땅 모곡(茅谷)에 이르러 자미화(紫薇花)가 만발한 곳을 보고는 길지로 생각하여 평생 살 곳으로 정하였다.
일명 배롱나무라 부르는 자미화는 여름철이면 백일동안 꽃을 피우므로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그 모습이 한결같은 선비의 일편단심을 상징하기에 선비들이 집안에 즐겨 심었던 나무이다.
모은은 고려동을 지으면서 먼저 둘레에 담장을 쳤다.
그리고는 약 3천평 정도 되는 고려전(高麗田)을 조성하여 여기에도 담장을 두르고는 이를 터전삼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담장 밖에서 들어오는 일체의 것은 조선왕조의 것이므로 먹지 않겠다 맹서하였다.
또한 마을 입구에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워 이곳이 고려의 영역임을 나타내었다.
이로써 천하는 조선의 땅이지만 고려동만큼은 고려의 세상이 된 것이다.
또한 모은은 아들에게도 이르기를 “너는 고려의 백성이니 조선왕조에는 어떤 벼슬도 하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자신이 죽은 뒤에는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관직명을 사용하지 말 것과
자신의 신주 또한 고려동 담장 밖으로 옮기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 실제로 모은의 아들은 일생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6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19대에 걸쳐 조상의 유지를 받들며 후손들이 고려동을 떠나지 않고 있다.
담장을 둘렀다고 해서 마을이름을 담안리라 하였는데,
지금은 한자로 바꾸어 장내(牆內)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 모은이 조성하였던 고려전은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6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모은의 정절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고려종택을 찾노라면
마을 어귀에서 맨먼저 고려교를 만난다.
입구에서 고려동학 비석을 보고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꼈다면
이곳에서 다시 보는 고려교는 마치 그 옛날의 고려왕국에 들어선 느낌으로 설레임마저 안겨준다.
주차장 오른편에는 상의문(尙義門)이 있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고려진사모은이선생경모비(高麗進士矛隱李先生景慕碑)라 새긴 비석이 우뚝 서 있고
그 옆에는 선생의 행록을 담은 검은 비석이 따로 서 있다.
묵념으로 경의를 표하고 종택으로 향하는 길에 자미고원(紫薇古園)이라 새겨놓은 자미단이 있고
그 위에 자미화가 자라고 있다. 600년 전 선생을 이곳에 자리잡게 한 바로 그 나무다.
오랜 세월로 인해 본 둥치는 없어지고 그 위에 다시 자라난 가지들이 무수히 많이 뻗어올라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종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제일먼저 만나는 건물이 계모당이다.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단정한 모습으로 올라앉아 있는 사랑채이다.
계모당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자 이곳에 기거하는 재령이씨 종부가 맞아준다.
처음엔 낯선 얼굴로 대하다가 몇 마디 인사가 오고간 다음 안으로 들어가더니 옷을 다시 갈아입고 나온다.
“여름이라 옷을 입지 않아서....” 라고 말끝을 흐리며 마루에 오르라고 권한다.
낯선 이에게도 예의를 차리려는 종부의 인품이 엿보이는 순간이다.
방문하는 관광객이 많을 것임에도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에
종갓집 며느리의 절제된 품격이 스며있다.
안채는 200년 전에 고쳐지은 것이라는데 주춧돌은 처음 고려동을 지을 당시의 것이라 한다.
종택에서 선생의 체취를 느끼면서 뒤쪽으로 돌아가니 복정(鰒井)이라 새겨놓은 우물이 하나 있다. 전복우물이란 뜻이다.
이 우물의 유래를 담은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모은 선생의 현손 이경성(李景成)공과 정부인(貞夫人) 여주이씨의 효행이 얽혀있는 유서깊은 우물이다.
이경성은 현감을 지냈으며 후에 병조참판으로 증직된 분으로 현감직을 그만 둘 때 남명 조식이 그 연유를 물은즉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이다”하므로 양지지효(養志之孝)라 하며 그 효행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부인 역시 효심이 깊어 지극정성으로 시모를 모시던 중 어느 날 전복회가 먹고 싶다 하는지라
이곳은 바다가 먼 곳으로 어찌 할 수 없어 다만 정성을 다해 천지신명께 기도를 드린 결과
이 우물에서 전복이 나와 그 회(膾)를 시모께 드렸더니 먹고 기력을 회복하였다고 하며
이 때 시모가 며느리에게 같이 먹기를 권하자 짐짓 식성에 맞지 않다며 사양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경상감사 유척기(兪拓基)가 부임기념으로 향시를 열 때 시제를
“평생불식복어회(平生不食鰒魚膾)”로 내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부인의 효행이 널리 회자되었다고 하며
이 복정은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리 큰 가뭄이 들어도 마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모은의 본관은 재령이고 본명은 오(午)이며 일선(日善)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남달리 뛰어난 기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당대 석학인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학문을 정진하여 여러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공양왕 때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포은 정몽주가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했으나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답하며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이 고려동에 들어와 살게 된 이후로 태종 이방원은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고려의 신하로서 절개를 지키던
선비들을 회유하였는데 모은에게도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올 것을 당부하며 불렀지만 끝내 마다하고 절개를 지켰다.
<본 자료는 어느 누가 고려동을 방문하고 쓴 여행기입니다.
사진은 바로 그 현장의 여름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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