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 갑진 시승행사 창녕에서 마산까지 달리다./264 코스 : 집-마산터미널-(버스)-창녕터미널-(자전거)-김남식 집(술정)-우무호집-남민영집-계성공굴- 광계마을 고 김종대 고택-김해김종인가(묘소 문의)-장마들-영남들-상대포-동포동-남지대교-칠서공단-청계마을-안기마을-오곡들-광려천변로-봄비가족 면담-옥정삼거리-구슬골-마재고개-내서초-서마산IC-광명촌-마산역-집 거리 시간 : 약25KM, 8시간(제자 친지 만남시간이 길었음) 특색 : 매년초에 행하는 시승행사 무사히 무리없이 마쳤음 재생 기쁨 영산초 제자 2명(김남식, 남민영), 창진회 교우 우무호 집 방문 면담 옛 영산 장마 동료교원 고 김종대 고택 방문 - 묘소 문의했으나 멀어서 성묘 못함 동행 봄비 부부 오래간 만에 조우 면담 |
또 만나기 싫은 신년을 맞았다.
무언가 해야 살아있는 기분이기에
무리한 이벤트를 만든다.
안식구는 계속 반대하다가 결국 남지까지만 갔다가 오란다.
아침 안달하여 먹고 빨리 나가서
자전거부터 먼저 실어 놓고 차표를 탔다.
아마 출발직전에 겨우 탔었다.
눈 감고 자다가 일어나니 창녕터미널에 내리란다.
먼저 찻간에서 창녕의 지인 인사 전화로 확인한다.
아무도 바로받는 사람은 없다.
오늘도 바로 내려가야 할까보다.
그런데 남식이 한테 집에 있단다.
영산제사 부부가 내반이었다.
새집 짓고 만나지 못 해 한번 얼굴이라도 보자고 했다.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34)공원 바로 건너
술정(술정) 이 자기 점포란다.
가니까 기다린다.
얼굴이 거무죽죽 어찌나 맘이 안됐는지
신장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옛 어릴 적 이야기 하는데
그때 학년을 마치면서 모든 아이들에게 써준 붓글씨 글귀
자기는 '성실인' 이었단다.
그걸 벽면에 붙여 두고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몇겹이나 쓰다가
뒤에 붙은 벽지가 두꺼워져서 더 붙이지 못할 때에야 없앴단다.
지금 와서 그걸 액자에 넣을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후회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었다고 실토한다.
당시 밝고 명랑한 아이 그러나 가정이 불행한 상태였다.
밝게 자라준 네가 고맙다고 토닥여 주었다.
제발 좋은 기증자가 나타나서 재생하는 기쁨을 주리라고 기도했다.
다음은 우연히 뛰어 나온 이름 남민영
작은키에 동그란 눈 깜찍하고 예쁜 아이
교사 책상 앞에 앉아 총명한 얼굴 웃음준 아이
그가 난데 없이 나타난다.
서울병원앞에 있다니 기다리라고 했다.
허브차 카페였다.
가서 만나니 얼굴 피색이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리에 지나쳐도 이야기 않으면 모르겠다.
그런데 작은 키는 많이 커져서 보통키로 여전히 예쁘다.
허브차 내어놓고 그간 부곡에서 부산으로
다시 아버지를 따라서 각도로 다니다가
10년전에 창녕에 귀착했단다.
결혼하여 남매를 가진 워킹맘으로
허브차를 배우러 수원까지 대학교를 다닌다니 대견하다.
이제 주체적인 모습으로 사는 걸 보니 감사하다.
선생님이란 가르친 제자가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사는 모습이
가장 돋보이는 제자상이다.
그들은 선생님에게 이름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자성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두 만족스런 지위는 있을 수 없기에
자기 일에 보람과 자긍심을 가지면 그게 성공의 비결이다.
내어준 차가 다 식을 때까지 이야기하고 나왔다.
건강하고 번창하라고 일러주고 떠난다.
다음 또 한 분 우무호 교장님을 챙긴다.
창진회 회원이자 동향 선배다.
