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뜰 소식/재령창원회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찾아 쓴 이운룡(李雲龍) 장군의 척록(摭錄)

황와 2019. 1. 25. 12:19

   이운룡(李雲龍) 장군 활동 척록(摭錄) (여러 문헌에서 적출(摘出)해서 기록(記錄))

왜병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자신의 세(勢)가 적과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전선(戰船)과 전구(戰具)를 모두 물에 빠뜨리고 水軍 만여명을 모두 해산시켰다. (선조교서(宣祖敎書)에는 망풍토붕(望風土崩, 소문 듣고 모래처럼 무너지더라고 했음) 그는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과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더불어 남해현(南海縣) 앞바다에 정박하면서 육지로 가서 적을 피하려하였다. 이때에 운룡(雲龍)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께서는 나라에서 막중한 책무를 맡았으니 의리상 당연히 임지에서 순사(殉死)함이 옳습니다. 이곳은 양호(兩湖 즉湖南 湖西)의 목구멍(咽喉)인데 이곳을 적에게 빼앗기면 양호(兩湖)가 위태롭습니다. 이제 우리 군사가 비록 해산하였습니다. 하지마는 아직도 불러 모아 보전하여 지킬 수도 있고 호남수군(湖南水軍)도 원조를 청할 수 있습니다."

하니 원균(元均)이 그 계책(計策)에 따랐다.

그리하여 율포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을 이순신(李舜臣)에게 보내어 원군을 청하게 되었다.

때마침 순신(舜臣)은 모든 포구의 해장(海將)을 앞바다에 모아 놓고서 적이 쳐 들어올 것에 대기하고 있었다. 영남(英男)의 전언을 들은 제장(諸將)은 거개

"우리 영역(領域)을 지키는데도 힘이 모자라겠는데 어느 틈에 타도(他道)로 가리오." 하였다.

 오직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이 의분(義憤)에 북받쳐 울면서 순신(舜臣)에게 권하기를 진격하여 적을 치는데 너와 나의 영역(無彼此道)이 없으며 먼저 적의 선봉을 꺾으면 우리 도(道)도 또한 보전되는 것입니다 하니 순신(舜臣)이 크게 기뻐하였다. 언양현감(彦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자청하여 물길을 앞서 안내(嚮導)하여 진군하게되니 거제앞 바다에서 원균(元均)과 만나게 되었다. 원균(元均)은 이운룡(李雲龍)과 우치적(禹致績)을 선봉으로 삼았으며 옥포(玉浦)에 이르러 왜선 삼십 척을 만났는데 진격하여 대파하였다. 남은 적은 육지로 기어 올라가 도망하니 왜선(倭船)을 모두 불 사르고 돌아왔다.

[出 국조보감 및 선묘 중흥지(國朝寶鑑 及 宣廟 中興誌)]  

순신(舜臣) 휘하(麾下) 모든 장수 중  권준(權俊) 어영담(魚泳潭) 및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 흥양현감(興陽縣監) 배흥립(裵興立)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군관(軍官) 송희립(宋希立) 등은 모두 충용(勇)으로써 잘 싸우기로 순신(舜臣)이 소중이 여겼다.

[出 중흥지(中興誌)]  

갑오(甲午)년 10월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장계(狀啓)하기를 9月 29日부터 10月 初2日까지 장문포(場門浦)에 둔거(屯據)하여 있는 적세(賊勢)와 접전 절차는 이미 장계(狀啓)하온 바이나 초 2날이 샐 무렵에 장내포(場內浦)에 다시 진격하니 둔거(屯據)하고 있는 왜(倭) 등은 청원군(請援軍)이 온 듯 전에 비하여 다소 불어서 무려 백 여명쯤 됨직하였으며 산봉(山峰) 세 곳에 둔거하고 있었는데 기치(旗幟)을 크게 벌려 치고서 무수히 총을 쏘는지라 아군은 강개(慷慨)하여 종일토록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며 접전하였습니다. 신(臣)의 중위장(中衛將)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초 6에 행군하여 복병하고 있은 즉 왜적은 해양에서 자취를 숨기고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지라 날쌘 배로서 돌진하여 1명을 사로잡았으며 선봉장 웅천현감(熊川縣監) 이운룡(李雲龍)은 날쌔게 적진에 쳐들어갔는데 왜(倭)글로 쓴 소판(小版)의 책을 뺐어왔으며 그 책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에게 보내 사옵고 우리 군을 지휘하여 한산진(閑山陣)에 돌아왔으며 새로운 사태에 대비하여 대기하고 있사옵니다.

