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7 함안문화원 주최 '함안의 인물과 학문 학술대회'에 참가하다./264
부제 모은 선생과 고려동 사람들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생애와 학행 그리고 그 자손들 - 경상대학교 허권수 명예교수
모촌(茅村) 이정(李瀞)의 생애와 학문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권진옥
모계(茅溪) 이명배(李命培)의 생애와 학문 - 경상대학교 류진희 교수
효산(曉山) 이수형(李壽瀅)의 생애와 학문 - 선문대학교 구지현
장소 : 함안문화원 대 강당
참석자 : 만원사례 약 500명 이상 - 자리없어 통로에 서서 들음
함안 각 씨족 종친회 및 군민. 우리 일족
우리 종친회 전국 각지 종친회 지부 회원
참석자 선물 : 우산, 모은실기. 학술대회 원고책
우리 재령이가의 샛별 같은 선조
고려 망복의 절의를 지킨 모은 할아버지
육백 년 종중 역사가 함안의 자랑이 되었다.
고려동 여기만 살아있는 역사다.
모은 할아버지가 여기 함안에 첫발 디딘 후
띠밭등 모곡 함안 입향조이시며
뿌리박은 후손은 줄기를 찾아
선비로서 효우 학문에 줄을 이었으니
모은(茅隱)공 선조의 생애와 학문
아들 참판(參判)공의 생애와 학문 교육
손자 근재(覲齋)공과 율간(栗澗)공의 생애와 학덕
5세손 모촌(茅村)공과 10세손 모계(茅溪)공의 학문
15세손 효산(曉山)공 등 모두 고려동 사람들이다.
우리 선조의 업적을 현창(顯彰)하는 행사
함안문화원에서 개최해 주니
고맙기 그지 없고 자랑스럽다.
내 피속에 곧은 줄기 흐른다.
나도 모은 선조의 후손이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는 우리 종족들에게 인사 나누고
함안 종인들에게 수고 손을 힘껏 잡았다.
예전 함안교육 지인들도 여럿 만났다.
우리 할배 행사에 그들이 고맙다.
결국 선조 유덕(遺德) 발현은 주고 받는 품앗이 인가보다.
함안 종인 여성분은 음식접대에 너무 고맙고
점심까지 온 손님들께 접대하니
너무 황송할 따름
기념 선물까지 나눠 주고
학술책자가 모자라서
함안 종친을 통해서 억지로 한 권 구했다.
빽빽한 좌석
내 큰 키로 통로 눈을 막고 섰다가
개회식 인사말 비집어 들었다.
김동균 문화원장의 모은 선조에 대한 충절 의의
함안의 자랑이니 이를 잘 가꾸어 가자고 하고
김종화 함안군수는 담안 고려동 마을 보수공사와
함안유적 문화 관광코스 순방 계획을 추진한다고 하고
김주석 군의장은 함안군 의회 지원을 약속했다.
이웅호 대종회장은 함안군과 주최 문화원장
주제 발표할 교수들에게 감사했다.
겨우 빈틈 얻어 건너편 벽면에 기대어 서서
한시간 반 동안 모은 선조 생애와 자손 학문 강의 듣고
국밥 점심 접대 잘 받았다.
각 교수별 주제별 강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생애와 학행 그리고 그 자손들
- 경상대 명예교수 허권수
함안인으로 한문학자인 허박사
모은 선조에 대한 내용을 차분한 말씨로 귀를 열게한다.
학자는 자료에 의해서 해석할뿐 허구 소설은 쓰지 않는단다.
역사는 소설이 아니라 실제다.
우리 모은 선조는 우리 성씨 함안 입향조이시다.
모은 선조는 고려가 망함에
목은(牧隱)과 포은(圃隱)의 문하를 출입하다가
두 스승의 노선에 따라
두문동에 은둔자정(隱遯自靖)한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이시다.
밀양 조음에서 대대로 살았다가
처가가 있는 함안으로 입향하셨단다.
