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임진왜란과 이운룡 장군

황와 2013. 1. 26. 23:03

[軍史 第二號]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壬亂水軍과 李雲龍將軍

 

 

… 赫赫한 그軍聲은 오랑캐가 눈 안에 들어와 있고

 堂堂한 그義氣는 몸이 陣頭에 앞장서있네 …                             李載浩⟨釜山大 敎授⟩

 

 

  緖 言

 

우리民族의 歷史는 한 마디로 要約한다면 異民族의 侵略에 對한 抵抗의 歷史라고 할 수 있겠다.

 

古朝鮮時代 漢武帝의 侵略으로부터 三國時代 隨 ․ 唐의 侵略, 高麗時代 契丹 ․ 蒙古族의 侵略, 朝鮮時代 日本 ‧ 滿洲族의 侵略은 그 두드러진 例이다. 그 때마다 우리의 先人들은 敢然히 奮起하여 이러한 侵略勢力을 물리치고 國土를 守護하여 오늘날의 半萬年 歷史를 남겨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지나간 歷史를 回顧해보면 이러한 國難期에 活動했던 우리先人들 중에서 혹은 名聲이 歷史의 表面에 나타나 百世에 崇仰의 標的이되는 분이 있는 反面에 혹은 功績이 歷史의 裏面에 숨겨져 後人의 記憶에 잘 떠오르지 않는 분도 있으니 이것은 오로지 政治勢力의 起伏과 個人家門의 盛衰에 因由된 것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國難中에서도 저 朝鮮中期의 壬辰倭亂처럼 全 國土가 敵軍에게 짓밟히고 國民老少가 屠戮을 當하는 苛烈悽慘한 戰禍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나 이러한 未曾有의 國難인 壬亂 當時의 國難克服史를 敍述하면서도 오늘날의 歷史家들은 대부분 歷史의 表面에 나타난 몇몇 人物을 特히 亂前에 十萬養兵論을 主張한 栗谷 李珥의 先見之明과 戰爭中에 倭敵을 殲滅한 忠武公 李舜臣의 偉大한 戰功만을 大大的으로 記述하고는 그 밖의 이 國難期에 活動했던 우리先人들의 業績은 相對的으로 疎忽히 다루어져서 歷史의 뒷面에 隱晦시킨 點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筆者는 이러한 現實을 念頭에 두고서 여기에 壬亂의 開戰劈頭에 우리의 陸軍은 崩壞의 狀態를 免치 못했으나 오직 水軍만이 그戰列을 整備하여 倭敵의 凶鋒을 敢然히 粉碎制壓하고 全戰局을 頹勢에서 勝利에로 挽回시켜 國家中興의 터전을 마련하게 한, 즉 빛나는 우리 海軍戰捷史에 그 定策의 主役을 擔當했던 그 當時의 玉浦萬戶로서 後日의 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낸 息城君 李雲龍將軍의 숨겨진 功績을 세상에 알려서 過去 歷史를 再照明, 再認識하는 契機를 마련하려고하는 바이다.

 

 

1. 息城君의 活動과 戰功

 

 

朝鮮中期에 일어난 壬辰倭亂은 東亞全局의 歷史에 一大變動을 가져온 重大事件이었다. 勿論 이 戰亂은 그 當時 文恬 武嬉하여 苟安姑息만을 일삼던 우리朝野에서는 이러한 變亂이 닥쳐 올 줄은 미리 判斷하지 못했지마는 侵略者인 日本은 그張本人 豊臣秀吉이 國內의 諸般矛盾을 對外的 侵略戰爭에서 그 解決策을 求하려고 大陸侵攻計劃을 數年前부터 미리 準備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秀吉은 精鍊된 軍兵 三十餘萬의 大兵力으로 朝鮮侵攻을 敢行했던 것이다.

 

즉 宣祖二十五年(一五九二年) 四月一三日에 敵軍의 先鋒將인 小西行長이 釜山에 上陸하니 僉使 鄭撥이 率衆拒戰했으나 衆寡不敵으로 戰死하고 그 翌日에 敵軍이 東萊城을 包圍하니 府使 宋象賢은 軍民을 動員하여 決死抗戰했으나 城의 陷落과함께 運命을 같이하고 말았다. 이것이 侵略軍에게 抗戰玉碎한 우리國民의 氣魄을 보인 最初의 戰鬪이었다.

 

 

가, 決機定策의 主役

 

이와 같이 우리의 防倭 關門인 釜山 ․ 東萊를 陷落시킨 敵軍은 破竹之勢로 一路 北上하여 中路의 忠州 彈琴臺에서 서울의 防衛線을 守備하던 都巡邊使 申砬의 軍隊를 敗沒시키고는 五月二日에 國都인 서울을 占據하게 되었으니, 그 當時 우리의 國防을 擔當했던 陸軍은 文字 그대로 總崩壞의 無防備狀態를 나타내고 말았다.

 

한편, 이때 우리水軍의 防衛陣容은 慶尙左水使(本營은 現 東萊 水營)에 朴泓, 慶尙右水使(本營은 現 巨濟 加背梁)에 元均, 全羅左水使(本營은 現 麗水)에 李舜臣, 全羅右水使(本營은 現 海南 右水營)에 李億祺였던바, 敵將 九鬼嘉隆, 脇坂安治, 加蕂高明, 藤堂高虎 등의 水軍이 釜山에 接近하자, 慶尙左水使 朴泓은 敵軍의 巨大한 形勢를 보고는 곧 陣營을 버리고 逃走하였다. 敵軍이 釜山의 西南海岸을 돌아 巨濟로 向하니 慶尙右水使 元均도 形勢가 對敵할 수 없음을 알고는 戰船과 武器를 모두 海中에 沈沒시키고 軍卒 萬餘名을 흩어버리고서 南海縣의 앞바다에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陸地를 찾아 逃走하려고하였다. 이때 그麾下인 玉浦萬戶 息城君(李雲龍의 封爵)이 그主帥인 元均에게 다음과 같이 抗言하였다.

