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3 덕암고향집 방문하여 푸성귀 얻고 미연서원, 은행나무 둘러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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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덤한 친구
곁에 있는듯 없는 듯
소리나는 곳에는 언제나 서 있다.
농삿군 되어 고향텃밭에 휴일 보내고
가을철 추수즈음 고구마 캔단다.
무작정 옛 푸성귀 섬유질 나물꺼리
내 대소장 깨끗이 쓸어내린다.
거십꺼리가 있어야 씹을 게 있지
소 여물 먹듯이 반추하는 동물
소띠는 아닌데 소처럼 우직하다.
빙둘러 장원 돌아보고
흰물 나는 무화과 열매 달콤한 맛보고
손수 끓여내온 커피 마시고는
둥근 앉음판 엉덩이에 받히고
고구마줄기 따기 돌입했다.
남은 줄기 걷어 따니
농사 다버리는듯 미안도 하다.
가져간 두 주머니에 담고
가지, 대파, 잔파까지 뽑고
고구마 한박스까지 얹어 준다.
먹음직한 황토빛 밤고구마 고맙다.
또 무우밭 솎아내서 한 주머니
양손 가득 묵직하다.
농삿군 나 때문에 제 일을 못한다.
점심시간 대의삼거리 나와서
순대국밥 맛집 근사한 맛
순대국에 새우젖 정구지 넣고
밥말아 뿌연 국물 뜨는 숫가락
배가 불룩 솟는다.
국물 한 방울까지 다 둘러 마셨다.
기어히 손님이라고 제가 계산한다.
커피 막 잔까지 ........
친구 농장 찾아 잘 먹고 선물 얻고
오늘은 부자다. 고맙게 시리
돌아오며 친구 실어다 주고
대의면 중촌리 도로변에 앉은 미연서원(嵋淵書院)
열고 드니 현판에 미수(眉叟)선생 전서체(篆書軆)
이의정(二宜亭) 표가 난다.
조선중기 남인 거두 미수 허목선생 영정을 모신
이의정과 숭정사(崇正祠) 둘러 사진에 담고
일일이 미연서원 중건기, 원운까지 찍고
뒤뜰 숭정사당에 미수선생 영정이 있다는데
내삼문은 이미 잠겨서 들어갈 수 없다.
담너머로 건물 찍었다.
돌아보며 남인파 우리 석계 갈암 선조를 그려본다.
우리 선조와 함께 뜻을 같이한 선비라
나도 저절로 곧은 충정에 고개숙인다.
더들어오면 못둑아래 동네
5백년 거구 은행나무가 버티고 섰다.
행정목(杏亭木)이라 하니
원래 처외가였던 이곳으로
미수 허목眉叟 許穆)과 죽천 허의竹泉 許懿) 두 형제가 내려와서
어머니를 간호하며 심었던 은행나무 두 그루
큰 나무는 웅목(雄木) 벌어진 둥치
드리워진 가지 장숫대 받침하여 가로로 자라고
작은 나무는 자목(雌木) 은행 떨어져 노랗다.
구린내 물씬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다
특별한 건 미수 선생 향례일엔 은행알을 제수로 낸단다.
아직 우람한 고목 은행나무
약 600년 역사를 하늘 찌르고 섰다.
각주) 미수 허목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우선 그의 당색(黨色)을 들 수 있다. 지연(地緣)으로 보아서는 응당 기호학파여야 하나 서인에 들지 아니하고 남인보다 더 남인다운 활동을 했으며, 스승이 영남 오현의 한 분인 한강(寒岡) 정구(鄭逑)로 그로 인해 퇴계학을 근기(近畿) 지역으로 확산시킨 점이며, 서애(西厓) 종택의 충효당을 비롯해 회연서원 강당, 닭실마을의 청암정 등 영남의 이름난 유적이나 사우에 그의 독특한 전서체의 많은 현판을 남겨 권력으로부터 소외(疏外)되었던 남인을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그가 왜 남인의 길을 택했는지를 밝힌 자료는 보지 못했다.
아버지 허교(許喬, 1567~1632)가 1617년(광해군 9) 거창 현감으로 부임할 때 따라와 임란 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문위(文緯, 1554~1631)와 그의 소개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가르침을 받은 데 비롯된 것으로 생각해 볼 뿐이다.
