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6 길사랑회 갑진년 말 준이벤트 진주성 남강변 걷기 동참하다./264 코스 : 마산시외터미널-진주시외터미널-진주성 촉석루-의암-순의단-진주정-공북루-김시민장군동상-영남포정사-비석거리-북장대-경절사(하공진)-청계서원(정신렬, 정천익)-진주박물관-창렬사-호국사-서장대-서문-천수교-망경동 차돌배기 온밥 점심-경남예술회관-진양교-진성 동생 병문안-진주 개양-마산시외터미널) 거리 시간 인원 : 길사랑 26명, 14,060보, 11.8km, 8.0시간, 특색 : 갑진년 연말 마지막 진주성과 남강변 걷기 역사의 도시 넉넉한 아름다움이었다. 진주성의 역사 눈요기하고 천수교 건너서 남강변 대숲길 에나 길 명품로다. 경남예술문화회관앞 공원에서 임시총회로 신임회장과 총무 지명자의 극구 사의로 현임 회장 총무 그대로 지속하기로 양해했다. 새해 시보제 걷기를 수원지길 1월 2일 동양정에서 지내기로 예고하였다. |
오늘 갑진년 마지막 걷기하는 날
진주성과 남강수변공원길 걷기 하러 나간다.
진주성의 역사적 대첩지로서 긍지 높은 호국의 성지요
남강이 산벽을 돌아 흐르는 회돌이 절벽 아름다운 절경지
영남 예술의 도시 진주에서 고향의 느낌을 아름답게 받는다.
물이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니 언제나 넉넉한 풍광
절경지요 넉넉한 식산이 산출되는 산업도시
최근 우주항공 산업의 연구 배후도시로
남강물처럼 서부경남과 지리산 일대를 품은 관광도시로
또한 향기로운 유림학이 지켜지는 전통도시라
경북 안동과 함께 전통을 추구하는 고향 중간 도시다.
그러기에 난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배움 얻고
이젠 퇴락하여 노파로 지내지만
여기는 우리의 꿈이 자라던곳 추억도 에피소드도 많이 숨은 곳이다.
마산시외터미널에서 진주행 차표 끊고
즐겁게 새실하며 올라온 길 진주시외터미널에서 배낭을 걸쳐멘다.
남강고수부지에서 빙둘러 서서 체조하고
강변길로 촉석문을 들어선다.
특히 촉석문 앞 진주교 사이 옛날 유정장어 집 늘어선 그 자리
지금은 발굴 개발하여 진주외성지로서 공원을 조성해 두었다.
옛날 진주민란과 형평운동 등은 진주사람들이 정부실정에 매달리고
불의를 못견디는 국민임을 우리는 피로서 다짐해야한다.
의암 절벽 어지러운에 조심조심 돌계단 올라와
촉석루 신발 벗고 난간루각에 올라가 보려다가
다들 신발벗기 싫다고 바로 공원 계단을 올라가
임진란중 최고의 3대 격전지 중 하나인 진주성대첩
그때 진주성을 지키다가 병력수가 절대 부족하여
모두 전사하니 그들은 관군과 순수한 시민들이었기에
그들의 이름도 모르게 순절하였기에
그 충절을 기려 만든 제단이 바로 순의제단이다.
그때 남부여대하여 돌맹이를 앞치마에 나르고
물을 끓여 기어오르는 병사에게 붓고
성내 군사수를 늘려 보이고자 줄을 지어 춤을 추고
결국 패망하여 삼장사는 수장되고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의암에서 왜장과 함께 익사하니
이런 모든 충절사가 진주의 매력이요 혼백이다.
그 앞에서 오늘 참여한 회원들 기념사진 찍었다.
여러번 왔어도 순의제단 오르기는 처음이라는 사람이 많다.
다음은 제단에서 내려가 진양성터를 돌면서
먼저 의기사 등을 맞댄 쌍충비각을 들어가 본다.
이 비의 주인공은 고성인으로 칠원제씨의 숙질로
구산면 다구리에 있는 제말 장군 묘의 제말과
그의 조카 제홍록 장군의 충절비각이다.
여기 진주성싸움에 진주 목사는 물론 인근 지역 장수들이 몰려들어
진주가 빼앗기면 호남 곡창지가 뚷린다고
영호남 관군은 물론 수많은 의병들과 승병들까지 합세하여
진양성내 시민들까지 방어전뱅 무기를 만들었고
왜군의 주력 공격선을 몇차례나 막아내며 전 진주시민이 지켜냈으나
밤낮 기습공격하는 왜병에 한쪽으로 집중공격하여 무너뜨리는 전략에 패망하니
성난 왜군들의 도륙과 만행은 결국 목숨바쳐 지키다가 함락되니
이후 전라도 지역까지 왜군들이 다 차지하고 말았다.
