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만남 3/좋은자료실

중국의 24 孝子

황와 2020. 9. 12. 00:11

중국 역사상 이름난 24명의 견본 효행자는 다음과 같다.

일찍이 중국의 이름난 효자 24명을 일러 이십사효(二十四孝)라 불리웠다. 

 

1)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킨 순(舜)임금,

1. 순(舜) 임금

성은 우(), 이름은 중화()이다. 효행이 뛰어나 요()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물려받았다.

   중국에서는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정치가 안정되어 자연재해도 없는 평온한 시절을 요순(堯舜)시대라 한다. ()라는 임금, 그 뒤를 이은 순()이라는 이름의 임금이 이끌었던 시대를 말한다. 그 요순시대의 순() 임금은 효자로서 이름이 높아. 원래 왕가의 후손이었으나 여러 대를 거치며 서민으로 살았던 순()은 본성이 겸허하고 자애로웠으며 특히 부모님께 매우 효성스러워 이웃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의 아버지 고수는 장님이었는데 순의 생모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재혼하여 상()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계모와 상은 순()을 업신여기며 학대하였고 친아버진 고수마저 상을 편애하여 순()을 죽이고자 하였다. ()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조금도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농사일에 전념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였다. 이러한 순()의 효심에 짐승까지도 감동하여 코끼리가긴 코로 밭을 갈며 도와주었고, 하늘의 새들도 발톱으로 김을 매어주었다. ()의 논밭은 해마다 풍년을 이루어 많은 양식을 비축하였고 매번 흉년이 들면 비축미를 풀어서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전국의 백성들이 그의 은덕에 감동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요()임금이 두 딸을 순()에게 시집을 보내고 친아들 대신 순()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천하를 맡겼다. 이것은 모두 그의 효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 탕약을 친히 맛본 유항(劉恆),  

2. 한 문제 (漢文帝)

()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한문제(漢文帝)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름은 항()으로 한나라 고조 유방의 넷째 아들이다. 항이 황제가 되면서 어머니는 자연스레 태후가 되었는데 그는 황제로 등극한 후에 수많은 시종이 있음에도 친히 어머니를 모셨다. 항의 어머니가 중병이 들어 3년이 넘도록 병상에 있었는데 낮에도 정성으로 간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밤에도 깊은 잠을 자지 않고 매번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드리면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 좀더 빨리 일어나 뛰어 갈수 있도록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잠을 잔다. 특히 매번 탕약을 달인후 자신이 먼저 맛을 보지 않고는 어머니께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이토록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자 사람들이 더욱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한문제 시기의 화합의 정치는 이러한 솔선수범의 효도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3) 손가락을 깨무니 마음이 아팠다는 증삼(曾參, 曾子), 

3.  증자(曾子)  

  춘추시대의 유학자. 이름은 참(), 자는 자여(). 공자의 제자. 《대학()》을 저술하여 공자의 인의() 도를

 알리고 공자의 의견으로 《효경()》을 만들었다. 자사()는 그의 제자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의 이야기. 증자는 공자의 만념의 제자로서 공자보다 46세 연하이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서도 유독 효심이 높아 효와 관련한 고사에는 종종 증자가 등장한다. 증자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으나 그는 언제나 모친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으며, 모친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하루는 증자가 산에 나무를 하려 갔는데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다. 증자의 어머니는 아들이 집을 비운데다 손님을 대접할 만한 음식도 없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한참이나 기다리다가 자신과 아들의 혈맥이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고 이빨로 손가락을 깨물어 상처를 내었다. 이때 나무를 하던 증자는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느껴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곧바로 땔감을 매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에 들어서자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가슴이 아팠던 이유를 여쭙자 손가락을 네가 받드시 느끼는 바가 있어 집에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손가락을 깨물어도 멀리서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증자.

