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사의공(휘 季賢) 할아버지

황와 2015. 10. 30. 17:25

사의공(司議公) (휘 계현 季賢) 할아버지


고려말에 함안의 모곡으로 은거하신 모은공(휘 午)의 후손은 함안의 망족(望族)으로서 육백년이 지난 현재 우리 재령이씨의 8할 이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손자이신 사의공(司議公)의 후손은 함안에서 창원·진해를 위시하여 진주와 서부 경남 일원에 주로 세거하여 왔으며 그외 밀양 서가정, 고령 월막, 광양, 남원, 장수 등지에도 분파되어 있다.

사의공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족보와 묘갈명(墓碣銘)이 유일하게 전하여 오고 있을 뿐 생졸년도와 배위의 본관은 미상으로 되어 있다.

이에 필자는 함주지(咸州誌)를 비롯한 고문서와 타 성씨의 족보 내용을 정리하여 사의공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엮어 보았다.

모은공의 아드님은 참판공(휘 개지(介智), 1415∼1487)이시고 진양하씨 목사공(河敬履)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4녀을 낳았다.

네 아드님중 장자(근재공, 휘 맹현(孟賢), 1436∼1487)와 차자(율간공, 휘 중현(仲賢), 1449∼1508)는 1460년(세조 6년)과 1476년(성종 7년)에 각각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의 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다음은 휘가 숙현(叔賢)이고 계자(季子)가 사의공(司議公)이시다.

황해도 관찰사 근재공의 현귀(顯貴)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할아버지이신 모은공은 병조참의에 각각 증직되었다.

사의공의 휘는 계현(季賢)이요 자는 술성(述聖)이다. 공은 생원에 학행 천(薦)으로 장례원 사의(司議)를 제수 받았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독실했으나 불행하게도 셋째형의 면옥(寃獄)에 대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별세하셨다.

공이 돌아가신지 200-300년이 지난 후의 족보와 묘갈명이 공의 유일한 기록이었다.

참판공의 장인이신 성주목사 하경리(河敬履)는 진주의 수곡이 고향으로서 필자의 본가와 가깝다.

목사공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하충(河漴)은 145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역임하였으며, 세 따님은 진주인 유봉(柳봉), 참판공 그리고 밀양인 오곡(梧谷) 손수령(孫壽齡, 오곡공 파조)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참판공의 배위에 대한 행적은 함주지와 밀암 선생 문집의    가세고사(家世故事)편에 기록되어 있다.

목사공의 형은 양정공 하경복(河敬復,1377∼1438)장군으로 함길도 병마절제사 등을 15년간 수행하였기 때문에 노모를 공양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의 특별한 배려로 목사공에게 진주와 가까운 아홉 고을의 수령을 맡겼다.

 

사의공의 외가는 진주 수곡이지만 근재공은 외조부 목사공이 사천군수를 맡을 때인 1436년에 사천의 현아(縣衙)에서 태어나셨다.

참판공의 넷 딸은 성산인 서령(署令) 이의인(李依仁), 선산인 병사(兵使) 김치성(金致誠), 김해인 별시위(別侍衛) 허원질(許元質), 순흥인 안창공(安昌恭)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참판공의 사위들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서령 이의인(李依仁)은 함주지에 상세히 기록된 정무공(靖武公) 이호성(李好誠)(1397∼1467)의 아들이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시집에〈함안 이 서령 의인의 새 집에서 사성의 운에 차하다[咸安李署令依仁新居次師聖]〉란 시가 전하는데, 사성(師聖)은 곧 서령의 큰 처남인 근재공의 자(字)이며 근재공 · 점필재와 함께 가깝게 지낸 것으로 생각된다. 서령의 아들은 만호 이희조(李希祖)인데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며, 다음에 설명할 종제 이순조(李順祖)의 후손들이 함안의 성산. 광평이씨(廣平李氏) 집안이다.

병사 김치성(金致誠)은 아들이 없고 따님 한 분만 두었는데 함주지에 기록된 현감 오석복(吳碩福,1455∼1533)의 처 일선김씨(一善金氏)이니 참판공의 외손녀이자 사의공에게는 생질녀(甥姪女)가 된다.