 

 "使君(元均을 指稱한 말)은 나라의 重責을 맡고 있으니, 義理上(職責上) 마땅히 境內에서 固守하다가 死節해야만할 것이오. 이 地域은 곧 全羅 ․ 忠淸道의 防禦線이니, 이地域을 잃게 되면 全羅 ․ 忠淸道를 잃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國事가 狼狽가 될 것이오, 지금 우리軍卒이 비록 疲弊할지라도 그래도 保守할 수가 있을 것이고, 全羅水軍이 健在하니 救援을 請해와서 見乃梁을 막아 끊어, 敵軍이 巨濟島를 지나서 西쪽으로 가지 못하게만 한다면 南方의 일은 成功할 수가 있을 것인데 使君은 이 일을 아니하고 어디로 가려고 하오"

 

元均은 怒하여 말하기를,

 " 그렇다면 全羅水軍을 그대가 請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公은 말하기를,

 "使君의 命令을 제가 어찌 敢히 辭避하겠습니까 마는 다만 栗浦萬戶 李英男이 全羅左水使를 平素부터 알고 있으니 심부름을 시킬만합니다."

하니, 元均이 그計策에 따라 李英男을 全羅左水營으로 보내어 이런 危急한 事態를 알렸던 것이다.

 

忠武公(李舜臣)은 이때 麾下의 여러屬鎭將佐들을 麗水 앞 바다에 모아놓고 敵軍이 오기를 기다려 싸우려고 했는데, 李英男의 말을 듣고 여러將佐들과 作戰計劃을 의논했더니, 여러將佐들은 大部分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地域을 지키기에도 오히려 不足한 형편인데 어느 여가에 다른道까지 가서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當時의 國法에는 地方의 閫帥(兵使 ․ 水使의 指稱)들이 朝廷의 命令을 받지 않고는 함부로 自己의 管轄地域을 移動 離脫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忠武公麾下의 여러將佐들이 全羅本營을 떠나 慶尙道로 가는 것을 反對하는 것도 無理는 아니다, 이 때 忠武公의 麾下인 鹿島萬戶 鄭運과 軍官 宋希立만이 慷慨한 態度로 울면서 忠武公에게 慶尙道에 나아가 敵軍을 攻擊할 것을 勸하면서,

 

 "敵을 討滅하는 데는 慶尙道와 全羅道의 區分이 있을 수 없으니 먼저 敵軍의 先鋒을 꺾어버리면 本道 全羅道를 保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고 했으며 鄭運은 奮然히 忠武公에게 要請 하기를,

 

 "지금 敵軍이 慶尙道를 陷沒시켰는 데도 우리가 앉아서 보기만 하고 救援하지 않는다면 곧 우리에게 미치게 될 것입니다. 敵軍이 우리境界에 오기前에 우리가 先手를 써서 急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친다면 士氣가 旺盛해 질 것이고 우리의 守備도 튼튼해 질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이야말로 君父가 蒙塵하고 國家가 危急한 時期이니 나는 마땅히 한 번 죽음을 각오하고서 여러분들의 先頭에 나서겠습니다."

 

하니 忠武公은 그 말을 壯하게 여겨 그의 計策에따라 麾下의 軍兵과 戰船을 集結시켜 倭敵擊滅에 出陣하였다. 彦陽縣監 魚泳潭은 自請하여 水路嚮導의 일을 맡아 忠武公 麾下의 全艦隊는 곧 麗水의 本營을 떠나 慶尙右水營이 있는 巨濟로 向發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이 當時의 情勢를 回想 分析해 본다면 元均 麾下의 李雲龍(息城君)과 忠武公 麾下의 鄭運 같은 분이 巨大한 敵勢 앞에 不退轉의 勇氣로써 그들의 主帥를 激動시키지 않았더라면, 兩軍合勢의 協同作戰이 이처럼 迅速히 推進되지는 못했을 것이며, 特히 息城君의 이러한 決機 定策이 없었더라면 忠武公의 滅敵救國도 이 처럼 順調롭게 成功하지는 못했을 것이니 이것이 筆者가 壬亂海軍戰捷史에 息城君이 그 定策의 主役을 擔當했던 분이라고 稱道하는 所以이다.

 

 

나‚ 最初의 戰果인 玉浦洋大捷

 

 宣祖二十五年(一五九二年) 五月七日 이 날은 곧 壬辰亂中 最初의 戰果를 올린 玉浦洋大戰捷의 날이다, 元均이 引率한 慶尙水軍과 忠武公이 來援한 全羅水軍이 合勢하여 巨濟島東岸 玉浦洋에서 敵船을 맞아 싸웠는데 이 싸움에 息城君이 先鋒將으로서 全艦隊를 陣頭指揮하여 勇戰奮擊하니, 敵兵은 敢히 抵抗하지못하여 배를 버리고 陸地에 올라 달아나므로 敵船五十餘隻을 焚燒시킨 大戰果를 거두었다. 또 永登洋에서도 敵船十餘隻을 焚燒시키는 戰果를 거두었다.

 

 이 싸움이 끝난 후 忠武公이 引率한 全羅水軍은 麗水本營으로 돌아가니, 元均은 또 敵勢를 겁내어 逃亡하려고 하였다. 息城君은 元均에게 힘껏 進言하여 그의 逃亡을 말리고는 自己혼자서 水陸兩面에 往來하면서 敵軍의 橫行을 막고 있었다.

 

얼마 후에 다시 全羅水軍과 會合하여 泗川에 있는 敵軍을 進擊했는데, 火砲를 쏘아 敵將이 타고 있는 樓船을 깨뜨리니, 敵軍은 크게 敗하여 달아났다. 全羅右水使 李億祺도 또한 軍士를 거느리고 와서 合勢하니 我軍의 氣勢가 조금 떨쳐졌다.

 

 

다, 鎭海洋大捷과 閑山洋大捷

 

六月五日 鎭海洋에 敵軍이 와서 四面으로 我軍을 包圍했는데 敵將이 타고 있는 瓦屋樓船(三層樓船)은 깃발과 닻줄의 빛깔이 현란하게 海面에 비쳐서 보는 사람의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息城君은 永登浦萬戶 禹致績과 함께 終日토록 敵과 맞아 싸워 敵將의 樓船을 깨뜨려버리니 敵軍이 蒼黃하여 물에 빠져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我軍의 士卒이 피곤해졌으나 息城君은 싸움을 더욱 급하게 재촉했으며 鐵索으로서 敵船을 끌어매어 바다복판에 와서 뒤엎으니 敵軍은 크게 敗하였다. 이 싸움에 息城君은 네 번이나 敵의 창을 맞았으나 모두 갑옷위에 맞았으므로 몸에 傷處는 없었다.

