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국내외여행

안동 영양 석계 할배와 장계향 할매를 만나고 오다.

황와 2020. 11. 7. 23:06

                                         20.11.7 석계선생 내외분 유적 답사 여행하다./264

                                          코스 : 마산역-동명휴게소(순두부 조식)-경당고택-광풍정, 제월대-갈암금양강도소-

                                          월영공원(시비, 월영교, 헛제사밥 점심)-도산서원-두들마을-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주곡고택, 만석군고택, 마을도서관, 녹동고택, 석간고택, 유우당, 석천서당, 석계고택,

                                          석계종택, 정부인 안동장씨유적비, 낙기대- (반환)-창녕(오리탕 석식)-마산역 

                                          거리 시간 인원 : 약 600km, 10시간, 28명 참가

                                          특색 : 창원종친회 선조유적 답사로 숭조의식 고양

                                                  석계선생과 정부인 장계향 할머니에 관련된 유적 답사

                                                  종인들의 생각이 달라짐을 확인했다.

                                                  도산서원 붉은 단풍과 안동호 호수 잔잔

                                                  회장 동생 2 동참, 김해 승호, 진주 용섭, 최의성 내외 동참

 

우리 창원종친회 조상 현장 학습 여행

우뚝한 석계 할배와

그의 스승 경당 선생 외동딸 장계향

빛나는 가계의 인적(人積) 산실

거룩한 여중군자 우리 석계 할매를 만나러

창원종친회 종인들 조상체험하러 나섰다.

여기에 동참하러 진주 종인도, 김해 종인도 참가했다.

새벽부터 나서서 7시 출발점 마산역전에 만났다.

만남의 기쁨과 배움의 기대로 화기애애하다.

사람마다 마스크 쓰니 눈으로 인사한다.

28인의 종족들이 가족이 되어 떠난다.

네 분의 여인들도 함께 동참하니 더욱 밝다.

병돌 국장 내외 찻간 접대에 혼신 다한다.

고속도로 올리자마자

회장 선조의 유덕을 찾아 떠나는 뜻

종친회의 목적 알리고 감사하며

특별히 참여한 김해 승호, 진주 용섭,

내외분 함께한 병옥 누이 내외와 대호, 병돌, 성섭 가족

또 서울과 인천에서 참가한 동생들 둘 소개했다. 

코스 안내는 내게 마이크 돌렸다.

가는 코스 선정 안내 일일이 설명했다.

모두 조용히 듣는 태도 갸륵한 학생들이다.

우리 선조중 가장 이름난 인물들이

석계 할배와 광산김씨, 안동 장계향 할머니 사이에서

7남 3녀 자녀들이 모두 7현자, 7산림으로 추앙받으며

퇴계 학맥을 정통으로 이어간 주류에다가

불천위로 세 분을 탄생하게한 대단한 집안이란 걸

밤새 만든 활자를 키운 안내서로 설명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로

큰 벼슬한 사람을 가장 훌륭한 위인으로 자랑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나라의 정신적 기둥인

충절과 도덕신의에 더 큰 훈육을 표본으로 보였다.

특히 장계향 할머니는 시서예절과 음식까지 전한 업적

경당 선생과 석계조 내외분 모두 대국민계몽 교육자이셨다.   

석계할배 연보 설명하며 생애를 읽고

대학자의 고단한 청빈생활과 잦은 이사로 힘든 생애에도

학문을 계몽하고 도덕 실천 표본을 보였고

장계향 할머니의 시가와 친정 가족들 돌보며

현모양처로서 선비가의 종부로서 봉제사와 접빈객

10남매 양육, 학문 시서화를 꾸준히 연마하신 생애

마지막 유업으로 종가 여인들에게 남긴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이

오늘날 전통음식 재현과 음식문화 창달에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한 코스 정신적 지주 퇴계학의 원소

도산서원 세계문화 유산으로 전인류의 유적이 되었고

두들마을 유적 설명은 현장에서 듣자고 했다. 

모든 종인들 어깨에 힘이 들어감을 느낀다.

개인별 봉가 나누어 입군것질하며

함께한 여인들 잔심부름 친절 고맙다.