[出 국조보감(國朝寶鑑)]  

정유(丁酉)年 12月 마제독(麻提督, 명나라 원군)의 접반사(接伴使) 형조판서(刑曹判書) 장운익(張雲翼)의 장계(狀啓)提督聞慶到着한 날에 招臣權慄 都元師가 말하기를 擧事할 때에는 左道水使 李雲龍으로 하여금 戰艦整齊하고 쏘는 軍士를 많이 태우고 복을 야단스럽게 치면서 西生浦 近處橫行하도록 하여야겠다.

[出 國朝寶鑑]

戰亂初倭賊軍士가 줄 곳 巨濟하니 慶尙右水使 元均虞候로 하여금 軍營을 지키게 하고 自身逃亡하여 白川寺(南海)에 이르렀다. 때 마침 우리나라 漁船團을 보고서 賊軍船인 줄 알고는 당황한 나머지 露梁으로 배를 몰았다. 軍營을 지키는 虞候는 이 消息을 듣고서 城中에 있는 老弱者를 빨리 避難하도록 督促하니 混亂하여 죽은히 많았다. 一島將帥所聞만으로 모두 무너졌다.(望風皆潰) 한편 南海縣令 奇孝謹倉庫에 불을 질러 태우고는 도망쳤다.

元均이 연달아 諸城陷落시킴을 듣고서 舟師引率하여 加德島쪽으로 가면서 바라보니 賊船이 바다를 덮은지라 돌이켜 退却하였다. 그러니 우리 諸將도 또한 흩어지기 始作하였으며 元均陸地避身하려 하였다. 이에 그의 先鋒將 玉浦萬戶 李雲龍抗言하기를

사또께서는 나라로부터 莫重任務를 맡았는데 義理로보아 領域內에서 죽은 것이 마땅합니다. 이곳은 兩湖咽喉이니 이곳을 빼앗기면 湖南湖西危險합니다. 이제 우리들은 비록 흩어졌다 할지라도 아직은 다시 불러 모아 保全할 수 있고 또한 湖南水軍來援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이 드디어 (決心하고) 雲龍 등과 더불어 露梁에 머물러 있으며 賊兵이 뒤쫓아 닥아 왔을 무렵에 全羅左水使 李舜臣 右水使 李億祺가 그들의 舟師全羅左水營 앞바다에 모아 놓고 있었다.

雲龍救援要請하고자 單駕로 달려가서 舜臣에게 말하기를

賊兵이 이미 泗川 南海 바다에 가득 차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諸鎭瓦解하였고 水使 元均의 힘으로는 버틸 수 없사오니 하건데 全羅水軍이 앞장서 주기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면 兵禍湖南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純臣 等憮然(어이없는 듯이)히 서로 돌아보았다 하였다.

[出 연려기술(燃黎記述) - 전란사(戰亂史)]  

1. 丁亥年(壬辰亂五年前) 가을에 鹿島(咸鏡道) 屯田(軍人一線을 지키면서 농사짓던 밭)任務하였을 때의 일이다. 八月이 쳐들어 왔는데 木柵으로 둘러치고서 붉은 옷을 입은 先頭에 섰는지라 이 활을 쏘아 의 다리에 命中 시키니 달아나는데 李雲龍과 더불어 뒤쫓아 가서 그들이 포로로 잡아간 六十餘命奪還하였다.