 

七月八日 이날은 壬辰亂中 가장 有名한 閑山洋大戰捷의 날이다. 이 때 敵船百餘隻이 固城 見乃梁을 지나가려고하는데 我軍이 敵勢의 强盛함을 바라보고는 겁내는 氣色이 있었다. 息城君은 忠武公과 相議하여 敵軍을 外洋으로 誘引하고는 忠武公에게 進言하기를,

 

 "死生安危가 이 한번 싸움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한번 죽음을 決心하고 敵船을 突擊할 것이니, 公(忠武公)은 後面에서 援擊하십시오."

 

하고는 곧 배를 돌려 火砲를 쏘아 敵船을 命中시키니 敵軍의 氣勢가 조금 꺾이었다. 이에 全羅水軍이 乘勢奮擊하니 火砲소리는 하늘을 뒤흔들고 연기와 불꽃은 海面을 덮었다. 敵船을 撞破 焚燒한 것이 五十餘隻이었는데 敵軍을 죽인 것이 數萬名이나 되고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타서 죽은 것도 또한 萬餘名이나 되어 바다물이 붉게 변하였다.

 

 六日이 지난 후 다시 熊川安骨浦에서 싸워 敵船三十餘隻을 깨뜨리니, 이로부터 敵軍은 모두 陸地에 올라가서 달아나고 內洋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巨濟 以西의 地域이 平穩해지고 全羅 ․ 忠淸의 海路가 막히지 않게 되었는데 이 閑山洋의 戰捷에 息城君의 힘이 가장 컸던 것이다.

 

壬辰亂中 우리가 勝利한 싸움을 陸戰의 晋州城大捷, 幸州城大捷과 海戰의 閑山洋大捷을 合쳐서 通稱 '三大戰捷'이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 閑山洋大捷 '이 全戰局을 頹勢에서 勝利에로 挽回시켜 國家中興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라는事實은 壬辰亂中에 國家의 樞機에 參與하여 難局을 直接 處理한 西厓 柳成龍公이 그의 戰亂回顧錄인 '懲毖錄'에서 다음과 같이 論評하고있다.

 

 '대개 賊軍은 본시 水軍과 陸軍이 合勢하여 西쪽으로 내려오려고 했던 것인데, 舜臣의 이 한번 싸움(閑山洋戰捷)에 힘입어 마침내 敵軍의 한쪽 勢力을 꺾었기 때문에, 少西行長이 비록 平壤을 占據했지마는 形勢가 외로워서 敢히 더 나아가지 못하였고 우리國家에서는 全羅 ․ 忠淸道와 黃海 ․平安道 沿海地域의 全部를 保全하여 軍糧을 補給시키고 朝廷의 號令을 傳達시켜서 나라의 中興을 이루게 되었으며, 遼東地方의 金州 ․ 復州 ․ 海州 ․ 蓋州와 天津 등 地域도 動搖되지 않아서 明나라 兵卒이 陸路로 나와 救援하여 敵軍을 물리치게 된 것도 모두 李舜臣의 한번 싸움에 이긴 功이었으니, 아아 이것이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즉, 敵의 戰略은 그 首魁 秀吉이 豪言한 '將一招直入大明國'이라한 바와 같이 水軍과 陸軍이 合勢하여 우리國土를 席捲한 後 遼東地方에까지 進擊할 計劃이었으나, 忠武公이 南海의 制海權을 掌握하여 敵軍의 補給路를 遮斷했기 때문에 平壤까지 進出한 少西行長도 더 前進하지는 못하였고 우리國家에서는 號令을 前達시켜 各 地方의 義兵들을 激勵奮起케 하였으며 明軍도 陸路로 來援하여 翌年正月에는 平壤을 收復하게되었으니, 이 閑山洋戰捷이 全戰局에 미치는 戰略的意義는 매우 컸던 것이다.

 

  忠武公이 이러한 大勝利를 거두게 된 것은 息城君이 開戰劈頭에 決機定策하여 全羅水軍을 迅速히 慶尙道로 進出시켜 兩軍이 協同作戰을 展開함으로써 敵軍의 外洋進出을 事前에 遮遏시킨 結果라고 할 수가 있겠다.

 

 

라. 永川倉巖의 戰捷

 

  戰爭이 일어난 이듬해 癸巳年(一五九三年)에 息城君은 熊川縣監으로 遷職되었다. 忠武公이 처음으로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는데 이때 息城君의 戰功을 體府(體察使의 駐營)에 上申하였다.

 

二九년(一五九六年)에는 熊川縣監에서 慶尙左水使로 任命되었다. 이보다 먼저 明나라에서 沈惟敬을 보내어 倭敵과 더불어 和親을 交涉하니 敵은 점차로 軍隊를 撤收하여 가는데 息城君은 그들의 詐術을 헤아려 알고서 鹽浦에 陣을 쳐서 兵士를 敎練하고 戰備를 大大的으로 修整하면서 늘 敵軍이 侵犯해 올 것처럼 警戒하고 있었다.

 

三十年(一五九七年) 丁酉再亂이 일어나 倭敵이 大軍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再次侵犯해왔는데 敵將 加蕂淸正은 西生浦에 있으면서 通譯者에게 묻기를,

 

 '듣건대 朝鮮의 名將 한 사람이 右道 바다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하는데, 水使(息城君)가 이 사람인가.'

 

하면서 마음속으로 息城君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해에 元均은 忠武公을 대신해서 統制使가 되었으나 漆川梁에서 敗戰하여 죽고, 水軍의 形勢가 孤弱해 졌으므로 都元帥 權慄이 息城君에게 檄書를 보내어 水軍을 버리고 陸地에서 싸우라고 命令하였다. 息城君은 慶尙兵使 權應銖와 合勢하여 永川 倉巖들에서 敵軍을 무찌르니 敵은 다시 東쪽으로 나오지 못하고 安康以北의 地域이 平穩하게 되었다.

 

  이 해 겨울에 明나라 군사가 蔚山의 島山城을 包圍하므로 息城君도 大王巖으로부터 水軍을 進出시켜 敵軍을 左右 양쪽에서 挾擊했으나 明나라 군사가 退却한 까닭으로 我軍도 또한 뒤따라 退却하였다.