 

 

어느듯 동명휴게소에 닿았다.

새벽 출발 아침을 거르고 온 터라

순두부백반으로 따신 조식해결했다.

서로 담소하는 사이

중앙고속도 서안동IC에서 내려 

서안동 서후면 경당고택에 차를 댄다.

조용한 골짜기 입구에 경당종택 표목 섰고

안동장씨 태사공 묘 입구라는 표석도 섰다.

두 차례 먼저 와 본 길이라 낯설지 않다.

집앞 밭에는 잎 떨어진 콩대가 노랗게 그대로 섰다.

고택 들어서니 주인은 없고

순둥이 개만 꼬리 흔들며 반긴다.

경당 장흥효 선생

대단한 퇴계학 종맥을 전해준 대 학자이시다.

그는 퇴계학을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에게서 사사받고

한강 정구 선생에게서 종유하며 정통을 배웠고

역학을 이론적으로 개척하셨으며 

석계선생을 통해서 아들 존재와 갈암으로 이어져

손자 밀암으로 외현손 대산까지 퇴계학맥을 이어지게 한

대단하고 정신적인 스승이신 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큰 고마움은 

우리 석계 시자명자 할배를 제자로 받아 길러주시고

상처한 아픔을 자기의 고명딸 계향을 내어 주신 점

우리 종문을 든든히 있게한 대학자의 종가이다.

아무도 없어서 내가 대강 해설사 노릇했다.

우리에겐 석계 할배를 수련한 외갓집에 왔다고

감사함에 고개 숙이자고 했다. 

이어 수많은 문하생들을 가르친 장소

맑고 밝은 바람이 노는 무위 자연의 명소

광풍정(光風亭)과 높다란 바위 위 제월대(霽月臺)

전에 없던 새로운 비석 경당 장선생 유적비도 섰다.

제월대에 올라보고 나니 눈아래 풍광이 시를 쓴다.

여기 앉아 만추농월(晩秋弄月)을 노래하셨겠지.

우리 석계 할배 내외분을 옆에 끼워 앉아서.....

이어서 이웃에 있는 학봉고택으로 옮겼다.

종가는 벌써 문풍지 바르는 겨울 준비중이다.

종손 김종길씨는 출타 중이고

집안 어른 한 분이 한복 차림으로 간단히 안내하고

기념관으로 가서 경당의 스승으로

임진왜란 있기전 왜국 사신으로 다녀와

왜놈들 미개해서 침입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그 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왜군에 맞서

의병군사를 지휘하고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한

퇴계학 초대 전승자요 선비 대학자였으니

기념관 여기저기에 그 서필 영장, 퇴계 직필, 증거로 남겼다.

고마운 맘 내밀고 다시 갈암 선생 유적을 향해 떠났다.

임하댐아래 임하면 금소리

석계 할배 세째아들 갈암 할배가

이조판서로 활동하시다가

정적에게 몰려 유배를 당하매

진상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잠시 진주 지수 청원리에서 머무르다

고향 영해로 돌아왔으나

이곳 금소로 이거하여 정착하신 마지막 장소

갈암금양강도소에 왔다.

나도 궁금하던 차 처음으로 여기에 왔다.

안동포(安東布)의 고장으로 안동포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주인없는 ㅁ자 검은 기왓집

둘러보아도 모두 잠겨져 있다.

추수 수확물 비닐 덮고 집을 둘러싸고 있다.

이름난 퇴계학맥 유학자 구름처럼 몰려드는 문도들

여기서 그들과 토론하고 훈계한 역사적 장소임을 알렸다.

임금에게 곧은 소리만 하다가 눈총 받고 물러난 명신

우리 남인 학자로서 당시 거유(巨儒)의 댁이다.

할배에게 감사한 마음 고개숙였다.

 

 

오전 마지막 정부인 장씨할머니 시비(詩碑) 보러 간다.

출출한 시각 예약된 중식

안동맛 헛제사밥에 안동간고등어 곁들인 특식

제삿밥 나물에 비벼 탕수국에 돔베기 고기

간고등어 갓 구운 노릇한 맛 맛지게 먹었다.