 

4) 쌀을 메고 백리를 갔던 중유(仲由,  子路), 

4.   자로(子路)

공자의 제자인 중유(仲由)와 관련이 된 이야기이다. 중유는 자로(子路)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자로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쌀을 살 돈이 없어 매일 매일 명아주나 콩잎 같은 야채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 자로는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 백여리나 떨어진 먼 곳에 나가 고된 일을 하였고 그곳에서 받은 품삯으로 쌀을 사서 짊어지고 집에 돌아왔다. 보모님은 야채 죽 대신에 흰쌀밥을 보시고는 매우 기뻐하였으며, 이러한 부모님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른 자로는 종종 먼 곳에 가서 일을 하여 쌀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훗날 자로는 학자이자 정치가로 크게 성공하여 온갖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었는데 그의 부모님과 함께 살았을 때처럼 명아주나 콩잎 같은 나물을 먹고 백리 밖의 먼 것에서 쌀을 메고 와 봉양할 때가 더욱 그립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5) 부들로 지어진 옷을 입으면서 모친에게 순종한 민손(閔損, 閔子), 

5.  민손(閔損)  

공자의 제자 가운데 민손(閔損)의 이야기이다. 그의 생모는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다시 부인을 맞이했다.

계모는 두 아들만 편애하여 그들에게 입히는 옷은 모두 좋은 옷감에 따뜻한 솜을 넣어 만들어 주었고, 민손에게는 별로 따듯하지 않는 갈대꽃을 넣어 만든 옷을 입혔다. 계모는 아버지 앞에서는 민손을 매우 사랑하는 척 했고, 아버지가 밖에 나가면 민손을 학대하였다. 어느 아버지가 민손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 외출하였다 민손은 얇은 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추위에 몸을 떨다가 아차하는 사이에 수레의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아버지는 민손이 왜 이렇게 추위에 떠는지 의아하여 수레에서 내려 그의 옷을 자세히 살펴보니 갈대꽃을 넣어 만든 얇은 옷이 아니가.

집으로 돌아온 민손의 아버지는 계모를 불러 한바탕 야단을 치고는 당장 쫓아내려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민손은 아버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하였다. 어머니가 계시면 아들 한 명이 추위에 떨면 되지만 만약 어머니를 쫓아내시면 가엾은 세 아들은 모두 추위에 떨게 됩니다. 계모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감동하여 이때부터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민손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6) 사슴의 젖으로 부모를 모신 염자(剡子), 

6.  염(郯) 씨  

주나라의 염()부모님이 사슴의 젓을 먹고 싶다고 하자 사슴으로 분장하고 암사슴의 젓을 구해드렸다는 이야기

 

7) 채색옷을 입고 부모를 즐겁게 한 노래자(老萊子), 

7.  노래자(老萊子)  

()나라 때 성이 래()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알수 없고 사람들은 그를 늙은 래선생님(老萊子) 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나이도 칠십이 넘었는데 아흔 나이에 이른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스스로 늙었다는 말을 해 본적이 없다고 하는데 아직 노부모가 생존해 게시는데 자신이 늙었다는 말을 하게 되면 부모의 연로하심을 더 드러나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특히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오색 색동옷을 입고 어린 아니의 모양으로 분장하여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차림으로 칠십이 넘는 나이에도 부모님 곁에서 재롱을 부렸다. 부모님은 이런 모습을 보고 읏으면서 살 수 있었다.

그는 종종 두 개의 물통을 메고 응접실로 들어온 후 일부러 바닥에 물통을 엎고는 어린아이처럼 엉엉하고 울기도 했는데 이것도 부모님이 깔깔 크게 웃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8) 몸을 팔아 부친을 묻은 동영(董永), 

8.  동영(童永)  

  ()나라 때에 동영(童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가난하고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자른 사람 집에서 일을 하며 근근이 살며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중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집안이 곤궁하여 아버지의 장례마저 치를 수 없어 여기 저기서 돈을 융통해 보려고 하였으나 모두 거절 당하였다.

아버지의 시신이 방치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동영은 자신이 다름 사람에게 종으로 팔려가는 대가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장례를 무사히 마친 후 종노릇하기 위해 주인집으로 가던 길에 홰나무 아래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여인은 동영에게 부부 인연을 맺자고 했다. 동영은 그 자리에서 여인에게 결혼을 약속하고 함께 주인집으로 가서 일을 했다. 주인은 그 여인이 베를 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만일 비단 삼백필을 다 짠다면 몸값을 다 갚은 것으로 간주하여 동영을 자유로이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녀는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여 한달만에 약속한 비단을 모두 짜냈다.

