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뜰 소식/만사참례기

만당 요양병원에서 동란혼란기 집안대소사 조카들에게 들려주다.

황와 2024. 12. 14. 17:39
24.12.14 동생 입원 요양병원 차도 확인하고 서울의 조카들 만나 동란때 집안 절망적 역사 들려주었다./264            

 

아가위 포기한 열매

 

오늘은 목적의식을 갖고 동생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한다.

전날 환자 동생이 퇴원할 거라고 주사바늘 모두 뽑고 

병실밖에서 집에 돌아가겠다고 투정을 부렸다고 한다.

요인은 말로서 환자에게 성을 돋게 만들었던 모양

약하기 그지없고 예민하기 그지없는 환자에게

평시처럼 이야기 내뱉았다간

도를 넘치는 분노가 폭발하게 마련이다.

나중에 해도될 일을 죽기전에 하고 가라고 조르면 어쩌자는 거냐.

사필귀정이란 일은 반드시 바른 방향으로 돌아간다.

그걸 날더러 다스러 달라고 전달이 왔었다.

세번째 면회차 출발했다.

오늘따라 고속도로 차선이 자꾸더 피로하게 겹쳐져 보인다.

가다가 중단할 수 없어서 억지로 참고 가자니 더 피로하다.

이제 차운전이 부담이 되기 시작한다.

 

12시경 점심시간  병원안 사람들이 식당에 다가 버렸다.

평소대로 면회신청서에 기재하고 

기다리니 직원이 문을 열어준다.

병실에 드니 동생의 침대 위치가 바뀌었다.

오늘은 아무런 줄도 매달리지 않고 

자유로운 몸으로 많이 상쾌해졌다.

수염만 텁수룩하게 자라났다.

다행히 산소 마스크를 떼어 내어도 숨질이 평온하다.

확실히 차도가 있어서 이야기도 잘하고 

등이 가려워해서 등짝에 손을 넣어 긁어 주었다.

피부가 재생하려나 보다 

기쁜 맘이 차도가 있는 모습이다.

여러 이야기 속에 숨겨서

이제 이 병원에서 관리받고 지내는것이 좋다고 권했다.

집에 노는 사람이 아니고 손님을 맞아야하는 사람이 

두가지 일을 하자니 어느한곳도 충실하지 못해 어려워지니 

네가 심심하면 책을 가져와 천천히 읽거나 실내 걷기로 

너무 무료한 생활을 이겨내도록 하라고 타일렀다.

이제 그리 하마고 고개 끄덕인다.

죽도 많이 먹었다고 하고 훨씬 그저께보다는 똑똑해졌다.

찬찬히 군대생활을 물으니 이야기 솔솔 대답한다.

아직 기억력과 어휘력이 잠들지 않았다.

24살에 군대갔다가 26에 제대했는데 

포항해병훈련소에서 배출되어 구룡포해안방위대에 보초서고 

월남파병에 지원하여 다낭기지에서 팔각정 공원 짓는 데서 일하고

한번씩 작전나가다가 1년만에 귀국하여 

진해 해병대 사격장에서 나머지 복무기한 다채우고 제대했단다. 

약 32개월 복무했단다.

 

조금지나니 서울에있는 딸과 창훈이가  아버지 뵈러 왔다.

1급 장애인이라 인도자가 있어야 다닐 수 있기에 

그의 둘째 누이가 데리고 왔다.

지은이는 수학박사로 대학교수로 있는 조칸데 

어제 최서방하고 왔다가 바빠서 먼저 보내고 

오늘 동생데리고 아버지 입원상태 보러 왔다.

첫날 어려웠던 상태를 설명해 주고 

오늘 상황을 보고는 모두 안심한다.

난 그들에게 아버지 어머니의 귀중한 가치를 설명했다.

위인이었던 선조보다 나를 만들어준 어리석은 부모가 

몇십배 백배 더 나에겐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일러주었다.

너희 아버지는  어릴적 4실때 너희 할아버지 26실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33살에 돌아가셨으니 우린 그때 삼남매 고아였었다고 

그리고 눈치밥먹으며 자라면서 꿋꿋하게 살아나 

지금 죽어도 아버지가 남긴 나이를 보태서

부모보다 세 배나 더 길게 살고 있지 안느냐?  

