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1/조상사료실

모은(茅隱) 선생 행장(行狀)

황와 2017. 12. 24. 20:58

모은 선생(茅隱 先生) 행장(行狀)

 

 공의 휘()는 오(), 성은 이(), 본관은 재령(載寧)이며, 호는 모은(茅隱)이니 上將軍 소봉(小鳳)의 손자이고, 종부령(宗簿令) 일선(日善)의 아들이며, 유일(遺逸)로 벼슬한 지평(持平) ()의 아우이다.

고려 공양왕 때에 성균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는데, 이때 고려의 국운이 장차 끝나려 할 제, 백형(伯兄) 지평공(持平公)이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과 더불어 상소(上疏)하여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남임(南任) 윤소종(尹紹宗) 조박(趙璞) 등의 죄를 남김없이 진술하여 조준(趙浚)을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게 하고, 또 강회백(姜淮伯) 정빙(鄭憑) 등과 더불어 날마다 장주(章奏)를 번갈아 올려서 조준(趙浚)등을 목 베기를 청하였으며, 오사충(吳思忠)까지 탄핵(彈劾)하여 영주(英主)를 섬겨 공명(功名)을 세우려는 세력을 힘써 없애기를 기필했으나, 조금 후에 정포은(鄭圃隱)이 살해를 당하고, 지평공(持平公)은 먼 지방에 귀양 가는 도중(途中)에서 별세하였다.

 공()은 나라의 일이 날로 잘못된 것을 보고는 마침내 여러 현인(賢人)들과 더불어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신왕조(新王朝)에 신하가 되지 않는 의리를 영구히 품고 있다가 그 후에 벼슬을 내놓고 남쪽으로 와서 숨었다.

 이보다 먼저 판도판서(版圖判書) 홍재(洪載)공이 벼슬을 버리고 삼가현(三嘉縣)의 대평리(大坪里)에 돌아와 숨고는, 자기의 칭호를 만은(晩隱)이라 하고, 그 거주지의 명칭을 두심동(杜心洞)이라 하면서 세상 사람과 교제를 끊었는데, ()도 또한 함안군(咸安郡)의 모곡(茅谷)에 숨어 살면서 공조전서(工曹典書) 조열(趙悅)과 더불어 두심동에 서로 왕래하면서 시사(時事)를 근심하고 있었다. 후에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끊어지니 서로 운구(雲衢)에 모여서 위문하고는 이내 슬픈 시가(詩歌)를 지어 읊었다. ()이 일찍이 지은 시()가 있으니 그 시는 이러하다.

 

喬木如存可假花  교목도 있기만 하면 꽃이 필 수 있으니,

  교목여존가가화

王春惟到暮山家  해 저문 산가(山家)에도 봄이 찾아 왔구나.

  왕춘유도모산가

悲歌哀詠相隨地  슬픈 시가(詩歌) 읊으면서 서로 따르는 이 자리,

  비가애영상수지

恥向長安再着紗  서울 가서 다시 벼슬하기는 아예 싫어졌네.

  치향장안재착사

 

또 지은 시가 있으니 그 시는 이러하였다.

 

滄溟夜夜迎孤月  밤마다 바다에서 떠오른 외로운 달을 맞이하고,

  창명야야영고월

杞鞠年年闢小畦  해마다 구기자 국화 심을 작은 밭을 개간하네.

  기국년년벽소휴

回首未逢堯舜世  끝내 돌아봐도 요순(堯舜) 시대는 만날 수 없으니,

  회수미봉요순세 

甘心不讓牧樵齊  소먹이 나무꾼 동무됨을 만족하게 여기려 한다.

  감심불양목초제

 

 또 홍 만은( 晩隱), 조 전서(趙 典書) 두 분과 단구(丹邱) 김후(金後)와 더불어 합잠(合) 연구(聯句)를 지었으니  

그 시는 이러하였다.

 

幽篁園裏數叢花 깊숙한 대밭속에 대여섯 떨기 꽃은,

  유황원리수총화

潤色山村寂寞家 빛이로다 이 산촌(山村)의 적막한 집에,

  윤색산촌적막가

入室更看樽有酒 방안에는 또 술그릇에 술이 담겨 있으니,

  입실경간준유주

宦情從此薄於紗 벼슬하려는 생각 지금부터 싹 없어지네.

  환정종차박어사

 

 이 시를 들은 사람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이 시를 옛날 은()나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채미가(採薇歌)와 기자(箕子)의 맥수가(麥穗歌)에 비하였다. 아들의 이름은 개지(介智)인데 또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신왕조에 벼슬하지 아니했다. 아아,()은 처음부터 일찍이 고려 조정에 봉록(俸祿)은 먹지 아니했으니 다만 서울의 문물제도(文物 制度)를 구경하는 빈객(賓客)일 뿐인데도 인품이 뛰어나고 민첩한 선비를 따라서 신왕종의 서울에 와서 제사(祭祀) 지내는 일에 도우지 않고서, 다만 겨울철에도 시들지 않는 송백(松柏) 같은 절개를 지키고는 산 속에 파묻혀 살다가 별세했으니 후일에 일민전(逸民傳)을 지을 사람이 그 누구가 함주(咸州)에 이런 사람이 있음을 알고는 백세(百世)의 후에 세상에서 알려지지 아니한 사적(事蹟)을 밝히겠는가. 삼가 그 대강의 줄거리만 기술하여 훗날의 군자를 기다리기로 한다.

 명 정덕 3년(正德 三年, 1508년, 조선 중종 3년) 戊辰에 전 홍문관 교리 지제교(前弘文館 校理 知製敎) 진양(晉陽) 하옥(河沃)은 삼가 찬술(撰述).

                                                                                  국역 : 전 부산대교수 사학자 李載浩 博士 


 

 재령이씨의 대부분은 모은 선생의 후손이다. 나의 18대조 茅隱公할아버지께서는 고려말에 진사에 오르고 백형인 지평공 (李申)이 간관(諫官) 김진양 등과 상소를 올려 조준 등을 귀양보내고 목벨 것을 주청하였으나 포은 정몽주선생이 선죽교에서 이방원(太宗)일파에게 피살당하자 직첩을 회수 당하고 곤장 80대에 원지로 유배를 당함에 벼슬길에 오르기를 싫어하였다.

 마침내 고려가 망할 즈음에 부친 사재령(李日善)공이 개성에서 밀양부의 서남쪽 조음리로 은거하실 때 같이 남하하였다가 의령을 왕래하다가 함안의 모곡에서 수성한 수풀속에 자미화(紫薇花)가 활짝 핀 것이 사랑스러워 말()을 매고 배회하다가 그 곳에 터를 잡고 종신토록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다.

 이곳 모곡에 담을 쌓고 담안을 고려동(高麗洞)이라 일컬었고 자급 자족하면서 망복수의의 절의를 지킨 고려의 유신(儒臣)이시다.

 모은 할아버지의 아드님은 한 분이고 손자가 네 분인데 장손이신 근재공께서 경진(1460)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 나주목사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차손이신 율간공은 147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지와 부제학을 하셨다.

 계손(季孫)이신 사의공은 부모를 함안에서 봉양하다가 셋째형의 면옥에 대신 옥살이를 하다가 억울하게 옥중에서 별세하였다.

 증손자는 모두 13분이니 재령이씨 17개 파중 12개 파가 모은 할아버지의 후손이다.

 모은 선생의 행장은 1500년대초에 교리 하옥(河沃)이 지었으며 5세손인 모촌(茅村 李瀞)공이 가장(家狀)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