그당시 진주성안과 성밖은 차이가 많아
성안 사람들이 공북루안에 들어와
주변 아늑한 양지마을 남성동은 성내동이요
집이 성안에 빽빽하게 살아나갔고
그래서 우물도 있어서 성아네 물마름이 없이
성내생활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었고
공북루 안쪽에는 성을 막아 성터는 남았으나.
그들은 오래 버티지못하였고
당시 문관이었던 김시민 진주목사는
원래 진천군 선비였으나 진주목사 시절에
첫 국군을 승전보를 알렸던 육군 전투로 알려져있었고
그의 전투지인 중영을 다시 짓고
충무공 김시민 진주목사상을 세워서 칭송하고있다.
언덕길 올라가 영남포정사 앞 장소가 옛 도청 정문이다.
삼지창 세우고 수문장 두사람 사진 찍는짝지노릇 하고 있다.
영남포정사 대문을 지나면 언덕 위에 선화당이 있어야할 자리에
진주성내에 산재해있던 비석들을 모아 비석거리를 만들었다.
역대 수많은 진주목민관들의 선정사가 줄지어 섰다.
이미 다 풍화에 글씨가 사라진 사암비석들이 허무하다.
그속에 우리 선조도 있었으면 하지만 성씨가 밝혀지지 않으니
전면 비명만 읽어가다가 한문으로 해석이 어려워지면 중단한다.
다시 조금더 오르면 북쪽을 두루 살펴보는 전망대 북장대가 있다.
진주시내가 훤히 다 굽어보인다.
바로 장대 앞쪽에 있는 사당이 진양하씨 시조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이다.
사당에 드니 유방백세란 큰 글씨가 시조의 얼 백세대까지 그 향기 이어 가란다.
또 이어서 곁에는 청계서원이 있다.
진주를 관향으로하는 성씨중 대성인 진양정씨 파조 은열공 정신열과
사위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를 파종 재배 확장하여
우리 백성의 의복을 개선했던 정천익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이곳 역시 조상의 얼이 오래오래 전하라고 큰글씨 비문 '유방백세'다.
진양정씨 여러 파중에서 가장 자손이 번성한 종파다.
눈을 아래로 보면 진주국립박물관이 내려다 보인다.
원래 성안은 모두 성내 주민들의 거류지였기에 남성동이
성밖에는 본성동이 성아래에는 인사동 고문화거리가 있었던 지명이다.
그곳에 감싸안은 진주박물관이 찾는이들을 쉽게 주차하고 출입이 어려워
강건너 진주선 철로 철거지로 이전한다는 계획으로
사람들이 한번 가본 후 방문객이 뜸해 진다는 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박물관 기와지붕만 내려다보고 스치고 지났다.
북쪽산정을따라 진주성터에는 임진왜란때 우리 조선군의 대포인
전자총통, 지자총통이 성아래를 향해 설치되어 당시 우리 과학무기를 설명하고 있다.
무딘 쇠덩이 같지만 5백년전의 우리 선조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 대포와 자주포 탱크가 세계적 명품이 된것은
바로 우리선조의 발명정신이 이어온 것이다.
성벽을 따라돌면 창렬사와 호국사로 내려가지만
우리는 언덕을 올라 쉼터에서 첫 주유소를 열고
가져온 간식파티가 열리니 입이 즐겁더라.
이어서 진주성 서쪽 장대에 오른다.
진양호로부터 내려오는 물길이 산벽을 휘돌아
서장대 절벽에 부닺히듯 빤히 내려온다.
여기는 천애절벽으로 기어 오를 수 없는 명당 전망대로
강건너에서 몰려오는 왜병들을 잘 관측할 수 있는 좋은 지휘소다.
지금도 그때 장군기가 펄럭인다.
건너편 산은 망경봉으로 목사가 북쪽 임금을 향해 망배드린 장소요
강벽아래 하동으로 향하는 도로가 벽을 타고 간다.
강을 가로 건너는 천수교가 평거신안에서 강건너 망경 칠암벌로 이어진다.
우리가 다음 걸을 길이 강건너 강변길로 강을 따라 내려가며 걸을 길이다.
장대에서 북쪽으로 내려다 보면 명석골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남강으로 합류하는데
그 도랑위로 복개도로가 덮혀 보이지 않으나
나불천은 매우 잘 넘치는 하천이어서
진주 시내쪽으로 터지면 완전 시내가 물바다가 되고 만다.
저건너 신안동에 진주교대가 있어서
난 이 벼랑 언덕을 오르내리며 아침저녁 꼭 두번씩 기차통학했었다.
진주역에 내려 학교까지 약 6km 비가오나 눈이오나 개근하며 다녔던 험로다.