포근한 맘씨가 고와 어리냥부리는 선배다.
최근 하지가 불편하여 출입이 되지 않는 노인이다.
먼저 사모님 만나 시원찮은 형님 간호하신다고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방안에서 만나니 얼굴은 변함없는데
하지가 말을 듣지 못해 다리를 만지니 물렁물렁 근력이 없다.
어찌되던지 집안에서 지팡이 짚고라도 걸어야 한다고
그리고 무어든지 잘 잡숫고 힘이 있어야 걸을수 있다고
평범한 진리를 미안할 만큼 이야기 했다.
먼 곳까지 와 준데 정말 고맙단다.
정이란 서로 챙기고 주고 받는 것이 아닌가?
건강한 사람보다 여리고 아픈 사람을 먼저 챙기는 것이 인사다.
여러가지 약선식 내다 놓고 내게 자꾸 권한다.
챙겨 먹다가 도저히 먹을 시간이 없어서 싸 달라고 했다.
외로히 홀로 떨어져 사는 타향
사람이 무척 그리웠는데 내가 찾아준 걸 감사해 한다.
참좋은 선밴데 힘올려 다시 만나자고 하고 떠났다.
창녕읍내 인사는 더 생각나는 사람 있어도 시간에 쫓겨
퇴천을 거쳐 여초마을 지나 계성면 신당마을 지날쯤
이태재 선생이 생각에 전화했으나 선약이 있어서 만나지 못하고
내 초임지 학교 마을인 계창공굴마을을 지나
곧장 고 김종대 교사의 광계마을로 찾아 들었다.
구암 김종대 선생
계성 광계리 해김집성촌 종손으로
나와는 영산에서 4년, 장마에서 2년
6년을 함께 근무한 선배요 존경하는 선비 형님이었다.
학교 있을땐 나의 응원자가 되어주고
동학년을 함께 날 끌고 다니며 2년
내가 승진한 후에 나를 지지해서 교무주임으로 근무한 1년
심심하면 집에 초대해서 함께 식사하고
아이들도 나를 삼촌처럼 따라 주었는데
할멈 먼저 이별하고 혼자 끓여 먹는가 싶더니
결국 치매로 고암요양병원에 갇혀 시달리다가
재작년 코로나로 아무도 방문 안될 때
부고하나 없이 저세상으로 가신 존경하는 형님이셨다.
계창학교에서 퇴직할적에
그의 교직생애를 아크릴패에 새겨 드렸더니
얼마나 기뻐해 주셨는데
그뒤 집에 갈 때마다 그걸 내놓고
자기의 역사 행장을 써 주었다고 고마와했는데.......
고가를 찾으니 옛 그집 회화나무 아래
아직도 대문기둥에 붙은 김종대 문패 살아 계신다.
보통 죽고나면 문패도 떼어내는데
시멘트 기둥에 박아넣어 미장을 한 까닭에
깨어내지 않으면 떼어 낼 수 없다.
철대문 비스듬히 열려서 비끼고 들어가 보니
안채 사칸집 매우 너른 집이고 옛날 사모님이 거쳐하던 곳이고
사랑채는 삼칸집으로 온통 혼자 삐대면서
붓글씨 쓰고 종중사 연구하고
집안 대소사 마을 대소사 어른 되어 지도하고
항상 고혈압과 당뇨로 '머리 아야'를 습관처럼 달고다니며
신선처럼 학자처럼 예인처럼 낚시광으로 또 게이볼선수로
여유로운 생애를 지냈고
구순 장명수로 생을 마감하셨다.
옛정이 고마워 온김에 성묘라도 하고 가려고
마을 장노를 찾아 문의하니 산소가 약 십리 떨어진
장마면 유리에 있다고 하는데
설명으로는 안되고 같이갈 운전자도 없고
나는 자전거로 갔으니 방법이 없어서
다음으로 미루고 떠나며 죄를 지은 맘이다.
아홉 절벽을 가리키면서
구암(九巖)은 자기의 증조부 호였다고 했었다.