그때 너희들 할아버지는 인민군 보국대에 끌려가서

방어산 전투 전선에 전쟁물자를 등짐으로 져다 나르는 일꾼으로서

어둑한 밤길 잠시 쉬는 사이 도망쳐서 살아왔으나 

당시 생물학전으로 콜레라균에 감염되어 

집에 돌아왔으나 간호할 사람이 없자 

집안의 제일 어른이셨던 너에게는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간호를 전담하고 다른 가족들은 모두 봇짐싸서 피난보낸는데

전쟁이 시들하여 돌아와보니 할아버지가 먼저 석가탄신일에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도 감염되어 20일후에 돌아가시니  5월초하루가 제삿날이었다.

당시 법정 1급 전염병이었기에 바로 매장하지 못하고 

약 보름간 가매장하여 온몸의 물기를 와 살점이 썩토록하여 

그뼈만 간추려 매장하였기에 어린 상주 우리 형제가

삼베 따발이 이고 삼베 상주옷입은 모습에

동네 사람들 지켜보며 불쌍하다고 함께 울어주었다.

집안이 녹아내리는 슬픔으로 너희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아들 6형제 중에 오로지 막내 아들 숙부님만 살고 

10살 15살 어릴적 죽은 아들은 물론

큰아들은 많이 깨어나라고 자신이 가르치는 한문공부 안시키고

신식 개화 공부시킨다고 지수공립심상소학교

새로 생기는 학교를 30리길 통학하며 보냈으니 

바로 우리나라 재벌인 이병철 구인회 조홍제 갑부와 제1회 동기생이다.  

졸업 후 일본에 돈벌어 올 것이라 보냈는데

3년만에 23살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너희 할아버지는 한국동란중 26살에 콜레라로 보냈으니 

그 부모이신 증조할아버지의 심정이 어떠 하였으리오 

그래서 어찌하면 액운이 없어질까? 

괜히 선조의 묘를 이리로 저리로 옮겨보기도 하고

그런중에도 집안 아이들 동네 아이들 사랑방에 모아 한문 가르치며 

동산리 종가 중에서 훈장 학자로 이름나 존경받았으며 

깨끗하고 진실한 자신을 수양하며 향토의 선비로 출입하였고 

당시 일제시대 지식인으로 행정기관에 억울한 일을 대변해 주고 

집안 종인들을 도와 이름난 선비로 수신제가해 오신 양반이셨단다.

그 할배의 곧은 정신이 우리 삼남매에게 표범으로 전해져 

엄격하고 꾸중하셔도 귀여워해 주셨고 

사랑방에 글읽는 소리 그치지 않도록 훈계해주셨다.

그러니 너희 아버지는 배우지 못했지만 군자처럼 떳떳하게 지냈고 

옛날 자전거방 할적에 친구들 모아 술과 노름에 안빠지도록 

붓글씨 연습으로 한문글을 교양으로 익혔고 

그때 친구들과 함께 봉사활동으로 지역사회의 솔선수범할 주제를 정하고 

청소 는 물론 가로수 벚꽃길 조성으로 질매재 표석글씨가 아버지 글씨고 

지금은 벚꽃길로 진주관광지가 되었기에

지난번 두 차례나 진주시장 표창을 받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너희 아버지는 처사보다 더 높은 군자라고 했다.

그러니 너희들은 아버지를 예사로 여기지 말고 

선조를 예사롭게 여기지 말거라 

조카 둘은 이런 이야기 듣기 처음이라며 

모두 감동하며 들어주기에 고맙다고 했다.

이제 너희들이 더욱 잘 되어서 그 이름 드높이고 

우리 집안 학문과 청렴한 전통을 이어가길 주문했다.

오늘 동생 만남은 매우 더 높은 교육의 장이 되었다.

함께 나오며 당장 서울로 올라가야하는 일정에 

건강하게 지내라고  격려하고 보냈다.

 

오는 길도에 누이집에 들렀더니 

또 맛있는 김장하는 날 돼지수육과 김치맛을 보여준다.

점심 대신 맛지게 먹었다.

김장 한 통과 콩 한 병까지 보태 넣어준다.

늘 누이는 내게 주는 맛으로 정을 나눈다.

난 언제나 잘 먹기만 할 뿐이다.

돌아오는 길이 조금 차가 밀려도 

오전에 갈 때보다 피곤한 정도가 덜해서 다행이다.

팔둑에 주사기 꽂은 시퍼런 흉터가 자꾸 눈에 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