1628년(인조 6) 인조가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왕으로 추숭(追崇) 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과거를 보지 못하는 정거(停擧) 처분의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대과급제를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정승까지 오른 분이다.
미수가 본격적으로 영남과 인연을 맺은 것은 병자호란이라는 큰 변고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아우 죽천(竹泉) 허의(許懿)가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 있는 사천으로 갔다가 1638년(인조 16) 다시 처의 외가인 의령군 대의면 모의촌(慕義村)으로 옮겼고, 미수 역시 어머니가 있는 그곳에서 1641년(인조19)까지 3년여 머물다가 그 후 창원(감리), 칠원 등지를 전전하다가 1646년(인조 24) 고향 연천으로 돌아갔다.
3년은 짧지 않은 기간이다.
궁벽한 시골 선비들, 특히, 공부에 목말라 했을 그들에게 미수는 가르침을 받을 만한 출중한 유학자였다.
그러나 그때 미수(眉叟)로부터 글을 배웠던 지역 유림의 면면을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다만, 그가 떠난 후에도 추모사업은 이어져 1825년 (순조 25) 미연서원(嵋淵書院)을 세웠다.
그러나 전국의 많은 서원이 훼철될 때 함께 없어졌다.
이때 보관하고 있던 “영정”과 “연보 판각”은 미수의 고향 연천의 은거당으로 옮겼다.
은거당(恩居堂)은 미수의 노년을 위해 숙종이 하사(下賜)한 집으로 당호 은거는 숙종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겠다는 뜻이다.
그 후에도 의령 선비들은 1881년(고종 7) 이석홍(李錫弘)에 의해 고례설(古禮說)에 대한 견해를 그 후손과 후학들이 모여 편찬한 예설 즉 『경례류찬(經禮類纂)』을 간행하고, “산 좋고, 물 좋은 곳” 즉 두 가지가 다 좋은 곳이라는 뜻의 이의정(二宜亭)을 지었으며
1905년(고종 42)에는 허찬(許巑)을 중심으로 『미수기언(眉叟記言)』을 간행하였다.
책 제목 기언은 “말은 군자가 깊이 경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면 반드시 써서 날마다 반성하고 실천에 힘써 왔는데 이렇게 모은 글을 ‘기언(記言)’이라 한다”는 문집의 서문에서 따왔다고 한다.
목판(869매, 경남유형문화재 제182호)은 현재 의령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1689년(숙종 15) 나주(羅州) 미천서원(眉泉書院)에서 왕명으로 발간된 이후 두 번째이다.
전국의 향교나 서원, 재실 등 유학 관련 유적지 답사를 즐기는 이동영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수(眉叟)를 기리는 의령 미연서원을 가려고 하는데 동행하자고 했다. 쾌히 승낙했다.
코로나로 집콕하고 있는 요즘으로서 가장 반가운 소식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은 군데군데 단풍이 남아 있었다.
1920년 중촌리 현재 자리로 옮겨 지은 미연서원은 큰 길가에 있었다.
규모는 크다 할 수 없으나 사당과 강당, 장판각, 고직사 등 여느 서원과 다를 바 없고 경내는 정갈했다.
모친이 머물렀다는 모의촌도 찾았다. 전란으로 힘든 어머니를 보듬어 준 땅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은행나무 3그루를 심었다.
그러나 1그루는 죽고(최근 새로 1그루 심어 3그루로 되돌려 놓았다) 2그루만 남았다.
마을 이름 행정리(杏亭里)는 이 은행나무들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남아 있는 2그루 중 1그루 즉 관리번호 12-11호는 수(雄)나무이고,
지정번호 12-10-4-2, 1그루는 암(雌)나무였다.
미수가 머문 기간을 감안(勘案)한다면 두 그루 모두 380여 년 정도가 합리적이나 수나무(1982년 기준)는 530년, 암나무(1997년 기준) 300년으로 서로 달라 고쳐 적을 필요가 있다.
잎이 떨어져 가지만 앙상한 나무를 보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수나무는 아직 푸른색이 완연하고,
암나무는 노랗게 단풍이 물들어 있었다. 한때 열매를 서원의 제수로 쓰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의 분신으로 봐도 무방할 은행나무를 의령에 남겨두어 미수의 영남에 대한 애정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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