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공(司議公) 계자현자(李季賢) 조(祖)의 네째 아드님이신 처사공(處士公) 전(琠)자 할아버지는 함안의 사림 선비로서 이름나서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에 행적이 올라있는 대단한 선조이셨다. 지금은 처사공 후손들이 함안에 산재하지만 그 수효가 너무 적어 묻혀있으나 참 대단한 학자이신 것을 이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처사공 휘(諱) 전(琠) 묘비명(墓碑銘)
《함주지(咸州誌)》를 살펴보건대, 공은 나이 9세에 부모를 연달아 여의고 상(喪)을 행하기를 오직 삼가했다. 일찍 무예를 업으로 삼고서 무리에서 뛰어났으나 하루는 홀연히 버리고 오로지 자제를 교육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치산(治産)을 업으로 하지 않고, 깊은 산속에 집을 짓고 조금 그윽하고 조용한 곳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집을 옮겼다. 근방의 선비들이 많이 와서 역시 배웠다.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과 형제간의 우애의 돈독함은 천성에서 나왔다. 한 가지 선행과 조그마한 행실을 들으면 비록 자손과 함께 말할 때라도 반드시 꿇어 앉아서 손을 모아 공경하는 뜻을 표했다. 만년에 대산 선조 묘소아래에 살았는데 78세에 돌아가셨다.
간송당(澗松堂) 趙任道(1585-1664)선생이 1639년경에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저술하였는데 그 상권에 함안의 우리 재령이씨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다. 퇴계학파의 여헌 장현광(張顯光) 등에게 배워서 후에 남명학파의 유학자와 자주 종유한바 있는 간송당의 집안은 재령이씨와 혈연관계가 많으며 특히 대산의 참판공 묘소 옆에 모셔져 있는 갈촌공(휘 潚)의 장자(휘 而檀)가 간송당의 사위가 되며 이분의 묘소 앞쪽에 있는 처사공 휘 전(琠)의 사적에 대한 글이 상권이 실려 있었다. 제목은 《李處士事蹟》이다. 그 내용을 서울종친회 사적연구회의 4월 모임에서 문화재전문위원이신 구봉선생(廷燮 종친)이 번역하여 설명한 바 있었는데 이것을 사적회 총무(秉錫)가 정리하여 보았다.
전직 교수인 나익남(羅翼南) 공은 우리 고을의 노성한 선비이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였다.
『우리 스승 故 처사 이선생은 덕을 숨긴 군자인데 살아서는 영화롭지 못했고 죽어서도 일컬어지지 않았다. 사남(四男)을 낳았으나 불행히도 죽어서, 제사를 지낼 그 곳이 없어졌다. 사람의 도리에 어떠하냐? 내 나이 13세 때에 처음으로 문하에서 수업을 했는데, 나에게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여주고 가르쳐주고 길러주어서 은의(恩義)의 깊음이 부모와 같았다. 지금 내가 늙어서 덕을 갚을 길이 없다. 골짜기 난초는 향기를 묻어버리고 바다의 구슬은 광채를 덮어버려, 초목과 같이 썩어 없어지는 것을 내가 차마 보고 있을 수 없다. 듣건대, 그대는 삼강구절(三綱九絶)이 있다고 하니, 그 하나는 우리 선생에 관한 일이다. 감격하여 은혜를 머금고 있으나 말이 덕을 형용하기에 부족하니, 원컨대 그대는 두어줄 문자를 아끼지 말고 그 행적을 거듭 서술하여, 우리 스승으로 하여금 끝내 인몰(湮沒)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노생의 희망이다. 』
내가 듣고 아름답게 여겨 말하였다.
" 공은 섬기는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고금을 통하여 호걸지사는 비록 대중에서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또 반드시 좌우 전후에서 성기(聲氣)가 같은 사람이 있은 후에야 당세에 나타나고, 후세에 아름다운 광채가 전해지는 것이다. 이러므로 제자가 혹 그 스승으로 인해서 입신하기도 하고, 스승도 제자에 의해서 이름이 드러나기도 하니, 이처사의 숨은 덕은 교수공에 힘입어 이름을 높이 드날리겠도다. 내가 다만 두려운 것은 학문이 어둡고 문장의 처리가 미숙하여 글이 세상에 경중이 되기에 부족하여 그 처사공의 행적에 반드시 그윽한 곳을 드러내고 미묘한 것을 밝히지 못하고 도리어 손상이 있게 하니 어찌하겠는가?"
내가 이미 굳이 사양하였으나 나교수의 청이 더욱 견고하여 그 바램을 외롭게 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옛날에 들은 바를 주워 모아서 서술한다.