허침(許琛)이 지은 호조참판(戶曹參判)공 비문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 휘 오(午)는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이고
할아버지 휘 일선(日善)은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종부시정(宗簿寺正)
증조부 휘 소봉(小鳳)은 순성보조공신(純誠補助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상장군(上將軍)
어머니는 의령남씨로 증 숙부인(淑夫人)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 남의(南毅)의 따님이시다.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 하옥(河沃)이 지은 모은 행장(行狀)에는
지평(持平) 신(申)의 아우이며
공양왕때 성균진사(成均進士)에 합격하였다고 하고
만은(晩隱) 홍재(洪載)와 금은(琴隱) 조열(趙悅) 상산(商山) 김단구(金丹邱)와 더불어
망국시(亡國詩)를 짓고 한탄하였으니 그 시가 남아
백이숙제(伯夷叔齊) 채미가(採薇歌)나 기자(箕子)의 맥수가(麥秀歌)에 견주었다.
모촌(茅村) 선생이 지은 5대조 모은부군 행장에
포은(圃隱)의 권유로 벼슬을 권했지만
'시대가 그럴 때가 아니다'라고 사양하니
'우리 무리에서 어진 선비 하나 잃었네'라고 한탄했단다.
태종이 세 번이나 불렀는데 나아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모은 선조는 관직에 나서지 않은 진사이셨으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올바른 처세를 지킨 충절이
이후 함안의 생육신 조려(趙旅) 선생의 절사나
임진란의 충의(忠義) 의병활동,
일제 독립만세 운동의 정신적 단초(端初)가 되신 분이라고 평가하신다.
모은공의 이름난 자손들로는
아들 참판공 개자지자(介智) 할배는 벼슬은 안했지만 근재(覲齋)공 때문에 증직되셨고
1415년 모곡에서 태어나서 학문을 연마했으나
아버지 뜻에 따라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자녀들 교육에는 시와 례(詩禮)를 가르쳤단다.
배인은 진양하씨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주목사 하경리(河敬履)의 따님으로
집안에 글 읽는 소리를 듣고자 했다.
학문하는 자손을 이어지도록 하셨단다.
자녀를 4남 4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근재(覲齋)공,
차남은 율간(栗澗)공,
세째는 무후하고
네째가 사의(司議)공 우리 할배시다.
참판공의 4명의 따님은
첫째는 서령(誓令) 이의인(李義仁)에게
둘째는 내금위(內禁衛) 김치성에게
세째는 별시위(別侍衛) 허원질로 퇴계선생의 처 종조부이셨고
네째는 충순위(忠順衛) 안창홍에게 시집가셨단다.
근재공 할배께서는
1456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시고
1466발영시에 또 합격 세 번이나 국시에 합격하셨던 선조이시다.
이조정랑으로 있을때 명나라 서장관으로 다녀와
조선의 인물로 명나라 황제에게 알려진 명사였고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승진하여 홍문관 부교리로 올랐다가
외직으로 김해부사로 잠시 나갔다가
1477 홍문관 직제학으로 승진하였고
홍문관 부제학으로 형조 참의 예조참의를 지냈고
다시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청백리로 선발되셨고
1480년 다시 부제학으로 복귀하였고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1483년에는 나주목사로 지방 민원을 해결하였고
낙향하여 부모를 봉양하시다가
1486년에 모친상 다음해에 부친상을 당하시고
그해 9월에 자신도 함안에서 돌아가시니
임금의 명으로 국풍 명당 금대산으로 운구하여
지금의 남양주 와부읍에 묘를 썼다고 한다.
동국통감과 경상도속찬지리지 편찬에 참여하였고
왕은 농사짓고 왕비는 누에치기를 하여
국왕이 수범하는 모습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되었단다.
공께서는 7남 2녀를 두셨는데
장남 상(瑺)은 진사에 장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면천파
둘째 위(瑋)는 참봉별제 인천파
세째 래(琜)는 충순위, 현감 양주파
네째 속(㻋)은 현감
다섯째 종(琮)은 돈령부 판관 진주파
여섯째 애(璦)는 현령 영해파
일곱째 구(球)는 진사 원주파 파조가 되셨다.
영해파 후손으로 석계, 존재, 갈암, 밀암 등 이름난 학자가 나와
퇴계학의 학통을 계승하는 집안이 되었고.
진주파 후손으로 행정, 죽촌, 청계 등의 학자를 이어졌다.