 

  三一年(一五九八年) 가을에 明나라 군사가 敵軍을 再次 攻擊하였는데, 息城君은 倭賊을 사로잡아 敵酋秀吉이 이미 죽은 것을 먼저 알고는, 軍隊를 整頓하여 釜山洋에서 돌아가는 敵軍을 追擊하였다. 敵이 물러간 후 군사를 돌이켜 옛 水營에 돌아와서 백성을 募集하여 屯田을 設置하고 城池를 修理하여 모두 完備하게되었다.

 

마, 終戰後의 業績

 

  宣祖三一년(一五九八年) 이 해 겨울에 壬辰亂의 戰爭張本人인 日本의 關白 豊臣秀吉이 病死하고, 이 戰爭을 마무리 지은 朝鮮의 統制使 李舜臣이 露梁海戰에서 戰歿함으로써 前後七年間의 大戰爭은 一段 終幕을 告하게 되었다.

 

  이해 겨울에 息城君은 言官의 彈劾을 當하여 遞職되었는데. 都體察使 漢陰 李德馨公이 嶺南에 와서 息城君을 그 幕下에 불러 모든 일을 諮問 決定하고, 특히 息城君이 海上의 事務를 잘 알고 있다는 理由로써 그를 ⌜海門의 主人⌟이 될 만하다고 칭찬하고는 곧 朝廷에 薦擧하여 다시 慶尙左水使로 復職시켰다. 그는 다시 釜山城을 修築하고 軍營을 改造하니 門樓와 壁壘의 精彩가 一變되었다.

 

  三八年(一六○五年) 二月에 都摠府副摠管捕盜大將 兼 火器提調에 任命되고 備邊司堂上에 加職되니 비로소 朝廷의 機務에 參與하게 되어 時局收拾의 方略을 開陳함으로써 그의 計策이 많이 採用되었다.

 

  이해 七月에 外職으로 나가 慶尙道右水使 兼 三道水軍統制史가 되었는데 忠武公으로부터 이 職制가 創設된 以後 第七代째로 就任되었으니 때는 終戰後七年이었다. 그는 在任한 동안 忠武公의 遺業을 繼承하여 모든戰艦과 商船이 發行할 때마다 반드시 빠짐없이 申告하도록하였고 巨濟에 忠武公의 遺廟를 세웠으며. 또 統營의 忠烈祠도 朝廷의 命令을 받들어 그의 손으로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任期를 채우지 못하고 在任二十二個月만에 當路者의 誣陷을 當하여 遞職(交替)되고 말았다.

 

  四十年(一六○七年) 이 해 十月에 北方 忽刺溫의 胡兵이 邊方에 侵寇하니 備邊司의 薦擧로써 咸鏡南兵使로 任命되었다. 息城君은 任地에가서 軍備의 缺點이 많은 것을 보고는 大大的으로 軍備를 整頓하는 一方, 膽力이 있는 軍卒을 모아 騎兵別隊를 創設하고 荒廢해진 甲山城을 重修하고 北靑의 東南門樓를 創建하는 등 변방의 방비에 貢獻이 많았다.

 

  光海君元年(一六○九年) 北方에서 國境防備의 任務를 마치고 이 해에 忠淸水使로 轉任되었으나 未久에 遞職되어 故鄕으로 돌아와 光海君二年(一六一○年) 七月에 別世하였다.

 

 

2, 息城君의 生涯와 人品

 

가, 順坦치 못한 經歷

 

  息城君의 諱는 雲龍, 字는 景見, 號는 東溪이고, 本貫은 載寧이니, 息城君은 그의 封君稱號이다. 始祖는 新羅의 佐命功臣 謁平인데, 高麗의 門下侍中 禹偁이 載寧君에 封해져서 載寧으로 本貫을 삼게 되었다. 後世에 慶北 淸道郡으로 移住하였다. 考는 南海縣令 夢祥이고, 妣는 貞夫人 密陽卞氏이다.

 

 明宗 一七年(一五六二年) 九月一六日에 慶尙北道 淸道郡 梅田面 明臺洞에서 誕生하였다. 公은 天資가 俊秀하여 幼時부터 이미 動作이 의젓하기가 成人과 같았으며, 親喪을 當하여 禮節을 지키고, 長成하며 學問에 힘써서 經史를 통달하였다.

 

 宣祖 一八年(一五八五年) 公은 弱冠二四歲에 武科에 올라 宣祖二十年(一五八七年) 二六歲에 宣傳官으로 任命되었는데 이때 西厓 柳成龍公이 兵曹判書에 在職하면서 朝廷에 建議하되,

 

 '지금 國防이 踈忽하니 年少武官으로 才兼文武하여 後日에 重責을 맡을 만한 사람을 選拔 登用해야 된다.'

 

고하여 公이 그 選拔에 參與되었다.

 

 宣祖 二二年(一五八九年) 公은 二八歲의 靑年으로써 玉浦萬戶로 任命되니, 任地에와서 軍卒을 撫愛하고 武器를 修繕하여 陰雨의 待備에 萬全을 期하였다.

 

 宣祖 二五年(一五九二年) 이 해 四月十三日에 倭敵의 大軍이 釜山에 上陸하니, 釜山鎭과 東萊城이 연이어 陷落되고, 以後 陸軍은 總崩壞의 狀態이었다. 한편 水軍은 慶尙左水使 朴泓은 맨 먼저 逃走하고 右水使 元均도 잇달아 逃走하려고 하였다. 그當時 慶尙道招諭使인 鶴峰 金誠一公의 狀啓에

 

 '左水使 朴泓은 화살 한개도 쏘지 않고 맨 먼저 城을 버리고 逃走했으며, 左兵使 李珏은 잇달아 東萊로 逃亡했으며, 右兵使 曺大坤은 年老 框㤼하여 始終 退縮했으며 右水使 元均은 陣營을 불태우고 바다로 내려가서 다만 배 一隻만 保全하고 있는 形便입니다. 兵使 水使는 一道의 主將인 데도 그들의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部下의 將卒들은 어찌 逃亡하고 또 分散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指摘한 바와 같이 開戰初期에 倭敵의 軍勢가 너무 巨大하기 때문에 我軍의 兵 ․ 水使들은 擧皆 望風 遁走하는 形便이었다.

 이 때 地方閫帥 (兵使 ․ 水使의 呼稱)의 一個 偏裨에 不過한 玉浦萬戶이던 息城君만이 홀로 不退轉의 勇氣로써 國難에 對處하고 慷慨한 直言으로써 그主帥인 元均을 激動시켜 그의 棄陣逃走를 制止시키고 全羅左水使 忠武公의 後援軍을 오게 하여 비로소 倭敵 擊滅의 戰列을 整備하게 된 것이다.

