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사재령공 묘표(司宰令公 墓表)

황와 2024. 6. 9. 00:20

사재령공 묘표(司宰令公 墓表)

 

공의 휘는 일선(日善)이고 성은 이씨(李氏)이다 처음에는 월성(月城)을 본관(本貫)으로 하다가 중간에 재령(載寧)으로 쓰게 되었으니, 연유는 고려(高麗) 때 시중 벼슬을 지낸 휘 우칭(禹偁)이 채지(采地)를 하사받아 분봉되었기 때문이다.

공은 밀양 서조음촌(西召音村)의 사제(私第)에서 생장하셨는데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관직(官職)이 사재령(司宰令)에 이르렀으며 세상을 뜨자 조음산(召音山)에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생졸연월일 및 역임한 자급(資級)은 병화(兵火)를 누차 겪어 가첩(家牒)이 남아있지 안아서 자세히 알 길이 없음으로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배위는 영인으로 이씨이며 묘소는 벽암산(霹岩山) 손향(巽向)의 언덕에 모셨다.

공의 가계(家系)를 기술하면 위로 조부(祖父)의 휘는 근인(根仁)이니 영동정(令同正)이시고 아버지의 휘는 소봉(小鳳)이니 보조공신(補祚功臣) 상장군(上將軍)이시며 비()는 공민왕(恭愍王의 따님이시다. 아래로는 6남을 두셨는데 맏은 신()이니 호()는 계은(溪隱)이고 고려말엽에 벼슬을 하여 관직은 지평(持平)에 이르렀고 조선조에 태종의 특명으로 정려(旌閭)를 세웠다.

다음은 술()이니 벼슬이 사정(司正)이시고 다음은 축()이니 생원(生員)이시다. 다음은 오()이니 증참의(贈參議)이고 호는 모은(茅隱)인데 여말(麗末) 두문동(杜門洞) 72() 중 한 분으로 사림(士林)이 사당(祠堂)을 세워 제향(祭享)하고 있다. 다음은 유()인데 처사공(處士公)이고 다음은 인()이다.

지평공(持平公 )은 아들 한 분을 두었으니 휘는 의동(義仝)이고 벼슬은 사직(司直)이시다.

사정공(司正公 )은 아들 한 분을 두었으니 영중(榮中)이고 관직은 감사(監司이시다.

생원공(生員公 )은 아들 두 분을 두었는데 판관(判官) 영숙(永叔)과 봉사(奉事) 영림(永林)이시다. 참의공(參議公 )은 아들 한 분을 두었으니 휘는 개지(介智)이고 증 참판(贈參判)이시다. 처사공(處士公) )은 아들 한 분을 두었으니 승종(丞宗)이시다. 사직공(司直公 휘 의동(義仝)은 강()과 즙(系葺)을 두셨다. 감사공(監司公 榮中)은 장손(長孫), 계손(繼孫)을 두었으니 계손(繼孫)은 군수(郡守)이시다. 판관공(判官公) 휘 영숙(永叔)은 현감 치()部將 ()을 낳았다. 봉사공(奉事公) 휘 영림은 성장(成長) 수장(秀長)을 낳았으니 성장(成長)은 만호(萬戶)였다.

참판공(參判公) 介智)은 부제학(副提學) 맹현(孟賢)과 중현(仲賢) 사인(士人) 숙현(叔賢) 사의(司議) 계현(季賢)을 낳았다. 승종(丞宗)은 아드님으로 흥복(興復)을 두었다. 현손(玄孫) 증손(曾孫) 이하가 수십 여분이 되고 또한 현달(賢達)한 분이 많으나 모두 경향각지(京鄕各地)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오직 생원공(生員公 ) 자손만이 대대로 고토(故土)를 지키며 분묘(墳墓)를 아주 근실(勤實)하게 수호(守護)하고 있었으니 아름다운 자손이라 할만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사재령(司宰令)의 관직은 고려조(高麗朝)에 있어서 청현극선(淸顯極選)의 자리인 만큼 공의 덕업(德業)과 행적(行蹟)은 두드러져서 일컬어 기록할 만한 일이 많이 있을 것이나 수 많은 병화(兵火)와 시대적 변천(變遷)으로 자료의 유실과 세대가 멀어 사적(史蹟)을 징빙(徵憑)할만한 근거가 없어 실로 자손된 사람으로서 천고(千古)의 한()일 따름이다. 그러나 여러 자제분의 빛나는 행검(行檢)에서 살펴보면 예천(醴泉)이 근언이 있음을 징험할 수 있다.

공의 무덤을 모신지 사백~5백년이 흘렀는데도 비문(碑文)을 새기지 못하고 이령묘(李令墓, 配位誌石) 세 글자를 하나의 조각돌에 썼을 뿐이다. 그래서 1804년경 헌(木獻) 상은(尙殷), 광진(光振) 등 후손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 선조의 자손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 묘소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다. 만약 지금 묘소에 빗돌을 세워 표하는 방도를 도모하지 않다가 호겁(浩劫)을 지난 후에 어찌 다시 무덤의 위치를 알려줄 고노(故老)가 있겠는가?”

염려하여 자손 중 상은(尙殷), 상엽(尙曄), 국정(國楨)등이 역사(役事)를 주간하여 빗돌을 구비하고 해진(海振) 세계(世系)와 관벌(官閥) 및 소목(昭穆)을 기록하여 비()를 세우니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교통편이 용이하여 묘소를 참배하는 자손들이 숫자가 늘어났고 산하(山下)에는 추원재(追遠齋)가 있어 산소(山所)를 수호(守護)하는데 일조가 되고 있으나 선조의 위업을 현창(顯暢)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11代孫 광진(光振), 호 반와(盤窩)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