둘째 아들 율관공은 형보다 열세살 아래인데
열심히 책을 읽고 학문을 좋아하여
1472 진사시에 급제하고
1476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 주서, 경연관, 세자시강원, 이조정랑, 사간원 정언, 지제교,
부교찬, 부수찬, 성균관 사성, 예조참의, 홍문관 부제학으로
형제가 홍문관 부제학을 하는 집안 경사였다.
성종의 총애를 받고 직설로 보필하셨다고 한다.
1494년 연산조 이후 대사간과 병조참지로 있다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아우 사의와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1497년 영해부사로 임명되어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부임하여 문교를 숭상하며 군민을 교화하고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두 번째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병을 핑게대고 독서만 열중하다가
중종 반정이후 다시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무사히 사건을 무마하고 선정을 베풀어 가선대부가 되었으나
복무중 사망하여 양양에서 함안 고향까지 반장(返葬)하였단다.
부인 수원백씨 할머니도 검소 소탈하셔서
백성의 귀감이 되셨다고 한다.
율관공은 2남을 두셨는데
장남은 포(玸) 충순위이고
차남은 무(珷) 내금위로 정국원종1등공신이 되셨다.
후손으로 모촌(瀞), 갈촌(潚), 모계(命培), 흘봉(斌望), 효산(壽衡), 우산(熏浩)등
이름난 학자가 배출되었다
사남 계자 현자 사의공 할아버지는 충순위(忠順衛)였단다.
도량이 크고 덕성이 순수하여 효우가 많았으며
일찌기 생원시에 합격하여 추천으로 장예원 사의에 임명되셨단다.
숙형(叔兄)이 원통한 옥사에 걸려들었는데
형을 도피시키고 대신 나서서 옥중에서 사망하시게 되니
형제간 죽음으로 대신한 애석한 일
고을의 백성들에게 형제애 모본이 되신 분이시다.
1514년 중종실록에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에 의해 토호(土豪)로 보고되었으나
대사헌 송천의의 처벌 고변으로 화란을 겪기도 하였다고 한다.
4남을 두셨는데
장남은 변(玣)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후손은 창원 진주에 세거하고
차남은 침(琛)은 통정대부를 지내고 진주 동산 마진, 지곡에 세거하고
삼남은 종(琮) 주부를 지내고 하동 광양에 세거하고
사남은 전(琠) 진사로 학행이 함주지에 기록되었고 함안에 세거한다.
2. 모촌(茅村) 이정(李瀞)의 생애와 학문 -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권진옥
우리 모은 선조 후손들은 함안의 학문을 전도하였는데
그 중심에 모촌 선생이 있다.
모촌(茅村) 이정(李瀞) 선생은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신
아버지 이경성(李景成)의 세째 아들로 1541에 태어나
어릴때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아버지께 배웠고
15살때 아버지 친분으로 남명(南溟) 조식(曺植) 선생을 만났고
19살부터 남명 문하생이 되어 문인과 접촉하며 학문을 넓혔고
30살에 퇴계(退溪) 부음에 슬퍼 곡하고
32살에 남명 부음에 만시 제문으로 애도하였다.
1583년에 부친상 삼년상 마치고
1596년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함안군수 부임으로 함안지(咸安誌)를 찬술하였는데
모촌을 재능과 행실이 높은 분으로 칭찬해 주셨단다.
1591 모촌정사를 지어 젊은이를 가르치고
백사 이항복과 학봉 김성일 등이 정사 건립 축시를 보냈다고 한다.
1592년 52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자로서 충의 수범을 보여 의병활동을 일으키고 항전하였다.
전쟁 중 단성현감으로 제수되어 나아갔다.
1597년 정유재란에 합천 악견산성을 정비하고 병장기를 개선하여
그 공로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이어 충주목사에 부임하여 전화 재건에 힘썼다.
1600년에 진주 원당으로 이거하여 집을 짓고 황매와라 이름하여
1601년에 불에 탄 덕천서원을 중건하는데 참여하였다.
1602 다시 옛집으로 돌아왔고
상주목사, 선산부사 모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창원부사에 부임하였다.
1604 내암 정인홍과 남명집 편집 관계로 인연을 끊고
1608년 덕천서원 산장이 되었다.
1609년 북인 비판소를 올리고
1613 73세로 원당에서 서거하시니 묘는 법수 황동에 지었다.