 

 以後 公은 五月七日의 玉浦海戰을 爲始하여 泗川 ․ 鎭海 ․ 閑山洋 ‧ 安骨浦 ‧ 釜山海 등 여러海戰에 參加하여 항상 陣頭에서 勇敢히 싸워 倭敵의 氣勢를 꺾어 敵軍의 內洋進出을 막고 우리의 水軍으로 하여금 南海의 制海權을 掌握케하는데에 殊勳을 세웠던 것이다.

 

 宣祖 二六年(一五九三年) 四月 熊川縣監으로 轉職되었다, 이해 忠武公이 처음으로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는데, 公의 戰功을 體府(體察使의 駐營)에 上申하였다.

 

 宣祖 二八年(一五九五年) 四月에 功勞에 對한 賞으로 通政大夫(正三品)의 官階에 加資되었다.

 

 宣祖 二九年(一五九六年) 正月에 慶尙左水使로 任命되었으니, 즉 忠武公의 薦擧에 依한 것이다.

 

 宣祖 三七年(一六○四年) 朝廷에서 壬辰亂을 치른 勳功을 記錄하여 公을 宣武功臣三等에 錄勳하고 息城君으로 封했으니, 息城은 곧 載寧의 舊號이다. 이 때 宣祖大王이 내린 冊勳 敎書中에 다음과 같은 句節이 있다.

 

 '王室(國家)이 多難함을 痛憤히 여겨 이미 敵愾의 忠誠을 다했으니 그 功績을 嘉尙히 여겨 잊지 못하여 이에 紀勳의 盛典을 擧行한다. …獨力으로 强寇를 對敵했으니 壯하게도 名將의 氣風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武器를 버리고 달아나는데 그대만이 칼을 짚고서 對敵하였네…赫赫한 그 軍聲은 오랑캐가 눈 안에 들어와 있고 堂堂한 그義氣는 몸이 陣頭에 앞장서 있었네. 불속에 賊船을 쳐 넣으니, 쌓인 송장은 바다를 메우게 되고, 세찬 물결에 고래(鯨鯢-惡人의 巨魁)를 베어 죽여 흐르는 피는 바다에 漲溢하였네 淝水의 大捷(晋나라 謝玄이 秦王符堅을 격파한 싸움)을 어찌 부러워하겠는가. 赤壁의 雄威(吳나라) 周瑜가 魏나라 曹操를 격파한 싸움)에 比較해 볼 만하다. 한창 强盛한 賊의 氣勢를 꺾은 것은 이것이 누구의 힘이었던가. 이미 墜落된 王의 尊嚴을 떨치게 한 것은 다만 그대의 功이었다.…그런 까닭으로 勳功을 策定하여 宣武功臣三等으로 삼고 肖像을 그려서 後世에 傳하도록한다. … '

 

 宣祖 三八年(一六○五年) 二月에 都摠府副總管 捕盜大將 兼 火器提調로 任命되고 備邊司堂上에 加職되었다.

 

이해 七月에 慶尙右水使 兼 三道水軍統制使로 任命되었다. 이번의 除授는 都體察使 漢陰 李德馨公이 三四年(一六○一年)에 嶺南에 내려와서 여러將帥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李雲龍이 水戰에 익숙하니 統制使의 適任이라' 고 하므로, 그때에 薦擧했던 것인데, 다만 시골사람으로 出身經歷이 오래되지 않았다는 理由로써 이때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宣祖實錄 卷一八九, 三八年 七月 辛丑條 「李雲龍 爲 慶尙道右水使 兼 統制使」란 記事의 小註에,

 

 '사람 된 품이 본디부터 武才가 特出하고, 邊事를 詳細히 알고 있었는데 兵亂이 發生한 以後에는 慷慨히 敵陣에 나가서 자못 戰功이 많았고 南方의 사람들이 至今까지 그를 칭찬하고 있는 까닭으로 統制使의 職을 除授한 것이다. '

 

하고 그의 經歷을 記錄하고있다.

 

 宣祖 四○年(一六○七年) 三月에 統制使를 遞職시켰으니 在任二二個月만에 職任을 떠났던 것이다.

 

이해 十月에 北方에 胡兵이 侵犯하니 備邊司의 薦擧로써 咸鏡南兵使에 任命되었다. 公은 任地에가서 騎兵 別隊를 創設하고 甲山城을 修築하는 등 國防强化에 貢獻이 많았다.

 

光海君 元年(一六○九年) 咸鏡南兵使로서 任務를 마치고 忠淸水使로 轉任되었다. 이때 司憲府에서 些少한 缺點을 들어 그의 罷免을 要請하니 光海君은 批答하기를,

 

  '李雲龍은 戰功도 있고 才略도 있는 사람이니 비록 혹시 失手가 있더라도 그대로 留任시켜 功勞를 세우도록 하는 것이 좋겠으며, 罷職시킬 必要는 없다.' (光海君日誌 券二四, 二年 正月 癸巳條) 고 했으나 司憲府에서 連日 罷免을 要請하니 光海君도 할 수 없어서

 '여러날 동안 서로 버티고 있으니 事體에 損傷될가 염려되므로, 지금 暫定的으로 遞差시킨다. '고 하고는, 이내 遞職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公은 言官에게 여러 번 彈劾을 當했으니, 光海君의 批答에

 

 '李雲龍은 官階가 높은 勳臣인데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는가. 風聞이 지나침이 없었는가. 近日에 武將으로 受任한 사람은 依例히 彈劾을 當하게 되므로 完人(身分이나 名譽에 흠이 없는 사람)이 없을 듯하니, 이것도 未安할 일이다.⌟(光海君日記 券二四, 二年 正月 乙未條)

 

라고 實吐할 만큼, 그當時 武將들에 對한 言官의 態度가 어떠했는가는 다음의 例로써도 充分히 알 수가 있다.