공의 휘는 전(琠)이요 자는 가고(可沽)이며 성은 이씨인데,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함안군에 이거한 지가 공에게는 4세가 된다. 증 참판(贈參判) 휘 개지(介智)의 손자이며 증 참의(贈參議) 휘 오(午)의 증손이다. 홍치(弘治) 15년 임술년(1502년)에 산익동(山翼洞)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는 무예에 능통하여 개연히 투필(投筆=文을 버리고 무예를 닦음)하는 뜻이 있었으나, 곧바로 스스로 크게 깨닫고 활과 말을 다 팔고 무예를 버리고서 글을 읽었다. 집을 군 서쪽 구석의 시내와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한 곳에 지었는데, 양전비곡(陽田比谷) 주리동(做理洞)이 바로 그곳이다. 공은 성스런 효도와 지극한 천성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부모들이 억울하게 돌아가시고, 은거하여 덕을 닦고 문을 닫아걸고 집안에서 노년을 마쳤다. 털끝만큼도 분수 밖의 뜻은 없고, 자제들을 가르치고 인재를 성취시키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여기니 원근의 학도들이 많이 나아왔으며, 혹 과거에 급제하기도 하고, 혹 무식을 면하기도 하니, 모두 공이 훈계하고 인도한 힘이었다. 공은 가정생활을 조정과 같이 근엄하게 하였으며,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단속함이 한결같이 법도로 해서, 종과 노예를 기르는 것도 감히 시끄럽게 떠들거나 함부로 말하는 자가 없게 하였다. 학문을 장려하는 데 부지런해서 늘 산실(山室)에 있었고, 오직 명절에는 반드시 종가에 나아갔다. 매월 삭망에 재계(齋戒)해서 사당에 참배하였는데, 서로 거리가 수십여 리나 되었으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피하지 않고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제사 때는 전기(前期)하여 외침(外寢)에서 나오셔서 뜰과 마루를 물뿌리고 청소하고, 또 불때는 여자종(婢)과 남자종(僕)으로 하여금 목욕시켜 재숙(齋宿)케 하였다. 제삿날에는 반드시 살아계시는 것처럼 정성을 드려서, 배궤진퇴(拜跪進退: 절하고 꿇어앉고 나아가고 물러남)를 온근상완(溫謹詳緩 :온순하고 삼가하고 자세하고 느리게 함)하게 하고 천관흥부(薦祼興俯 : 제물을 올리고 술을 부어 강신을 청하고 일어나고 엎드림)는 별도의 법칙이 있어서, 일체 살아계시는 것처럼 음식을 권하였다. 차라리 더디게 할지언정 빨리 하지 않고 오래 지내고 갑자기 하지 않아서 너무 예절에 구애되지 아니하여, 부지런함과 노고가 갖추어 지극하고 사랑과 공경이 함께 극진했다. 매우 추운 겨울에도 절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평소에 발자취는 관가(官家)에 드물게 미쳤고 혹 공사(公事)로 부득이 관청에 들어가게 되면 매번 성문 밖에서 말에 내려서 느린(종종)걸음으로 들어갔으며, 혹 관가에서 문안하는 사자(使者)를 보게 되면 반드시 갓을 쓰고 복장을 갖추고 자리를 깔고 대우하기를 매우 공경히 하고, 엄연히 친히 지주(地主=수령)를 보는 것과 같이 하였다. 사람들이 그 오괴(迂恠=세상 물정에 어둡고 괴이함)함을 비웃었으나 공은 조금도 흔들린 바가 없었다. 보통 마음가짐과 행하는 일은 한결같이 정성에서 나왔고, 털끝만큼도 꾸민바가 없고 생각과 태도는 진실하고 순수하여 유항(有恒: 마음이 한결같음이 있는)한 착한 선비였다.
함안과 진주 두 고을에서 공론에 따라서 천거해서 아뢴 것이 두 번이다.
천거한 말에 이르기를 '처사 이모(李某)는 종일토록 사람들과 앉아 있을 적에 일찍이 이익에 관해서는 말한 적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천거하는 글의 큰 요지이다.
비록 조정에서 인용(引用)함을 입지는 못하고 시골에서 노년을 마쳤으나,
그 행의(行義)의 독실함은 한 시대에 믿음을 받은 것을 상상할 만하도다.
공은 본래 함안사람인데 외가의 별장이 진주 정수동(丁樹洞)에 있어 외가쪽을 간혹 왕래하며 거주했으므로 진주 사람도 역시 보고 느껴서 천거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숭정기원 무진년(1628년) 함안후인(咸安後人) 조임도(趙任道)는 삼가 기술한다.
묘비문은 순암 안정복(安鼎福)이 찬(撰) 하였는데 간송당이 지은 이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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