1710년 대각서원과 1721년 도림서원에 향배되셨다.
일생을 강학과 존현사업에 바치고
임진왜란 함안의병장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덕천서원 중건에 치중하신 업적이 지대하다.
지금도 남명박물관에 가면
이 할배의 편지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더라
모촌집은 돌아가신지 3백년 후에 나왔으나
오랜 세월 남은 글이 전후 유실되어 자료가 없음을 한탄했다.
3. 모계(茅溪) 이명배(李命培)의 생애와 학문 - 경상대 류진희
모은 후손으로 장손 근재공이 벼슬로 서울로 가게됨에 따라
종전관리가 자연히 율관 종손이 맡게 되었으나
장자인 부사직공이 김해로 이거하여 임진란중 전사하시고
자연히 덕고공 자손이 맡게됨에 따라
덕고공의 7대 주손이 모계 이명배 공이다.
공은 1672년 청수재 이재종공과 창녕성씨 사이에
5남 2녀 중 장자로 태어났다.
효행과 학문에 성을 다하여 자질을 인정 받고
자구(자구) 성영후 문하에 수학하였고
1689 18세때 상산김씨 김굉의 딸과 혼인하시고
1394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상 지내고
1698 광양에 유배중인 갈암을 찾아가 만나서
함연기사라는 문답서를 기록하였고
1699 진주 청원 갈암을 또 찾아 갔고
1700년 29살때 함안 인곡과 대산, 밀양 선영에 참배할 때 수행하였고
1703년 임하 금양으로 갈암을 찾아가 제자들과 종유하였다.
1704 향시에 합격하였고
1713년 42살때 부친상을 당해 산음에서 상례를 다하였고
1734년 함안군수 류승현과 시문교류하고
1736년 65세로 생을 마감하셨다.
사후 150년이 지난후 산음사에 향사하고
1874년 사헌부 지평으로 추증되었다
모계는 일찌기 갈암 문하에 나들이하면서
학문적 체계를 갈암 선조에게 확인 받았으며
선비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칭찬 받았다.
갈암 학문을 전파하고
여러 엉남 문인들과 교류하며
학문의 표집 모계집을 남기셨다.
4. 효산(曉山) 이수형(李壽瀅)의 생애와 학문 - 선문대 구지현
조선말기 흥선대원군과의 교류증인(交流證人)
백운래홍첩(白雲來鴻帖)의 주인공
효산(曉山) 이수형(李壽瀅)도 모은공의 후손이다.
모계의 5세손인 효산은 조부도 자식이 없어
아버지를 양자로 잇고
양아버지도 일찍 요절하여
또 양자로 이어지니
효산은 백부에게 간 양자 사손이 되신 분이시다.
생부모 양모를 정성으로 효행하였다.
아버지는 이유주이고 어머니는 해주정씨 사이에서
임신 14개월만에 태어난 늦둥이로 태어났다.
태어나서 젖 떼자마자 양모가 길렀는데
이마와 미간이 넓은 비범한 아이로 엄격하게 양육되었고
8세 때 족숙 이희영에게 학문을 받아 익혀 4서에 통달했단다.
20살에 어머니를 다음 해에 아버지를 1년 사이에 잃고
선대 생가 양가 본가 세 집안의 대주로
정성으로 효행하고 사촌 여동생들을 시집보냈다.
1864년 중광시 생원에 선발되었고
서원 철폐령에 따라 도림서원이 철폐되려하자
이 일을 저지하려다가 무주로 귀양가게 되었다.
무주에서 여러 문사와 사귀고
1874년 성균관으로 유학을 떠난다.
대원군 봉환 상소 건으로 다시 강계로 유배당하였고
1884년 낙향하여 생모의 상을 당하였다.
1894 성균관 교수로 갑오경쟁 의복개선에 상소 올리고
1895 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버리고 낙향했다.
이후 선조 현인을 드러내기위해서
율간실기(栗澗實記) 모계집(茅溪集), 율간정(栗澗亭) 중건 등을 추진하며
경도단(景陶壇) 소금단(遡錦壇)을 건립하고
선현 현창(先賢顯彰)을 통한 후학을 정립하고자 하신 분이시다.
금과 옥이 보물이 아니라 한묵(漢墨)이 보물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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