 

  이보다 먼저 壬辰亂中에 巨濟의 敵兵이 出沒하여 我軍이 조금 被害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써 兩司의 言官들이 번갈아 위에 아뢰어

 '都元帥 權慄과 統制使 李舜臣에게 그 責任을 물어 軍律을 犯한 罪名으로써 잡아와서 鞠問하여 刑律에 依據해 科罪할 것을 請하였으니, 當時 이들 言官의 無節制한 言動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光海君 二年(一六一○年) 公은 忠淸兵使에서 遞職되어 故鄕에 돌아왔는데 腫氣病으로 이해 七月二日에 別世하니, 享年이 四九歲었다.

訃音이 위에 알려지니 朝廷에서 資憲大夫 兵曹判書를 贈職하였다.

 

墓는 처음에는 慶北 淸道郡 法龜山 先塋下에 있었는데 그 후 二○年만에 慶南 宜寧郡 芝正面 梧川里 雄谷으로 移葬하였다.

 

나, 孤起 介立한 人品

 

 息城君의 人品을 論할 적에 먼저 孤起 介立하여 時俗과 어울리지 않는 點을 들 수가 있으니 이런面에서는 忠武公의 人品과 共通點이 많으며 다음은 天姿가 溫和하고 沈着하여 信實스러운 長者的 風貌가 있음을 들 수가 있으니, 이런面에서는 그가 元均과 忠武公의 不和를 調停하여 大事를 成就시켰던 것이다. 또 그는 功勞를 자랑하지도 아니하고 陞進을 要求하지도 아니했으니, 이런點은 그의 立身 處世面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壬辰亂中에 처음에는 慶尙右水使 元均의 隸下(玉浦萬戶)에서 全羅水軍의 來援 周旋에 積極 活動했으며 나중에 慶尙 ‧ 全羅의 兩軍이 合勢하여 共同作戰을 展開하는 過程에서는 두水使(元均 ‧ 李舜臣)의 밑에서 任務를 遂行했는데, 그는 直屬上官인 元均에게 보다는 오히려 忠武公에게 그 才幹과 人品이 認定되어 두터운 信任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은 다음과 같은 事由에서다.

 

 즉, 開戰初期에 慶尙右水使 元均은 玉浦萬戶인 公(息城君)의 周旋으로 忠武公의 全羅水軍과 合勢함으로써 頹勢를 收拾하여 最初의 戰果(玉浦洋大捷)를 올렸던 것인데, 以後 元均 自身은 或時는 露梁에 있기도 하고, 或時는 南海에 있기도 하면서, 다만 全羅水軍의 去就만 보고서 進擊하기도 하고, 退却하기도 하였다. 이때 元均은 오르지 公으로써 싸움의 前列에 세워두고서 公이 싸움에 이길 때마다 元均은 번번이 와서 戰利品인 敵兵의 首級을 收去해 가서 自己의 戰功으로 朝廷에 啓聞하고, 또 南海縣令 奇孝謹은 싸움을 시작하자 배를 이끌고 먼저 退却해 달아나므로, 公은 軍法으로써 論罪하기를 請했으나 元均은 듣지 않고 孝謹의 膳物을 받고서는 오히려 孝謹을 두둔하게 되었다. 公은 元均의 이러한 處事에는 介意하지않고 오직 自己의 맡은 일에만 盡力하니, 이 때문에 忠武公은 元均을 싫어하고 公을 賢明하게 여기었다.

 

  元均이 忠武公과 不和한 理由를 宣祖實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記述하고 있다.

 

 "…金睟가 宣祖에게 아뢰기를  元均과 李舜臣이 서로 다투는 일은 매우 念慮가 됩니다. 元均도 失手가 없지는 않으나 不關한 일로써 점차 이 지경에 이르게 되니 매우 不幸한 일입니다." 하니 宣祖는 말하기를 "무슨 일로써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니 金睟는 아뢰기를 "元均이 十餘歲된 妾의 아들로써 또한 軍功을 위해 報告하여 賞을 받게 되니, 李舜臣이 이 일로써 不快하게 여긴다고 합니다."…하였다. 金應南은 아뢰기를,  "대개는 功을 다투는 일로써 이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當初에 水軍이 戰捷한 데는 元均이 스스로 功이 많다고 認定하고 있는데도 朝廷에서는 李舜臣으로써 元均의 위 벼슬을 주게 되니 元均은 이 일로써 不滿을 품고서 서로 和合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宣祖가 말하기를 "舜臣이 倭賊을 잡은 功은 가장 많았다."고 하니 鄭崐壽는 아뢰기를 李舜臣의 手下將帥들은 대부분 堂上官으로 陞進되었으나, 元均의 手下將帥로서 禹致績과 李雲龍과 같은 사람은 그功은 매우 많은데도 그賞은 도리어 다른 사람보다 못하게 되니 그 때문에 서로 感情이 激昻하게 된 것입니다."하였다.(宣祖實錄 券五七, 二七年 十一月丙戌條)

 

 이 實錄의 記事를 살펴보더라도 元均이 忠武公에게 爭功 猜忌한 事實과 部下(息城君)의 戰功을 自己가 독차지했음이 如實히 나타나 있다.

 

더구나 息城君은 忠武公보다 十七歲의 年下 後輩이지만, 그才幹과 人品이 일찍부터 忠武公에게 認定되어, 忠武公이 처음 三道水軍統制使로 任命되었을때 公(息城君)의 戰功을 體府에 上申했던것이다.

 二六年(一五九三年) 九月에 都體察使 梧里 李元翼公이 列陣을 巡察하는 途中에 忠武公의 陣營에와서,

 

 "여러 將帥들 중에서 누가 公(忠武公)을 대신할 만한 사람인가요."

 

하고 물었을 때, 忠武公은

 

 "그 功勞든지 그 人品이든지 오직 李雲龍만이 내後任을 맡길 수 있습니다."

고 대답했으니, 이것이 公이 忠武公에게 받은 最初의 知遇였던 것이다.

 

 宣祖 二九年(一五九六年) 正月에 忠武公의 薦擧로서 慶尙左水使에 任命된 後 公은 忠武公을 자주 訪問하여 서로의 情意를 交換하기도 했으니 忠武公의 '亂中日記'에서 이른바

 

 "慶尙左水使가 와서 佐里島洋中에서 같이 留宿했다.…左水使가 왔다. … 左水使를 다시 請해서 왔다."

고 한 것이 忠武公과 息城君 두 분의 交分關係를 말하고 있는 記事이다.

