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갈명의 견본 스타일
예> 문경동의 묘갈명(墓碣銘) /이황(李滉) 찬
자 : 흠지(欽之) 국조인물고 권30 문관(文官)
<사망 경위, 쓰는 연유>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16년인 신사년(辛巳年, 1521년 중종 16년) 6월 그믐날 청풍군수(淸風郡守) 문공(文公)이 병으로 군아(郡衙)에서 졸(卒)하였는데, 사자(嗣子)가 없어 아우 몇 명이 관[櫬]을 운반하여 돌아갔다.
한편 공의 사위 의춘(宜春) 허찬(許瓚) 공이 부음을 듣고 달려와 영로(嶺路)에서 상여를 맞이하여 영천(榮川)의 초곡(草谷) 옛 거처에다 빈소(殯所)를 마련하고, 이해 모월에 고을의 동쪽 말암리(末巖里) 석봉(石峯)의 동쪽으로 향한 터에다 장사지냈으니, 임종할 때의 분부를 따라서이다.
얼마 안 되어 공의 집안에는 크고 작은 상사(喪事)와 환란이 서로 잇달아 그 외손(外孫)이 더러는 그곳에서 살기도 하고 더러는 이사하기도 하여 겨를을 내지 못한 일이 많았다.
지난해에 장수희(張壽禧)군이 와서 나 이황(李滉)에게 말하기를, “ 우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지금 거의 40년이 되었지만 묘표(墓表)를 새기지 못하였으니, 책임이 저희 무리에게 있습니다. 감히 묘갈명을 지어 주시기를 청원합니다.” 하였다. 나 이황이 그 말을 훌륭하게 여겨 그의 행장(行狀)을 징험하였더니 문첩(文牒)은 흩어지고 유실되었으며, 옛사람은 살아있는 이가 없으므로 무릇 벼슬한 이력과 행사(行事)를 겨우 전해들을 수 있었으나 상세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중 큰 것을 추린다고 하겠다.
<공의 가계 소개>
공의 휘(諱)는 경동(敬仝)이고, 자(字)는 흠지(欽之)이며, 안동(安東)의 감천(甘泉 ) 사람이다.
조선 개국 초기의 휘 귀(龜)는 정승(政丞)이 되었고, 고조(高祖) 문한영(文漢英)은 내부령(內部令)이며, 증조(曾祖) 문숙기(文淑器)는 보성 감무(寶城監務)이고, 조(祖) 문손관(文孫貫)은 안동 판관(安東判官)인데, 3대가 모두 정과(正科)를 거쳤다. 고(考) 휘 속명(續命)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이다. 비(妣)는 진씨(秦氏)로 강순부 소윤(江順府 少尹) 진유경(秦有經)의 딸이다.
공이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정축년(丁丑年, 1457년 세조 3년) 10월에 태어났으며,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병오년(丙午年, 1486년 성종 17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을묘년(乙卯年, 1495년 연산군 원년) 별시[別擧]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을 떠나 비안 현감(比安縣監)이 되기도 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506년 연산군 12년)에 강원도사(江原都事)가 되었으며,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승진하여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임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508년 중종 3년)에 양산군수(梁山郡守)가 되었는데, 2년 뒤인 경오년(庚午年, 1510년 중종 5년)에는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구(倭寇)를 막는데 공로가 있었다.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다가 임신년(壬申年, 1512년 중종 7년)에 예천군수(醴泉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임기가 만료되고는 몇 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다가 어버이가 늙은 것으로 다시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원하여 청풍군수(淸風郡守)가 되었는데 봄에 부임하여 여름에 졸(卒)하였으니 향년(享年)이 65세이다.
<공의 성품과 공적>
공의 사람 됨됨이는 모습이 보통 사람과는 달라 허심탄회하고 마음이 활달하여 구속됨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의 처신에는 경계를 만들지 않고 거리낌 없는 말과 익살로 일찍이 세무(世務)에는 유념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정(事情)에 어둡다고 여겼으므로, 평생토록 여기에 연좌되어 침체되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글짓기를 잘하였으며 더욱 사부(詞賦)에 능하여 과거를 보는 유생이었을 때는 이르는 곳마다 장중(場中)에서 제일 뛰어났으므로, 그가 지은 것을 후생 (後生)들이 다투어 전습(傳習)하였다. 그리고 문인(文人)이나 묵객(墨客)을 만나면 번번이 함께 시(詩)를 읊었는데, 마음이 맞아 흥취를 발하여 낭낭하게 읊조리 기를 마치 곁에 다른 사람이 없는 듯이 하였으므로, 가끔 어느 한 부분이나 외모만을 가다듬는 자의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지만, 한 시대의 명망이 있는 부류들 또한 함께 서로 화답하며 왕복(往復)하였다.