주인은 약속을 지켰고 부부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오던 중 예전에 만났던 홰나무 아래에 다다르자 여인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동영의 효심에 감동한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 동영을 도와주고 돌아간 것이라고 칭송했다.

 

9) 나무에 부모를 조각하여 섬긴 정란(丁蘭), 

9. 정란(丁蘭)

    한나라의 정란(丁蘭)은 부모님의 돌아가시자 살았을 때의 형상을 나무에 조각하여 집안에 모시고 매일 조석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에 지친 부인이 바늘로 조각상을 찌르자 피가 나왔다고 한다.

 

10) 고용일을 하면서 모친을 섬긴 강혁(江革), 

10. 차옹(次翁)      

후한 제국() 임치() 사람. 자는 차옹()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난리를 만나 늙은 어머니를 업고

 피난을 다니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항상 음식을 얻어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강거효()’라 불렀다.

 

11) 모친에게 드리려고 품속에 귤을 감춘 육적(陸績), 

11.  육적(陸積)  

   오나라 여강태수를 지낸 육강()의 아들이며 187년에 출생하였다. 자는 공기()이다. 아버지를 여읜 5촌 조카 육손과 함께 자랐다. 부친 육강이 원술과 대적하게 되자 그의 가족은 오나라 손권에게 피신하였고 육강은 손책과 벌인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육적이 6세 때 원술을 접견하는 자리에 나온 감귤 3개를 가슴에 숨겨나오다가 떨어뜨리게 되었다. 이를 본 원술이 왜 감귤을 숨기느냐고 묻자 육적은 어머니께 드리려고 그랬다고 대답했다. 원술은 어린 소년의 효심에 감복되었고 이를 두고 회귤고사(), 육적회귤()이라는 말이 생겼다.

육적은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효자로 기록에 전한다.

 

12) 모친을 위해 아들을 묻은 곽거(郭巨), 

12.    

후한 하서(西) 융려() 사람. 집안은 가난했지만 효성은 지극했다. 아내와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가 식사 때마다 손자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자 어머니 몫이 줄어든다면서 “아이가 어머니 음식을 나눠먹으니 가난해서 봉양하기가 힘들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못하다.( )”고 하며 땅을 파고 아이를 묻어버리려 했다. 그때 돌 뚜껑이 나와 열어보니 황금 한 솥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13) 부채로 침구를 식히고 체온으로 잠자리를 덥혀준 황향(黃香)

     한나라 때의 아홉 살짜리 효자 황향(黃香)은 여름철에 날씨가 무더워지면 부채질로 아버지 침상 위에 베개와 돗자리를 시원하게 만들어 편안히 주무실 수 있도록 도왔다. 겨울철에는 자신의 몸으로 먼저 아버지의 이불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14) 오디를 골라서 따로 담근 채순(蔡順),

     한나라 때 채순(蔡順)이라는 효자 이야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채순은 나라가 혼란해지고 가뭄이 겹쳐 양식이 바닥나자 하는 수 없이 오디를 주워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런데 채순은 오디를 주울 때 받드시 바구니 두 개를 갖고 나와 따로 두 종류로 나누었다. 길을 지나던 도적떼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유를 물었다. 채순은 잘 익은 까만색 오디를 주우면 한쪽 바구니에 넣고 덜 익은 붉은 오디를 주으면 다른 쪽 바구니에 넣은 것이다. 굳이 왜 그렇게 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잘 익은 열매는 어머니를 드리고 덜 익은 열매는 내가 먹으로고 그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도적들이 감동하여 쌀과 고기를 내오주면서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라고 한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도 효성 앞에서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5) 솟아나는 샘물 속에서 잉어가 뛰어오르게 한 강시(姜詩), 

     한나라의 효자 강시(姜詩)는 싱싱한 잉어회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십수년 동안 강가에 나가서 매일 두 마리의 잉어를 잡아 어머님께 보필했는데  하늘이 감동하여 어느 날 그들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갑자기 샘물이 솟아나더니