부인은 무남 독녀로 어릴 때 외롭게 자라서 고창오씨(高敞吳氏) 집으로 시집왔으며 부녀의 법도가 단정하고 제사(祭祀)에 치성을 다하고 시부모를 효도하며 섬겼다.

 또한 평생 털끝만큼이라도 남의 것을 해롭게 한 일이 없었으나 항상 형제가 없는 것을 통탄하여 매월 초에는 정성을 들여 새벽 기도를 올려 나에게 자식을 많이 점지하소서 하며 빌었더니 나이 70세에 아들이 둘에 손자가 30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부인의 아들 오언의(吳彦毅,1494∼1566)는 이퇴계(李滉, 1501∼1570)선생의 숙부 송재공(松齋公) 이우(李堣)의 문하에서 수년간 학문한 후에 전의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곧 송재공의 사위이다.

계사년(1533년) 봄에 퇴계선생이 남쪽 고을을 순방 중에 모곡에 들러 의령공(오석복(吳碩福))을 찾아 뵌 이야기와 퇴계선생의 장인 허진사(許瓚, 1481∼1535)가 의령에서 생신잔치를 했을 때 돌아가는 길에 오현감과 갑자기 시냇가에서 술상을 차린 이야기가 함주지에 실려 있고, 죽재(竹齋) 또는 삼우대(三友臺)에 대한 詩가 퇴계선생 문집에 실려있는데 죽재(竹齋)는 곧 의령공의 호이다.

부인의 증손자는 우리가 잘 아는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에 창의한 죽유(竹牖) 오운(吳澐,1540∼1617)이며, 증손녀가 김해 관천공(휘 大亨)의 배위 오씨이다. 죽유는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부윤의 관직까지 지내고 문집을 남겼으며 관천공 행장을 지은 분이다.

별시위 허원질(許元質)은 후사가 없어 기록이 미비하나, 백형 송와 허원필(許元弼)은 후손이 번성하여 고성과 합천에 많이 살고 있으며,

중형은 의령의 김해허씨 집안을 이룬 예촌 허원보(許元輔,1455∼1507)이며 그 손녀가 퇴계선생의 배위가 됨으로서 퇴계선생의 문집에 그 내용이 많이 실려 있다.

참판공의 넷째 사위는 충순위 안창공(安昌恭)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순흥안씨는 삼대파가 있는데 함안에는 주로 제3파가 많이 살고 있으나 충순위는 제1파 중 직장공파로서 처가인 모곡의 담안 서편에 터를 잡고 살았다. 생졸 연대는 정확히 알수가 없지만 별시위(別侍衛)와 함께 사의공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충순위는 2남 2녀를 두었다. 증손자 죽계(竹溪) 안희(安熹)는 1585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죽계문집이 전하는데 묘갈명은 밀암선생의 증손 진사공(進士公, 휘 宇)이 지었다. 함안의 두릉서원에 향사되었다.

충순위의 두 딸은 참판공의 외손녀로서 각각 이순조(李順祖, 1475∼1534) 이란(李鸞)에게 출가하였다.

이순조는 앞에 언급한 이희조의 종제로서 1503년에 무과에 올라 현감을 하였으며 손자대에는 함주지의 편집에 참여한 황곡(篁谷) 이칭(李偁)를 비롯하여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여 함안의 광평이씨 가문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란(李鸞)의 선대는 원래 수원에 살았으나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조부가 산청군 단성으로 은거한 후 공이 기묘사화(1519년)때에 이곳 산인면 모곡의 수동으로 이거하여 함안의 여주이씨의 일문을 이루었다.

이분의 질녀(姪女)는 우리 가문으로 출가한 후 시모를 섬겨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시모가 노환에 전복이 먹고 싶다고 하자 전복을 구하고자 하는 효성에 하늘이 감탄했는지 담안의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다는 복정(鰒井)의 유래를 전하게 한 주인공이시다.

이상과 같이 우리 재령이씨는 함안에서 흔히 조·이·안(咸安趙氏·載寧李氏·順興安氏)이라 불리워진 3대 대성(大姓)으로 살아왔으며 인척(姻戚) 또한 함안과 진주의 명문가 들이며 선비의 가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