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뜰 소식/만사참례기

되내기 고추친구 하정규 구름되어 보내다.

황와 2024. 12. 22. 22:37
24.12.22  창원 상복장례식장  조문하다.
           조문일 : 12.23. 14:00-17:00  
           참례자 : 성득찬, 서재교, 이동춘, 정기환, 정재순, 정민규
           대표헌작 : 성득찬  축문낭독 : 이동춘 

 

 

 

나의 갈 길 친구가 먼저 갔구나.

어느 누가 먼저가도 이젠 아까운 나이는 아닌데

그래도 80고개는 높았던가 보네

아홉 수 잘 넘기는가 싶더니 기어이 찬 섣달 돌아갔구나.

늘 흉소식이 올 때면 언제나 가슴이 찌리해 온다.

같이 산는 마산에서 먼저 알지 못하고

진주 회장에게서 속보 더디게 둘러온다..

7년전 피를 토하고 황천 입구에서 되돌아오더니

친구들 모임에 와서는 싱거운 소리로

친구들 웃음 소리 돋우는 재주

참 따뜻한 순박한 친구였는데

오랜 병환으로 다리에 힘 없고 지팡이 신세로 지내더니

만나면 아무 흔적없이 사라질거라고

오늘 아침 부식사러 나갔다가 넘어져 

가족도 모르게 시민에 발견되어 119 신세졌으나

부산으로 이송했다가  저세상 갔단다.

 

사방통문으로 부고 받고

진성초등 22회 동기 친구들

성득찬,서재교,정기환, 정재순, 정민규, (6 )

창원 상곡장례식장에 모였다.

 

난 집에서 갈적에 치제에 따른 제문을

내 아는 범위에서 준비해 갔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영정사진 얼굴이 빙긋이 웃는다.

마치 천국 간다고 우리를 보고 웃고 있다.

눈가가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에이 불쌍한 친구 !

친구들과 부인 상주들 도열한 다음

성득찬 회장 영전에 꿇어 앉히고

집사 촛불 켜고 향불 피우고

제주 한 잔 부어 놓고

내가 축관이 되어 제문을 읽어내려갔다.

그 내용 듣고 흐느끼는 소리 들린다.

모두 엄숙히 경청하며 그의 인생사 드러내서 알렸다.

 

가족은 부인 박윤임여사와  딸 둘과 사위 둘 

큰딸 외손자 하나 

 

모든 우리 친구들 함께 조문하며 극락왕생 빌어주었다.

개별 부조로 부조함에 넣었다.

친구가 가는 노잣돈 마음으로 전했다.

함께 모여 앉아 저녁식사 대신하며

친구가 가는 길 정으로 배웅했다.

돌아오는 길 내 차로 마산에서 진주로 보냈다.

조심해서 가라고 손흔들었다.

 

 

 

 

[謹弔 故 晉陽河公 禎奎 君 致祭文]

 

 

維 歲次 甲辰11月 己亥 朔 23辛酉 일에,

진주 진성초등학교 22회 동기회장 성득찬은 엎드려 고합니다.

故 居士 晉陽河公 禎奎 친구 靈前에서

아까운 친구를 멀리 보내는 맘

同期를 찢어 보내는 아픔

어찌할 바를 모르겠구료!

 

 

오호 痛哉요 오호 哀哉로다.

그대 河公께서는

아버님  하병관 님과 어머님  남평문씨 사이에서

4男 中 長子로 태어나서

부모님 정성 속에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착하게 자랐고

晉城初等學校 22회를 졸업한 후

班城中學校馬山商高를 나와 商業關聯 일을 하다가

장년엔 輸出自由地域 保稅加工業을 하며

産業現場에서 사업을 열심히 성실히 늘여나갔고

鄕土愛鄕 社會活動에도 적극 참여하여

昌原市 晉城鄕友會 會長으로 수년간 봉사하며

선후배 친교관리로 晉城 愛鄕人의 사기진작에 헌신하여왔고

많은 친교활동으로 人脈管理를 통해서 晉城人의 긍지를 높혀왔고

근년에는 모든 경제활동이 줄어들자 사업을 마감하고

마산동아아파트 管理業體에 참여하여 10여년 활동했었다.

평소 飮酒도 못하면서 많은 우인들과 切親하게 지내왔으나

이 탈나고 나서 지내는 도중 몸이 자꾸 쇠약해지니

활동성이 줄고 온몸이 衰絶하여

出入도 어려운 상태가 되어 지냈었다.

그러나 늘 넉넉한 弄談으로 웃음 주고

따뜻한 말씨로 을 주었던 그런 다정한 친구였소

그대는 늘 집안 걱정은 많았으나 몸은 따르지 않고

형제중 먼저 간 동생도 있었으니

넉넉한 天下 太平人이 되었을 게요.

금곡면 雲門 晉陽河氏 名門矜持를 지켜온 生存者이었소.

故鄕行事에 자주 참여하고 다정한 모습

털털한 아량이 그립구료

 

 

다행이 박윤임 여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2녀의 딸이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고있으니

장남이 선조의 자손을 잇는 일에

自身이 한일이 없다고 自虐自述하며

아무에게도 負擔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晩年 친구들과 잘 만나 즐겁게 노니는가 했더니

무리한 몸에 惡疾 寄生하여

집에만 갇혀 지내다가 갑자기 가니

우리들은 健康 祝壽 빌고 빌었건만

수년간 가족들 간절한 看護에도

그대는 누구나 갈 길 혼자 고집부리며 가셨구려

그간 오랜 지친 간호로 애쓴

부인 박윤임 여사와 아이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난번 得病 후 여윈 몸

두어 차례 본 것이 마지막이었소

인정도 없는 친구들 자주 찾지도 못했으니 미안코 죄송하오,

이제 먼저 가신 부모님과 만나

極樂長天에서 永生하시옵소서

남은 婦人과 자녀 食率들 잘 보살펴 주게나.

 

 

嗚呼 哀慟하도다.

만날 때마다 넉넉한 말로 소탈하게 지원해주고

의 투박한 농담 한마디 한마디마다

모두 박장웃음 웃던 그 모습 어디서 찾을꼬?

다정한 모습, 알뜰한 배려 다시 듣고 볼 수 있으리오,

특히 아픈 몸에도 양복차림 處身을 잃지 않았던 그 姿態

항상 英國紳士처럼 깨끗하고 멋졌는데......

그대 없으니 우리는 성난 사람이 됩니다.

이제 모든 짐 다 내려놓고

편안히 雲仙되어 떠나옵소서!

아아! 哀痛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친구들 엎드려 재배하며 보냅니다.

부디 우리가 따라주는 즐기던 콜라 흠향하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