서장대 아래에는 호국사 창렬사가 있다.
호국사는 승병의용군을 훈련 거주하는 군령이었고
창렬사는 임진란중 순국한 유명인사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곳이고
순의단은 이름모를 수많은 백성과 시민들의 혼을 제사하는 제단이다.
창렬사는 급경사 계단으로 매년 제향하는 유림노인들이 오르기 어려운 위치로
항상 어려운 장소가 되어 찾는 이들이 드문 장소다.
여기에 진주성 싸움 삼장사인 김시민 장군과 최경희 황진 장군을 비롯한
전몰 장병의 위패가 모셔져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다.
진주성의 서쪽문은 주로 호국사를 드나들던 문으로
일반 백성이 절을 찾아기도하기 위해 찾는 길이 후문이다.
여기를 내려가면 나불천이 서장대 아래 절벽을 볼수 있고
그아래 지점에는 옛날 진주 소싸움장으로 개장되었다가
그 장소가 판문동 원형 경기장으로 옮기고 나서
진주유등축제를 위해 유등을 보관 제작 관리하는 공원으로
천수교아래에 보관하고 있으나 규모가 커지고 나서
남강고수부지 공원에 집중관리하고 있다.
강변 공원은 옛날 학교다닐적 봄가을 소풍장소 백사장이었는데
지금은 완전 고수부지 체육시설이 활발한 수변공원길이 되었다.
교각은 둥근 아치교로 진주교를 닮은 천수교를 건너서면
옛말로 뱃다리 건너는 망경동 대밭공원이 이어진다.
점심시각이 다가와 미리 예약한 일본식 사태살코기 온밥 식단 주문하니
앞에놓인 아기자기한 작은 접시가 옛날 어릴적 '반주깨미' 소꼽놀이가 생각난다.
반주깨미란 말을 듣고 모두 처음 듣는 말이라고 웃는다.
우리 사투리말이 이리도 예쁘게 들리리라곤 생각못했다.
진주말 '에나'는 지금 고유 진주 향토말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온밥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내가 인형이 된 기분이다.
젊은 내외가 창업한 왜식 메뉴가 모두들 맛보며 좋아한다.
쌀밥을 따스한 고깃국물에 담가놓고 그위에 사태살 편육을 올려
국물에 적셔 먹으니 처음 맛보는 별미다.
작은 크림빵까지 후식으로 내어준다.
젊은 부부를 응원하며 모두 잘 먹었다고 칭찬해 준다.
가장 부담없고 깔끔한 점심이었다. 비용은 1만원 이다.
오후 길은 남강변 모래사장을 걷는 길인데
지금은 모래는 없고 강변 고수부지로 잔디밭길 산책길이다.
강언덕 대밭은 대밭길로 푸르름 시원하게 체온을 낮추고
강건너 진주먕승 1호 촉석루 정말 아름다운 경관이다.
아까 내려갔던 의암은 바위절벽에 너무 작아 구분이 안된다.
천연색으로 솟은 갓가지 솟은 갈대 사람에 흔들리고
우거진 그 모습이 무지개빛을 환시한다.
이는 여름철 분수처럼 노래하고 춤추는듯 진주 명품작이다.
진주교 아래를 통과하여 진주예술회관 경남문화예술회관
독특한 문화외관 기둥 받침이 외국 유적의 장식을 닮은듯 우뚝하고
강건너 뒤벼리 바위절벽은 변함없이 위험하다.
남강수 휘돌아가니 여기는 명당지역
역사의 인연 조각물 나와 관계를 이야기 한다.
한번 나의 의미를 인연으로 해석하게 한다.
'인연' 노래가 콧노래로 재생하려 든다.
벤치에서 쉬며 임시 길사랑 회의를 연다.
지난 총회에서 선임된 회장과 총무가 모두 극구 사양하니
어찌할 것인가 방안을 강구하는데 모두 묵묵부답
결국 또 현 강회장과 백총무에게 짐을 다시 맡긴다.
모두 미안하지만 아무도 그일 사양한다.
너무 잘하는 단체장 뒤에는 아무나 그일 맡질 못한다.
그래서 평소 업무이양을 통해서 후임자를 육성해야하는 임무를 자각한다.
내 몸 어눌해져서 다시 맡을 수 없으니 입을 닫는다.
난 그길로 먼저 나서서 이별하고 감사인사로 향산과 출발했다.
고향으로 가기위해 진양교 강건너 진주시내버스를 타러 떠났다.
진주는 늘 눈에 선한 고향처럼 설레는 도시다.
나를 교육하고 키워온 어머니 같은 고향
남강이 자산처럼 내 몸을 감고 흐른다.
오늘 1만 4천 보 아무 부담없이 즐겁게 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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