매일 두 마리의 잉어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16) 우뢰소리를 들으면 묘소에 가서 운 왕부(王裒), 

     삼국시대 위()나라 왕부(王裒)사람의 어머니는 매우 담력이 약하여 천둥소리를 듣는 것을 무서워하였다. 그래서 매번 천둥이 칠 때면 왕부는 황급히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 곁에 있어 드리면서 어머니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왕부는 비바람이 불고 천둥을 치는 날이면 어머니 묘소로 달려가 어머니 아들이 여기 곁에 있으니 무서워하지 마세요 라면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는 아예 어머니 무덤 곁에 초가집을 짓고 조석으로 문안을 올렸다.

 

17) 시어머니께 젖을 대접한 최산남(崔山南) 부인 당부인(唐夫人 ),

    당()나라 선비 최산남(崔山南)의 부인은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젓을 먹여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해 드렸다는 이야기.

 

18) 얼음 위에 엎드려 잉어를 기다린 왕상(王祥), 

     진나라 왕상(王祥)계모가 신병으로 눕게 되자 싱싱한 잉어를 구하기 위해 한겨울에 강가에 나가 얼음 위에 드러누워 꽁꽁 언 얼음을 녹였던 이야기로 하늘도 감동하여 얼어붙은 얼음이 갈라지며 구멍이 생기더니 잉어 두 마리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19) 모기가 본인의 피를 먹게 한 오맹(吳猛),

     ()나라 때의 효자 오맹(吳猛)은 겨우 8살의 나이였지만 부모가 여름철에 모기에 뜯길 것을 우려하여 자신은 일부러 알몸으로 잠을 자면서 모기밥이 되어 주었다.

 

20) 호랑이를 잡아 부친을 구한 양향(楊香), 

     진나라 양향은 양풍의 딸이다. 나이 열네 살일 때다. 아버지를 따라 논에 벼베려 나갔다가 길가에서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아버지에 달겨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아버지 입을 물었다. 아버지가 위태로움을 알고 달려나가 작은 두 손으로 호랑이 목을 움켜쥐고 목을 조르기 시작하였다. 호랑이가 숨을 쉴수 없게 되자 아버지를 내려놓자 호랑이 머리를 거세게 내려치니 숲속으로 도망갔다. 아버지를 그렇게 구할 수 있었다. 열네 살 소녀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물리친 행위가 아버지를 살려냈으니 효행이 아닐 수 없다.      

 

21) 대나무를 잡고 운 맹종(孟宗),

     오나라 맹종의 어머니는 특히 죽순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해인가 추위가 심한 겨울 어머니께서 죽순을 드시고 싶어하였습니다. 맹종은 아직 추운 겨울이라서 죽순이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머니께 죽순을 구해 드리기 위해 대나무 숲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대나무 숲을 헤매고 다녔지만 죽순을 찾을 수 없자 맹종은 그만 탄식하며 슬퍼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 지금까지 그렇게 찾아 헤매도 보이지 않던 죽순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맹종은 그 죽순을 따서 어머니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맹종의 지극한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하며 칭찬했다는 고사가 있습니다.  맹종죽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22) 대변을 맛보며 걱정한 유검루(庾黔婁),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南朝) (齊)나라 관리였던 유겸루(庾黔婁)는 중병으로 신음하는 부친의 대변을 직접 맛보면서 병세가 호전되는지를 살폈다.

 

23) 관직을 버리고 모친을 찾은 주수창(朱壽昌), 

     ()나라 때의 고관 주수창(朱壽昌)50년 전에 헤어진 어머니를 찾기 위해 벼슬과 재산을 마다하고 산천을 떠돌아 다녔다. 결국 섬서성(陝西省)에서 어머니를 찾았다.

 

24) 모친이 사용하는 요강을 씻은 황정견(黃庭堅).

     송나라 때의 시인이나 관리인 황정견(黃庭堅)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일은 결코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하였다고 한다. 매일 매일 어머니의 변기를 씻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