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만남 3/좋은자료실

퇴계의 가르침

황와 2019. 11. 20. 13:19

1501년(연산군 8년),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경북 안동군 도산)에서 아버지 이식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6개월 후 아버지 이식이 세상을 떠났으며, 어려서는 '서흥'이라 불렀으며, 호는 퇴계(退溪)이다.

12세때, 작은 아버지로 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9세때, 영주 허씨와 결혼하였다.

1524년 23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으며, 27세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4년 33세에 임금이 참석하는 전시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 하였다.

1539년에는 수찬으로 지제교, 검토관을 겸직 하였으며, 첫 부인이 사망했다.

1543년 42세에는 충청도 암행어사를 다녀와 대사성에 올랐으며, 청렴하고 학문이 깊었으므로 중종 임금으로 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마음이 어질고 깨끗했으며, 벼슬을 탐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학자와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둘째 부인을 맞았다.

1545년(44세), 을사사화 때 이기의 모함에 의해 파직되었으나 사실이 아님을 알고 복직되어 사복시정이 되었다.

1548년 단양과 풍기 군수를 지냈다.

1552년 대사성에 다시 올랐다.

1556년 55세에 부제학을 거쳐 공조판서 및 예조판서를 두루 거쳤으며,우찬성을 거쳐 양관 대제학을 끝으로 관직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과 후학들을 위해 힘썼다.  제자들 중 훗날 나라의 기둥이 되어 공을 세운 사람이 삼백 명이 넘는다고 한다.

1570년 12월 6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영의정에 주증되었다.

주자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유명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저서로는 주자서절요 천명도 성학십도 자성록 퇴계서절요 등이 있다.


퇴계의 일화로 유명한 것 중 몇 가지를 들면

글공부 하면서 틈틈히 농사일을 거들었으며,  자기 논을 돌보면서도 항상 남의 논을 보살폈습니다. 

아랫쪽 논이 항상 말라 있는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아랫쪽 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가 양보하여

자기 논을 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너그러운 퇴계 선생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남의 것이라면 콩 한 쪽, 밤 한 톨이라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한양으로 가던 중 하인이 퇴계선생을 위해 남의 밭에서 콩 가지를 꺾어 선생의 밥에 넣은 적이 있었는데, 

끝내 저녁상을 물리고, 하인에게 "콩 가지를 꺽어온 네 정성을 알겠으나, 내가 그 밥을 먹으면 도둑질한 셈이 되지 않겠느냐?" 하며

하인을 나무랐다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밤 나무에 관한 것입니다.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담을 넘어와 선생의 집 마당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떨어진 알밤을 주워서 이웃집 담 너머로 던졌습니다. 

자기 아이들이 남의 밤을 주워서 먹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집 마당에 뻗쳐있는 밤 한톨이라도 남의 것이면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잣나무를 지키는 대감으로  마을 뒷산에 잣나무 숲이 있었는데,

나라 것이었기에 마을의 상민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지키게 되어 있었느데, 

아전이 선생을 몰라보고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에게 상민들이나 하는 일을 맡기게 된것입니다. 

낮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라도 그냥 있지 않을 일인데,  퇴계는 웃기만 했습니다. 

얼마 뒤에 그 노인이 어떤 인물인지 알게된 아전은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면서 퇴계를 찾아와 빌었습니다. 

나라일을 하다보면 그런 실수는 흔히 있는 법인데, 아무 걱정 말라며,

잣나무 숲에서 가까운데 사는데 감독을 좀 하면 어떠냐고 하며 진심으로 아전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단양군수로 온지 열달쯤 지나서, 형이 충청감사로 임명받았으나,

한 집안에서 이렇게 벼슬을 차지하는 것을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나라에서 경상도 풍기 군수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퇴계가 단양을 떠나는 날 많은 백성들이 십리 밖까지 나와 눈물을 흘렸으며,

퇴계의 짐은 조랑말 한 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단양고을 관졸들이 인삼 다발을 짊어지고 따라와서, 관청밭에서 거둔것인데,

오래전부터 관청밭에서 가꾼 것은 사또께서 어디 가실 때 노자로 쓰도록 되어있으니 받아달라고 간청했으나

"관청밭에서 난 물건을 어찌 사또 마음대로 쓸 수 있겠느냐?"며

인삼을 도로 가져 가서 관청 창고에 보관해 두고, 어려운 백성을 돕는데 쓰도록 하였다.


제자가 되려는 두 사람 정구(鄭逑)와 정인홍(鄭仁弘)이라는 선비가 찾아와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하였다.

그날은 매우 더웠으며, 인사를 끝내자 마자 정구가 더워서 도포를 벗겠다고 하였다. 

선생께서 허락하자, 도포를 훌훌 벗고 갓도 벗어 벽에 걸어놓고는 수건으로 땀을 훔쳐냈다.

반면 정인홍은 꼿꼿이 않아 흘러내리는 땀도 닦으려 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이 이것저것 묻자, 정구는 생각나는 대로 꾸밈없이 말했으나,

정인홍은 한 마디 한 마디 가려가며 대답하며, 흠잡히지 않으려 애썼다.  

두 선비를 편히 쉬도록 하고,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젊은이들이 무얼 하는지 몰래 살피도록 하였다. 

서로 딴판이었다.  한 사람은 웃통까지 벗고, 우물가에서 얼굴을 씻었고,

한 사람은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돌부처러럼 단정히 앉아있었다. 

이튿날 아침 두 선비와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정구가 큰절을 올리고, 퇴계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정인홍이 절을 하려하자 퇴계가 손을 내 저으며, "가르칠 게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 하였다. 

다른 제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묻자, 남은 이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며,

날씨가 더우니 옷을 벗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런 걸 숨기지 않았으나,

떠난 이는 하나에서 열까지 별나게 행동하며, 예사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려 했는데,

그런 사람은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훗날 나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못되니

그런 사람에게 왜 애써 글을 가르치냐고 하였다. 

제자들은 그런 것을 따지는 스승이 너무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훗날 퇴계의 짐작은 너무도 정학했다.

정인홍은 다른 스승인 남명을 찾아가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차츰 벼슬이 높아졌으

나쁜 길로 빠져서 나라일보다 제 욕심을 앞세우다가 끝내 큰 일을 저지르고 죄인이 되었다. 

그의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에 모두들 놀랐다.

효심이 지극하여, 살아생전에도 어머니께 효도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삼년동안 살며 묘소를 돌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