2. 壬辰年慶尙右水使 元均舟師(배와 군사)를 모두 잃어버리고는 사람을 보내어 援軍하거늘 卽時兵을 이끌고 가게 되었는데 玉浦萬戶 李雲龍永登萬戶 禹致績引導하였으며 玉浦에 이르러 처음으로 倭船 三十隻破船시켰다.

3. 甲午年 四月 六日武科別試를 보았는데 試官으로는 (舜臣 自新을 말함)全羅水使 李億祺 忠淸水使 具思稷이며 參試官으로는 長興府使 黃世得 固城縣令 趙凝道 三嘉縣監 高尙顔 熊川縣監 李雲龍이다.

4. 左斤先鋒將 熊川縣監 李雲龍大船 一隻焚滅(불살아 버림)하다.

5. 丙申年三月初四日 午後에 배를 띄워 바로 所斤浦를 거쳐 慶尙右水使營에 이르렀더니 左水使 李雲龍도 들렀는지라 조용히 談話하다가 佐理島 洋中에서 同宿하였다.

6. 初九日(丙子) 저녁에 左水使가 왔기로 特別히 술을 대접하여 보내고 初十日(丁丑) 아침에 左水使를 다시 하여 와서 特別히 술을 대접하여 보내었다.

[出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李舜臣遺廟嶺南 巨濟府에 있다. 統制使 李雲龍이 지은 祠宇. 모든 戰船浦口出發할때는 하지 않음이 없었다.

忠烈祠가 둘 있는데 하나는 統制營 洗兵舘西便에 있다. 宣廟朝 丙午年統制使 李雲龍이 나라의 命令을 받아 建祠한 것이다.

[出 원사록(院祠錄)]  

李雲龍景見이요 武科及第하였다. 壬辰年倭賊討伐으로 統制使拜命하였고 息城君으로 封君받았으며 宣武勳策錄되었으며 贈職으로 兵曹判書가 되었고 琴湖書院享祀하였다.

[出 청도군지(淸道郡誌)]  

李雲龍載寧人이며 武科及第하여 統制使를 지낸 사람이다. 壬辰亂때에 玉浦萬戶로 있었으며 倭賊을 일르키니 嶺南이 먼저 潰滅하였다. 그때에 水使(慶尙右水使) 元均은 배를 버리고 逃亡가려하니 雲龍抗議하여 말하기를

이곳은 卽 兩湖要衝입니다. 이곳이 없어지면 兩湖를 잃습니다. 이제 우리 무리들은 비록 疲弊하였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불러 모으면 保全할 수 있고 湖南 水軍完璧하니 해 올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군을 整齊하고 見乃梁을 막고 끊으면 巨濟 以西를 못 지나게 할 수 있으니 南方의 일은 그만일 것인데 이런 일을 버리고 무엇을 하려 합니까?하니

이 이 말을 따르게 되어 栗浦萬戶 李英男을 보내어 李舜臣을 찾아뵙게 하였더니 果然 軍師를 이끌고 오게 되어 玉浦洋에서 會戰하게 되었다. 이에 賊船 五十隻을 불사르게 되었으며 또 永登洋에서 十余隻을 불사르게 되었다.

얼마 아니 가서 全羅右道水使 李億祺도 또한 와서 合勢 하게 되었다. 六月에는 鎭海을 치게 되었는데 大將은 기와집으로 된 樓船에 앉아 있었으며 돛대에는 수놓은 장막을 둘러치고 四面에서 護衛를 받고 있었는데 번쩍이며 아롱져서 바다까지 비치는 지라 보는 사람의 눈을 眩惑케하였다.

雲龍禹致績을 더불어 督戰하여 그 樓船을 부쉬니 의 무리는 倉黃하여 물에 빠져 죽은없이 많았다. 더욱 히 싸움을 재촉하여 쇠사슬로 적선에 매어서 바다 한가운데로 끌어내어 뒤엎으니 大敗하였다.