또 漢陰 李德馨公이 白沙 李恒福公에게 보낸 書信中에서도

 

 "내가 嶺南에와서 李雲龍을 만나보니 자못 氣局이 있고 글을 잘하고 事務에 밝으며 水軍의 運用에 熟練함이 그와 짝할만한 사람이 없었소. 前日에 李統制(忠武公)가 古今島에 있을 때(戰爭最終年)"「李雲龍이 任務(統制使)를 대신할 만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말이 虛言이 아니었소." 라는 一節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忠武公은 息城君의 才幹과 人品을 信賴하고서 自己의 唯一한 後任者로 薦擧했음을 알 수가 있다.

 

 息城君은 이러한 才幹과 戰功이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統制使의 重任에 다른 同僚보다 늦게 陞進된 것은 그當時 備邊司의 狀啓에 :李雲龍 有局而性緩"이라고 指摘한 바와 같이 그는 才幹은 있는데도 性質이 緩慢(謙遜)하여 陞進에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된다.

 

 

3, 後世 史家들의 論評

 

 息城君의 功績과 人品에 對해서는 '息城君實記'에 詳細히 記述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중 몇몇史家의 論述만 引用한다.

 仁祖朝의 文臣 澤堂 李植(一五八四∼一六四七)은 息城君보다 二二年의 後輩인데 그는 息城君 墓碑銘에서 다음과 같이 論評하였다.

 

 '公은 天姿가 溫和하고 沈着하여 平常時에는 信實한 長者다웠으나, 急變과 大節에 當해서는 神采가 날카롭고 言論이 힘차서 事機를 決斷하고 意志를 確定하여 죽음이 있을지라도 변경함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능히 一個堡壘의 職任(水軍萬戶)으로써 두水使(元均, 李舜臣)를 合從시키고 强大한 寇賊사이에 드나들면서 늘 싸울 때마다 번번이 勝利했던 것이다.

 

 처음에 元均이 李舜臣과 큰 不和를 꾸며 만드니 朝廷의 重臣들도 따라서 편들게 되므로 마침내 和解시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홀로 公만은 公平한 마음으로 兩쪽사이에 있으면서 이쪽과 저쪽에 편드는 일이 없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두 사람(元均, 李舜臣)이 모두 公의 人格을 尊重하였다. 元均이 처음에는 公의 말을 듣고 採用한 理由로써 敗戰하지는 않았는데 公이 左道(左水使)로 옮겨가게 되자 元均이 마침내 敗死하고 말았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일로써 公의 功이 두水使(元均, 李舜臣)의 아래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는 功勞를 자랑하지도 않고 陞進을 要求하지도 않으며 性質이 곧아 時俗과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或時는 言官에게 困辱을 當하여 勳秩이 겨우 奇孝謹(宣武三等功臣) 등과 같게 되니 見識이 있는 사람들은 遺憾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今日에 와서 壬辰, 丁酉 그 무렵의 倭賊을 討平한 名將을 하나하나 세어본다면 그 수효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닌데도 그들 중에서 功烈을 始終토록 保全하여 훌륭한 名聲을 잘 간직하고 있음이, 公에 比할이가 겨우 한두 사람으로서 셀 수 있는 정도이니, 忠 ‧ 義 ‧ 信 ‧ 讓의 報果임을 볼 수가 있다. 그 功德을 찬양한다.

 

  驕慢하고 豪放한 것으로써 勇氣로 삼는 이가 있고, 혹은 欺瞞하고 狂妄한 것으로써 智謀로 삼는 이도 있지만, 公만은 홀로 그렇지 않고서 忠誠에 힘써서 職務에 勤實했으며 虛僞를 꾸며서 眞實로 삼는 이가 있고 혹은 徼幸에 依據하여 利益을 노리는 이도 있지만 公만은 홀로 그렇지 않고서 功勞를 쌓아 官位에 陞進하였다. 저들은 그危殆한 것을 편안한 줄로 여겼는데, 公만은 홀로 그名聲에 부끄럽지 않게 하였다.'

 

 近世의 巨儒晦峰 河謙鎭은 息城君 神道碑銘에서 다음과 같이 論評하였다.

 '우리宣祖大王의 壬辰倭亂 當時에 忠武公李舜臣이 倭賊을 東南海中에서 完全히 殲滅시키고 名聲이 朝鮮과 中國에 떨쳐져서 中興의 第一元勳이 되었는데, 처음에서 끝까지 忠武公을 左右에서 補佐하여 奇計를 내어 勝利를 하게 된 것은 後世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忠武公을 일컬을 적에는 반드시 그 둘째손가락을 꼽는 사람은 息城君 李公, 그분이시다. … 내가 國朝의 歷史를 살펴보니, 海上의 前後數十餘의 戰捷이 모두 忠武公의 事實에만 記錄되어 있고, 公은 그戰捷記錄에 參與되지않았으니, 이것은 대개 忠武公은 大將이 되고 公은 副將이 된 까닭으로 그 事實을 簡略하게 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當時에 公이 元均에게 힘껏 贊助한 한마디 말이 있지 않았더라면 忠武公이 반드시 全羅의 重鎭을 떠나서 嶺南으로 赴援하지않았을 것이며 公이 忠武公의 來援을 周旋하지 않았더라면 元均이 逃走함으로써 全羅 ‧ 忠淸道를 잃게 될 것이고, 全羅 ‧ 忠淸道를 읽게 됨으로써 賊의 艦船은 서울의 漢江으로 바로 달려갔을 것이다. 公과 禹致績 등 여러將帥들이 힘을 다해 싸워서 앞장서는 일이 없었더라면, 비록 忠武公의 沈着한 機智와 精妙한 計略이 있더라도 장차 그妖氣(災禍 곧 倭賊을 이름)를 迅速히 掃蕩하는 功勞를 그와 같이 뛰어나게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 애석하게도 戰亂이 平定된날에 나라의 政權을 잡은 이는 公의 이 같은 事實로써 임금에게 뵈옵고 아뢰는 이가 없었고, 奉常寺에서는 諡號내리는 일을 議論하지도 아니하여 錄勳이 겨우 三等功臣에 그쳤던 것이며, 또 後嗣가 零落 孤單하여 神道碑도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 '

 

 近年의 漢學者 爲堂 鄭寅普는 息城君記蹟碑銘에서 다음과 같이 論評하였다.

 '대개 公이 忠武公에게 처음에는 海面을 制壓하는 偉功을 마련해드렸으며, 나중에는 自己가 三軍에 으뜸가는 待遇를 받았으니, 그 분들이 서로 親熟해진 義理는 다만 主將과 副將이 된 理由에서 뿐만이 아닌 것이다.