나 이황이 젊어서 일찍이 공이 집안에서 기거하던 때에 이르러 보았는데, 공이 서적(書籍)과 문방(文房)의 붓과 벼루 등을 반드시 화려하고 좋은 것으로 구경할 만한 것을 많이 쌓아 두었으며, 헌함(軒檻) 밖에는 이름난 꽃과 기이한 풀을 줄지어 심어두고 새벽이면 일어나 곧장 짚신에다 지팡이를 짚고 그 사이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와 책상을 마주하고 하루 종일 즐거워하며, 손님이 오면 술을 내오도록 명하여 두어 순배 지나지 않아 파(罷)하고, 간혹 스스로 술 한 단지[一甌]를 끌어다 손님에게 여러 잔을 권하면서 “나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공(公)은 스스로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진실된 성품이 이와 같았다.
공이 저술한 ≪창계시고(滄溪詩槀)≫ 2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부인 가계와 자식, 외손 소개>
배위(配位)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고(考)는 건공장군(建功將軍) 황태손(黃兌孫)이고, 조부는 훈도(訓導) 황중하(黃仲夏)이며, 증조(曾祖)는 청도군수(淸道郡守) 황전(黃銓)이고, 고조(高祖)는 한성부윤(漢城府尹) 황유정(黃有定)이다.
2녀를 낳아서 맏이는 바로 진사(進士) 허공(許公, 허찬(許瓚))에게, 다음은 생원 장응신(張應臣)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진사의 2남은 진사 허사렴(許士廉)과 허사언(許士彦)이며, 2녀는 공조참판(工曹參判) 이황(李滉) 충의위(忠義衛) 김진(金震)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생원의 3남은 장윤희(張胤禧), 장순희(張順禧), 장수희(張壽禧)이고, 2녀는 울진현령(蔚珍縣令) 김사문(金士文)과 습독(習讀) 이효충(李孝忠)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부인의 사몰 관계>
공이 몰(歿)한 7년 뒤에 황씨(黃氏)가 잇달아 서거(逝去)하여 같은 묘역에 부장(祔葬)하였으며, 측실(側室)에도 딸이 하나 있다. 장군(張君, 장수희)이 그의 조카 장언보(張彦輔) 등 근처에 살고 있는 여러 사람과, 나 이황의 아들 이준(李寯)이 비록 외지(外地)에 살기는 하지만 역시 그 어미의 무덤이 같은 묘역이어서 서로 함께 묘소를 수호하고 속사(俗祀)를 받든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공의 공적 평가 및 안내>
공은 빛나는 재주를 지니고 기개는 문장에 펼쳤도다.
과장(科場)에 나가 노닐 때는 곰의 무리에서 수염을 뽑는 것처럼 쉬웠는데, 늦게 벼슬길에 오른 것은 운명 가지런하지 않았도다. 공의 재질은 넓었지만 세속이 좋아하는 것과는 부합되지 않았도다.
공은 관리로서의 교묘한 재주를 부끄러워하여 가장자리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도다. 명망은 한 시대에 요동쳤지만 지위는 낮은 곳에서 절뚝거렸도다. 지방의 수령에 자주 부임하여 거친 음식으로 여러 차례 속였도다. 오리와 학의 짧고 긴 다리가 모두 적합한데 메추라기와 붕새를 어찌 가릴 것인가?
우리 공의 처세는 빈 배도 부딪치지 않도다. 진실에 맡기고 즐거워하니 그 다른 것을 우려할 겨를이 있겠는가?
등유(鄧攸, 진(晉)나라 등백도(鄧伯道))처럼 아들은 없으나 채옹(蔡邕, 후한(後漢)말기 사람)의 집안처럼 훌륭한 딸을 두었도다 . 많은 외손들 전해지는 경사를 받아들이기에 적당하니, 세속의 명절이 닥칠 때면 감히 수묘(修墓)치 않을 수 있겠는가? 석봉(石峯)의 동쪽 기슭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도다.
비석에다 사실을 새겨서 무궁토록 알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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