七月賊船 數百隻見乃梁을 넘보는데 雲龍先鋒하여 일부러 退却하는 체하여 外洋으로 끌어내어서 合勢하였으니 砲火는 바다를 끓게 하였다. 이렇게 되니 은 크게 섬멸되어 波濤를 붉게 물들었다.宣祖敎書參照

安骨浦에서 싸워 賊船 三十余隻을 부수었다.(兩大海戰戰中 第一激烈하였다 한다.)

이로부터 內洋에 들어오지 못했으며 兩湖하는길은 옹색함이 없었다. 翌年熊川縣監으로 옮겼으며 李舜臣自己任務代身할 사람으로 薦擧하였다. 丙申年慶尙左水使陞進하여 塩浦駐屯하였다. 戊戌年에는 賊 四名을 사로잡아서 第一먼저 秀吉(倭賊本國우두머리)이 이미 죽은 것을 알고서 軍卒整齊하여 돌아가는 倭兵進擊하고서 釜山으로 回兵하였으며 水營復舊하였다. 宣武功臣으로 策錄받고 息城君으로 封君되었으며 贈職으로 兵曹判書가 되었다.

[出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李雲龍景見이오 載寧人이다. 宣廟朝를 섬겼으며 벼슬은 統制使이며 息城君으로 해졌다.

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랐으며 커서는 스승을 따라 힘써 工夫하여 經史에 까지 하였으나 붓을 던지고 武科及第하였으며 丁亥年에는 宣傳官으로 除授되었다. 壬辰亂이 일어났을 때는 玉浦萬戶이었는데 水使 元均屯鎭을 버리고 逃亡가려 하거늘 抗言하기를

은 나라로부터 두터운() 을 입고 있거늘 마땅히 죽기를 盟誓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음으로 지켜 이 땅을 떠나서는 아니 되오. 이는 湖南保障함이오.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湖南이 없습니다. 湖南이 없고서야 어찌 나라를 지탱(支撐)하리까. 이런 일을 아니하고 어디로 가려하오.하니

()이 화내어 말하기를

湖南水軍을 그대가 해오겠는가

이 말하기를

죽을지 언정 辭避하리오마는 나와 李舜臣은 비록 한때 일을 같이 해온 사이오나 栗浦權管 李英男은 오래전부터 서로가 좋아하는 터인 즉 그를 보냄이 좋겠습니다.하였다.

그런데도 은 겁에 질려있었다. 은 홀로(을 떠나서) 永登浦萬戶 禹致績과 같이 巨濟에 들어가서 主守 金俊民과 만나고 三人이 서로 倭賊을 칠 것을 하늘에 盟誓하였다. 玉浦洋에 이르러 을 만나 배五十隻을 불사르니 卽 五月 初七日이었다.

그날 저녁에 大駕播遷하였다는 消息을 듣고는 全軍이 울부짖으며 흩어져버렸다. 이 또다시 도망치려 하는지라 忠義로서 책망하고 남은 軍士를 불러 모았다.

이로써 바다와 陸地를 막아 끊었고 嶺南湖南하는 길이 옹색함이 없었으니 의 힘이 컸다하겠다. 癸巳年(壬辰亂 다음해) 九月體察使 李元翼公이 여러 陣地를 두루 巡察하였을때 李舜臣에게 묻기를

여러 장수에 누가 代身할 수 있을 고하니 舜臣이 말하기를

이미 세운 과 사람됨으로 봐서 오직 李某뿐이 외다하니

體察使가 불러서 만나보시고 慰諭하였으며 狀啓를 올리니 慶尙左水使가 되었다.

辛丑年에는 漢陰 李德馨公嶺南體察할 때 海路에 익숙함으로 幕將으로 삼았으며 事務를 잘 處理하며 바다구석구석의 營壘와 막히고 끊어진 地勢精通함으로 海門主人이 될 만한 人物이라 하였다.

己巳年 二月에는 朝廷에서 息城君으로 했고 九月에는 統制使로 되었는데 在任 三年軍政이 크게 떨쳤다.