 

 바야흐로 壬辰年에 倭寇가 쳐들어 올 적에 맨 먼저 釜山鎭과 東萊城을 陷落시키고 잇달아 敵船이 바다를 가렸는데, 忠武公이 危急하다는 寄別을 듣고 그 本據地를 떠나 東쪽으로 나와서 海上에서 敵軍을 연달아 擊破하여 敵軍의 補給路를 遮斷시켰으므로 陸地에 있는 敵軍의 形勢가 危殆하게 되었으니, 國家의 中興은 실로 이에서 터전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먼저 慶尙道에도 水軍은 있었으며 元均은 그 右水使였지마는 倭寇를 보고는 逃亡하려고 하였다. 公은 이 때 玉浦萬戶로서 軍中에있다가 大義로써 元均을 꾸짖고는 全羅道에 危急한 事態를 알릴 것을 建議하니, 李英男公이 元均을 爲하여 忠武公에게 심부름을 가서 忠武公이 慶尙道로 오게 된 것이다. 그 때 公이 아니었다면 元均은 逃亡쳐서 危急한 事態가 忠武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 忠武公이 慶尙道에 到着되기 前의 몇 날 동안에 元均의 兵船이 먼저 무너지게 되면, 海面에는 마침내 水軍의 本據地가 없게 될 것이며, 忠武公이 到着되더라도 함께 앞뒤에서 周旋할 사람이 없었더라면 나라일은 더욱 힘쓸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이일로써 미루어 말한다면 公의 功勞는 國家全體에 대한 功勞가 되는 것이다. … 公은 海路의 險難하고 順坦한 것과 島嶼의 開合하고 連絶한 것에 精通하고 배 다루는 變化에 通達했으므로 이러한 모든 것에 公과 比較할만한 이가 없었으며, 火器를 使用하는 일은 더욱 그의 長點이었던 것이다. … 忠武公은 龜船으로써 勝利를 거두었는데도, 公은 배 부리는 方法을 깊이 通達했으며, 忠武公은 筒砲로써 敵軍을 殲滅했는데도, 公은 火器使用法을 익숙하게 알고 있었으니 아마 忠武公에게서 배워 熟練된 것도 있었을 것이다. 후에 公이 統制使에 任命된 時期는 壬辰亂의 큰 戰亂이 방금 지났는데도 우리의 朝野에서는 泰平無事한 마음이 벌써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公은 될 수 있는 限 海防(沿海의 防備)을 大大的으로 整備하고 水軍을 거듭 整頓하려는 目的으로 艦船을 修理하고 火器를 製造하며 兵卒을 撫愛하고 兵站의 數爻를 確定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事實들은 朝廷에 올린 狀啓에 모두 자세히 갖추어져 있다. 그가 作戰方法을 指示하고 才能이있는 사람을 任用하는 境遇에 그에게 任用된 사람은 特殊한 才幹과 絶妙한 技藝를 가진 이가 많았으니, 姜禮秀의 噴筒과 禹壽 羅大用의 戰船과같은 것들은 國史에 뜻을 둔 사람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結 言

 

 以上에서 息城君의 功績과 人品에 對하여 대략 論述했는데, 끝으로 息城君의 遺蹟에 對하여 그現狀과 保存問題에 言及하려고한다.

 息城君 遺蹟의 現狀을 살펴보면 息城君은 그의 偉大한 功績에 比하여 그 遺蹟의 保存實態는 거의 殘微한 지경에 놓여있으니, 이것은 오로지 公의 孫子代에 와서 血孫이 斷絶되었기 때문이다. 遺蹟의 現在 保存狀態는 다음과 같다.

 

 琴湖書院 … 所在地 … 慶北 淸道郡 伊西面 琴村里

 影 堂 … 所在地 … 慶北 淸道郡 梅田面 黑石里

 (以上의 두建物은 純祖十八年(一八一八年) 十一月에 嶺南의 士林 柳濠 등 四百餘名이 慶尙監司에게 建議하여 建立한 것임)

 紀蹟碑 … 所在地 … 慶南 統營市 忠烈祠 正門곁

 (이碑는 一九五一年에 傍後孫 李基煥 등이 發議하여 建立한 것임)

 永世勿忘碑 … 所在地 … 慶南 巨濟市 玉浦面

 (이碑는 一九七○年台에 玉浦面의 地方民들이 옛날 玉浦萬戶이던 息城君의 恩德을 思慕하여 建立한 것인데 至今은 玉浦大捷記念公園 效忠祠의 境內에 있음)

 岐江書院과 神道碑 … 所在地 … 慶南 宜寧郡 芝正面 梧川里 雄谷 息城君의 墓所앞

 (이書院은 一九五八年에 傍後孫 李基煥이 主幹하여 地方의 儒林들을 모아 息城君遺蹟保存會를 만들어 建立한 것이며, 除幕式에는 後孫, 儒林, 海軍統制府將星 等이 參席하였고 軍樂隊 演奏도 하였음)

 紀蹟碑 … 所在地 … 慶北 淸道郡 伊西面 琴村里

 (이碑는 一九八○年 五月에 傍後孫들의 發議로 建立한 것임)

 

 따라서 息城君 遺蹟保存의 必要性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息城君이 우리國家와 民族에게 남긴 偉大한 功績은 息城君實記를 읽어보면 詳細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國家에서 이러한 歷史上 偉人의 遺蹟을 補修 保存하는 目的은, 그 人物이 가진 崇高한 人格과 偉大한 業績을 새로 되살려 永久히 後人의 龜鑑으로 삼으려는 데에 있다면, 息城君의 遺蹟保存도 그 傍後孫이나 地方民들의 손을 떠나 當然히 國家的인 次元에서 이를 管理保存해야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關係當局에서는 此際에 息城君의 萬年幽宅地인 慶南 宜寧郡 芝正面 雄谷의 墓所곁이든지 또는 그의 誕生地인 慶北 淸道郡 梅田面 明臺洞이든지 適當한 곳을 選定하여 祠廟 ‧ 銅像 ‧ 紀念館 등의 建物을 새로 建立하여, 우리 後人들이 景慕할 수 있는 偉人의 遺蹟답게 그 面貌를 一新시켜 永久히 保存되기를 希望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