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계은선생 행장(溪隱先生 行狀)

황와 2024. 6. 9. 09:43

                    계은선생행장(溪隱先生 行狀)

 

 순군부도만호(巡軍府都萬戶) 사헌부시사(司憲府侍史) 이공(李公)의 휘()는 신() ()는 신지(伸之) 자호(自號)는 계은(溪隱) 사재령(司宰令) 휘 일선(日善)의 아들이요, 휘 소봉(小鳳)의 손자이다.

재령인(載寧人)으로서 밀양(密陽)의 남조음촌(南召音村)에서 세거(世居)하였다.

 공의 천품(天稟)은 강정(剛正)하였고 의리에 밝았다. 소시(少時)에 있어서 금동역로(金洞驛路)에 적치한(適値)한 웅산(熊山 괴신(怪神))을 끌어내어 내려치니 이로부터 요사스런기운이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하니; 그공이 백성들에게서는 매우 컸다.

 공은 평소 몸가짐이 근신(謹愼)하고 언행(言行)이 독실(篤實)하여 집에 들어서는 효()로서 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제()로서 하였다.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상례(喪禮)와 양례(襄禮)를에 제제(諸弟)의 힘을 빌리지 않고홀로 흙을 져 날라 묘분(墓墳)을 짓고 거상(居喪삼년가ᅟᅵᆫ 밤에도 옷근을 풀지않고 죽을 마시면서 상()을 마치니 향리(鄕里) 사람들이 경복(敬服)하였다.

 중산(中山)아래이며 청계(淸溪)위에 재사(齋舍)를 짓고 매월 삭()과 망()에 여러 형제가 성묘(省墓)한 후에 다웅(堂中)에모여서 정화(情話)하면서 돈목(敦睦)하였는데 밤새워 이야기하면서 동숙(同宿)하니 이집을 이름하기를 조계(召溪)라 하였는데 사람들은 효우당(孝友堂)이라 하였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효렴(孝廉)으로 거듭 승진하여 관직(官職)이 도만호(都萬戶) 사헌부시사(司憲府侍史)에 이르렀다. 공민왕조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던 때에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상소(上疏)로서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남재(南在), 윤소종(尹紹宗), 조박(趙璞) 등의 죄상을 극론하였는데 올린 소를 보류한 채 결단을 내리지 않는지라 익일(翌日)에 다시 왕의 배알(拜謁)을 청하니 드디어 준() 등은 원지(遠地)로 유배(流配)하게 되었으며 또 공은 강회백(姜淮伯) 정희(鄭熙)등과 연일 상소를 번갈아가며 올리기를 준() 등은 주살(誅殺)을 청하고 아울러 오사충(吳思忠)도 탄핵(彈劾)하였는데도 왕은 은() 등을 국문하는데 그쳤다 정포은(鄭圃隱)이 우해(遇害)되니 이어서 공도 원지로 유배되면서 졸()하였다.

 아들 의동(義仝)이 관()을 받들어 본가 안산 동향지원(東向之原)에 반장(返葬)하였다.

 뒷날 태종대왕(太宗大王)이 그 효()와 의()를 알고서 특명(特命)으로 정려(旌閭)에 녹()하게 되었으며 아들에게는 비순위산원(備巡衛散員)이란 벼슬을 내렸다.

 삼가 여러 문헌(文獻)을 참고해 보면 선생은 정포은(鄭圃隱)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셨는데 박학(博學)하면서도 힘써 행하고 집안에서는 효도하였으며 조정(朝廷)에 있어서는 충성을 다했으니 가히 오향(吾鄕)의 백세지사표(百世之師表)라 하겠는데 자손이 쇠절(衰絶)하였고 우리 고을에 의사(義士)가 없어서 충효(忠孝)의 백()에게 향화(香火)가 끊겠으니 탄식(歎息)하여 마지 않는다.