은 집안의 武家이었으나 일찍 儒學을 좋아했으며 태어난 모습이 和厚하고 恂恂하였으며 謙遜하고 讓步하며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을 다투거나 잘난 체하지 않았으며 隱然風度가 큰 人材다웠다. 또 어떤 에 다다랐을 때는 神采는 빼어나고 어떤 決定的 時機에는 策略을 세워 奮然히 그의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히 한 便(海門)任務를 맡을 만 하였다. 兩帥(元均李舜臣)를 마음 하게 하였으며 强賊의 사이를 出入하면서 싸울 때마다 이기니 兩帥가 모두 所重히 여겼다. 元均이 처음에는 計策을 들으므로서 軍事치지 아니하였으나 左水使로 가게되니 元한지라 하는더욱 이 컸음을 잘 알았다.

[出 명신록(名臣錄)]  

(漢陰 自身을 말함) 海防狀況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아무것도 일을 해 놓은 것이 없어 寒心하기 그지없었다. 海軍將帥가 많은데도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

統制使가 하는 일도 히 생소하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鯨島에서 出發하여 돌아올 때 일인데 統制使副使와 더불어 中流에서 나를 전송하는데 바람이 불고 波濤가 일어나 배에 탄 사람이 많이 쓸어졌으며 統制使 역시 얼굴빛이 변하고 기운을 잃었었다. 이러한 때에 배는 이것뿐이었고 바람과 파도는 얼마나 오래일지 몰랐다. 이러하니 이 重要任務는 누가 말아야 하겠는 고 이때에 李雲龍이 와서 만나봤는데 氣局大端하고 글을 잘하여 事理를 헤아리며 배를 조종하는 妙理에 익숙하였으니 같이 견주어 比較할만한 人物이 없었다. 故人이 된 統制使(忠武公을 말함)古今島陣에 있을 적에 말하기를(丁酉再亂翌年)

그가 此任(統制使)을 말을 適任者

고 하였는데 그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官職이 아직도 낮다. 그러니 모름지기 이 뜻을 미리 알려서 養成圖謀함이 바람직한 일이다.

[出 한음집(漢陰集)]  

注) 丁酉再亂豫測 못했듯이 當時再浸念慮하지 않을 수 없는 狀況에서 人材를 얻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일면을 엿볼 수 있고 또 息城君爲人漢陰推知할 수 있다 하겠다. 癸巳年(壬辰翌年)에도 舜臣其功其人惟有 李某可屬이라 하였다고 名臣錄外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음을 보아 三十二歲時에 이미 統制使任務遂行할 수 있는 人物임을 認定받았다 하겠으나 그의 官運탄하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있음.  

備邊司에는 下問을 받드는 많은 사람이 있지마는 옳은 人材를 얻지 못하고 있음이 한탄스럽다. 統制使도 이를 至極念慮하고 있다李雲龍를 이어온 武人이며 그의 父君南海縣令을 지냈으니 兩班이며 故鄕에도 門戶가 갖추어져 있다.

今年에 나라에서 보내올 密使行次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이 아첨하여 投書로 헐뜯는 일이나 없을는지? 嘉善(息城君을 말함)하지나 않을는지? 께서는 마음을 어찌 먹고 계시는지

[出 한음집(漢陰集) 中에서 백사(白沙)에게 한 편지 가운데서]  

慶尙左水營版局이 좁아서 물결이 거세어 무너져 버린지 오래이며 復舊하려해도 軍營內에서 헛일이 된다하여 극히 짜증스러워한다. 그러나 이에 對處計策이 없으면 이로 말미암아 반드시 일이 난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將帥를 바꾸거나 더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제는 憂慮되는 일의 징조가 자꾸 생기므로 節次에 구애 받을 것 없이 李雲龍을 빨리 보내어 이를 點檢케하고 來月 一日에는 格軍交替하도록 分付하시고 松雲(西山大師)과 함께 城屋修理하여 덮개를 다시 하도록 하며는 이 사람은 손에 익어있는 일입니다. 雅量에 따라 便宜하게 함이 좋을 듯한데 어떠하신지 諒解바랍니다.

[出 한음집(漢陰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