자기도 구암(龜巖)으로 할까 했었다.
산줄기가 들판쪽으로 잘라져 절벽을 이루고 있다.
그 산줄기를 최근 고속도로가 지나며
산지앞 들판을 가로질러 지난다.
아직 개통은 안되었지만 함양 - 울산으로 이어진다.
영산에서 사방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장마들판을 지나며 자꾸 유리쪽으로 고개가 돌려진다.
영남수리구역 들판 평야처럼 넓다.
옛날 월령학교 근무할 적에 잘 아는 들판이다.
들판길 관통하여 학암 마을 지나며 꺾여서
월령 입구에서 다시 꺾여 상대포교를 지난다.
여기 우뚝 솟은 정자나무 옛 소풍지
유일한 그늘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이다.
인근 남지 성사 월영 송진 이곳이 고정 소풍지다.
언덕배기 안전한 곳이라 봄소풍은 늘 상대포둑이었다
옛날 월령 아이들이 목욕하러 거기까지 나갔다가
한놈이 빠져 수색하였는데
체육주임이라고 키 큰 나를 내려보내
물 속을 더듬는 중 '물커덩'하는 느낌에 놀라
아이를 건졌는데 결국 시신이었더라
날 더러 그 부모가
"우리 아이 살려내라"고 바지잡고 우는데
결국 나도 같이 울어줄 수밖에 없던 일이 생각난다.
박진로를 만나 동포들을 지나며
주변에 있던 마을과 성당 교회
동포동 네거리 코너 중국집에서 간짜장으로 늦은 점심 때우고
남지대교를 건너며 장강 너른 물결 윤슬 반짝이고
유유히 역사되어 흘러가는 모습 장관이다.
다리 건너 강가에 두암 조방선생비가 우뚝하다.
임진왜란 의병장으로서 7년 전쟁이 끝내자
강건너 우강 창암에는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함안 계내 두암에는 반구정 정자를 지어 두암 조방선생이
강에 배를 띄우고 노니는 선비로서
인근지역 유선들이 어울려 시를 짓고 우국충정을 노래했는데
그속에 우리 6대조 황재 할배도 그 인사 속에 합류했었다.
그래서 황재 할배의 작시 속에는
'합강정' 3수, '유내내포' 1수, '무기연당' 1수가 문집에 남아있다.
동진마을을 지나서 칠서공단 대로를 관통하고
칠서면사무소앞을 지나 큰 도로를 벗어나
안기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마지막 간식 나누며
에너지 채웠다.
이자리는 언제나 내가 올 때마다 쉬는 장소로
씩씩한 보호수 느티나무가 짙은 그늘을 만드는 정자다.
하늘에 달린 까치집이 정겹다.
마지막 쉼터로서 무덥던 외투도 벗어서 뒷등에 끼웠다.
다시 달릴 차례다.
안기마을앞 네거리에서 바로 건너서
회문마을앞을 지나 유원마을 로타리 두개를 돌고
광려천 감도는 들판 둑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칠원 톨게이트 아래 정지하더니
그곳에 큰 공원 운동장이 야간라이트까지 세워 건설중이다.
도랑가 거칠던 로면도 재포장하여 다듬어졌고
자이아파트 단지 도랑가 자전거길을 따라 올라가
호계초 옆 국제아파트를 보다가
가장 날 사랑해 주는 봄비가 생각나서
그 내외를 만나자고 자전거 둘러메고 징검다리 건너서
코오롱단지 2차 앞에서 두 부부 만나
새해 축원 서로 나누니 면담이 인사이더라.
내가 어둡기 전에 집에 가야하기에
권하는 차는 마신 걸로 하고
반가운 사람끼리 만나니 기쁨이더라.
기쁨만한 것은 물질로서는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서 집에까지 부지런히 밟아 마재고개 넘었다.
집에오니 5시경 오늘 하루를 소비했다.
좋은 사람 만나고 운동해서 좋고
아픈 무릎 걱정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아서 좋고
좋은 생각은 좋은 결과를 만들고
좋은 보람을 선물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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