 웅산괴신(熊山怪神)이라함은 세속(世俗)에서 말하는 웅산천왕신(熊山天王神)을 말하는 것이다. 강우하읍(江右下邑)의 백성들은 이에 유혹(誘惑)되어 이를 섬겼는데 이는 대구(大邱), 영천(永川), 지방의 풍신(風神)과 같음이리라.그피해는 적지 않았다 중산(中山)이라함은 조음촌의 북곡(北谷)에 있으며 선대의 묘산(墓山)이다. 지금의 덕대산(德大山)을 줄기의 산이다.

 

-------------

1) 밀주지(密州誌)에는 밀양오현중(密陽五賢中) 수반(首班)이다.

2) 밀양에서는 지금도 충효(忠孝)가 겸점(兼全)하니 백세지사(百世之師)라고 칭송하고 있으며 원문 중 자손이 쇠절(衰絶)하였다 함은 공의 4세에서 절손(絶孫)되었음을 말한다.

3) 정려각(旌閭閣)이 있는 묘하동(墓下洞)을 지금도 효자동(孝子洞)이라 부르고 있다.

4) 본행장은 밀양선현록(密陽先賢錄)에서 나왔다.

 

                                                                                         오휴자(五休子)   안신(安㺬)  짓다(撰)

 

[원문]

 

   溪隱先生行狀

 

巡軍府都萬戶司憲府侍史李公諱申字伸之自號溪隱司宰令諱日善之子上將軍諱小鳳之孫也  其先載寧人

순군부도만호사헌부시사이공휘신자신지자호계은사재령휘일선지자상장군휘소봉지손야  기선재령인

居密陽之南音村天稟剛正明於義理少時於金洞驛路適値熊山怪神輒曳而撞破之由是妖氣不敢渡江而

세거밀양지남조음촌천품강정명어의리소시어금동역로적치웅산괴신첩예이당파지유시요기불감도강이

其有功於斯民大矣 公平居謹愼篤行入孝出悌及丁內外喪凡襄禮不與諸弟共辦獨負土營墓居喪三年夜不

재기유공어사민대의 공평거근신독행입효출제급정내외상범양례불여제제공판독부토영묘거상삼년야불

釋衣歠粥終喪鄕里敬服中山下淸溪上築齋舍每月朔望諸兄弟省墓而後會于堂中講穆終好夜話同枕名其堂

석의철죽종상향리경복중산하청계상축재사매월삭망제형제성묘이후회우당중강목종호야화동침명기당

曰召溪人謂之孝友堂 恭愍王朝以孝廉累遷官都萬戶司憲府侍史恭讓王朝公爲司憲府持平與諫官金震陽等

왈조계인위지효우당 공민왕조이효렴누천관도만호사헌부시사공양왕조공위사헌부지평여간관김진양등

上疏極論趙浚鄭道傳南誾南在尹紹宗趙璞等罪狀疏上留中不下翌日伏閤更請遂流浚等于遠地公與姜淮伯

상소극론조준정도전남은남재윤소종조박등죄상소상류중불하익일복합갱청수류준등우원지공여강회백

鄭熙等連日交章請誅浚等並劾吳思忠王命先鞫誾等己而鄭圃隱遇害公遂被流于遠地以卒子義仝奉樞返葬

정희등연일교장청주준등병핵오사충왕명선국은등기이정포은우해공수피류우원지이졸자의동봉추반장

於本家案山東向之原後我太宗大王聞其孝義特命旌閭錄其子義仝爲備巡衛散員 謹按先生遊於圃隱之門博

어본가안산동향지원후아태종대왕문기효의특명정려록기자의동위비순위산원 근안선생유어포은지문박

學而力行居家致其孝在朝盡其忠可謂吾鄕百世之師表而子孫衰絶鄕無義士使忠孝之魄不見香火之奉可勝

학이력행거가치기효재조진기충가위오향백세지사표이자손쇠절향무의사사충효지백불견향화지봉가승

歎哉 熊山怪神俗所謂熊山天王神江右下邑之民遙惑事之如大邱永川之風神焉 其害不細中山在召音村北

탄재 웅산괴신속소위웅산천주신강우하읍지민요혹사지여대구영천지충신언 기해불세중산재조음촌북

谷先代之墓山也

곡선대지묘산야

                                                                                                         五休子    安公   撰

                                                                                                             오휴자     안공 신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