수변공원에 있는 풍광 시비(詩碑)부터 찾는다.  

안동댐 아래 월영공원에 백암에 새겨 우뚝 섰다.

성인음 열살적에 쓰신 천재적인 동심시(童心詩)다.

성인 그의 목소리 들을 수 없고

그의 얼굴 볼 수 없으나

그의 글을 읽으니 그 얼굴 뵈온 것 같다는 생각

시인은 어릴 때부터 보는 눈이 다르다.

그뒤 후손 중 많은 문인을 배출했으니.

이병각 이문열 ........ 

아름다운 다리 월영교 거닐고

사진에 담겨 행복웃음 남긴다.

 

 

시간을 자꾸 재촉한다.

도산서원 향해 깊은 산골로 간다.

안동댐 물들이 깊은 산골로 파고 들었다.

푸른 물이 오후 볕에 하얗게 밝다.

골짜기 좁은 도로가 차들로 차서 느려진다.

와룡면 산길도로 꼬불거리며 단풍 붉음 토한다.

낙엽 차들이 밟으며 서원입구 주차장에 댄다.

코로나 현상에도 사람들이 많이 온다.

거기서도 이마에 권총 대고 체온부터 뜬다.

단풍빛이 우거지고 길은 환하다.

서원앞 물뜰 앞에 시사단 섬으로 뜨고

양벽에서 무너지는 단풍 적황색 혼합

용처럼 꿈털대는 왕버들 기운

옛날 전국에서 몰려들던 최고 배움터

얼마나 많은 인마가 여기 찾으려고 줄을 섰을까?

지금은 세계의 문화사를 잇는 문화유산 유적

먼저 자그마한 퇴계서당부터 찾는다.

그곳이 당시 실정에 맞는 원래 장소다.

삼칸 작은 초당집에 스승 앉고

마루에 빙둘러 제자들 앉고

여름 무더위에 제자들 위해 바람 올라오는 평상도 멋지다.

옆에는 제자들 기숙방 가까이 두고

제자들 글읽는 소리 낭랑히 들었으리.

도산서원 글씨 한석봉 글씨체

훈장 복장 안내자 갓 도포 쓴 사람

옛풍을 재현하며 관광객을 맞는다.

안동을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이유

이곳이 그 근원지다.

아직도 퇴계는 살아서 세상을 교육한다.

그때 여기 물바다가 올 거라 예견했을까?

도산아래 폭 싸여진 골짜기

정면 남쪽에는 파란 강물

좌우 청백룡맥에는 단풍빛 우거지고

참 잘 온 여행지 퇴계 향기 맡고 간다. 

성학10도 병풍지 향산은 하나 샀단다. 

 

 

이제 영양 석보로 장계향 할머니를 찾아 출발한다.

석보 두들마을은 석계 할배가 고향 영해 나랏골을 떠나

처음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신 신착지다.

병자호란 후 석계 선생은 하시던 벼슬을 모두 버리고

낙향하여 정착할 곳을 찾아 이곳으로 이거하니

석천서당을 짓고 문하생을 받아 교육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전국토 핍박해진 터에

이어서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으로 도피하고

삼전도 굴욕으로 오랑캐에 항복하니

국민 민심과 경제는 핍박할대로 더욱 핍박해

연명하기 어려운 때에 가난한 선비 서당 훈장 생활

내외분은 도토리 나무를 심어 도토리로 죽 쑤어

굶주린 이들의 명을 살리신 지식자들의 마땅한 구휼심(救恤心)

노블레스 오블리주 표본이셨다고 조선일보에서 전했다. 

새 터전을 일구며  두들 재령이가 종가를 이끌다가

다행히 네째 항재(恒齋)가 대를 이어 거주하니

여기가 영양 재령이씨 문벌(門閥)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 여기에 옹기종기 펼쳐진 기왓집 고가들

장계향 할머니의 업적을 현창(顯彰)한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과 마을 전체가 유적지다.

차는 구비구비 안동호 임하호를 건너더니

3시 반경 목 빠지게 기다리는 종손 돈(敦)씨 어른 안내로

할머니 교육원 앞에서 먼저 방문기념사진 남겼다.

전시관 돌며 훌륭한 할배 할매 유적 설명하며

특히 여중군자(女中君子)란 칭송에 항상 대비되던 분이

우리 장씨 할머니와 신사임당과의 비교를

시서화 예능과 자녀교육 시집살이 등을 대비하여 

친정 부모를 모시는 생활까지 비슷했으나

그림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 할머니가 앞선다고 평가되었단다. 

그중 여인으로서 성리학과

음식디미방을 종가 여인들에게 남기려고

7순 넘은 나이 떨리는 손으로 필사는 하셨으니  

이는 역사적 인물로 여중군자란 칭어가 맞다고 했다.

146가지 음식 표본상과 전통주 전시되고

특히 장할머니의 딸 묘에서 출토된 옷 원본이 전시되어

옛날 복식연구에 큰 자료가 되었다.   

접빈실에서 종부 조귀분 여사의 쥬스 맛 보고

종군 돈씨의 조상 숭상 사례 이야기

종부가 우리나라 음식대가로 이름났다는 소식에 박수쳤다.

여인들 함께 사진 찍는 것이 기념이다.

돌아가면서 찻간에서 보라고 방송된 CD와 책자까지 주신다.

아픈 몸으로 일일이 설명해 주고 배웅까지 해 주신다.

 

 

두들마을 설명은 내가 인도했다.

맨 먼저 주곡고택 

우계(愚溪)공의 손자 주곡(做谷) 도(櫂)의 ㅁ자 고택 지방민속문화재이고 

만석군 고택은 옛날 만석군 부자집이라고

다음 만나는 두들마을 문화도서관

녹동고가는 전 이문열의 광산문학연구소다. 

대궐처럼 큰 집이 우람하다.

곁에는 정부인 음식디미방과 사료전시관 예전 건물이고

앞쪽에는 항재의 석간(石澗)고택 집안에

향나무가 우뚝하게 높은 보호수다.

항재선생이 여기서 터잡아 석계선생이 떠난 마을을 지켰다. 

곁에 유우당(惟于堂) ㅁ자 집은

조선말 독립투사 이돈호, 독립시인 이병각 생가 

일경의 표적이 된 독립운동가다.    

석천(石川)서당은 석계할배가 영해를 떠나 살며

서당 열어 후손과 문하생을 가르친 마을 학교였다.

동향 계곡을 바라보며 남악(南嶽)초당과 답곡마을을 내려다본다. 

원리 암벽위에 놓인 마을 언덕엔 토토리 나무 자랐고

정부인 장씨 유적비 깔끔하게 섰다.

아래 덤에는 낙기대(樂飢臺) 즉 배고픔을 즐기는 돈대라고

또 세심대(洗心臺)라고 맘을 씻는 곳으로 항재께서 쓴 글씨 남아있다.  

석계고택은 석계 선생과 장계향 할매가 기거하신 생가이고

할배가 안동서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항재따라 와서

홀로 집을 지키시며 여기서 음식디미방을 쓰고 돌아가신 집이다.

옛 가장 오래된 원형그대로 고택이지만

안채와 사랑채 이(二)자형 배치다.  

할배 할매 여든을 넘기며 화복한 노인 향내가 지금도 배인다. 

곁에는 석계종택 석계가계의 종가로

종손 돈씨가 외지에 살다가 귀향하여 지은 종택으로

석계 할배 신주가 사당에 모셔져 있고   

불천위제사를 여기서 모신단다.  

이상으로 해설사 노릇도 마감했다.

 

5시경 출발한다.

자동차에 올라서는 모두 피곤했던지 잠든다.

남은 음식 나누어 먹고

오늘은 술도 팔리지 않는 모양

내려오는 동안 석계종가 방송 보고

깜깜해진 밤길 오로지 기사만 깨어 있다.

내려오다가 창녕에 들러

맛있는 국물 청동오리탕 석식 마치고

서로 수고한 감사 나누며

마산역 헤어짐 악수를 놓았다.

오늘 하루는

우리 종인들이 석계 할배 할매를 만난 고마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