覲齋公 行狀
근재 선조의 휘는 맹현(孟賢)이며 자는 사성(師聖), 호는 근재(覲齋)로서
1436년( 세종18년) 경남 사천(泗川) 현아(縣衙)에서 출생하셨다.
1456년( 세조2년)에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으며
1460년(세조 6)에 문과(文科)에 장원한 다음 곧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1466(세조 12)에 종학도선(宗學導善)에 승진되었으며 이듬오(윤오 尹塢)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1462년(세조 8) 성균관 주부(注簿)에 제수되었으며 이해에 다시 이조정랑(吏曺正郞)으로 전직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종학도선(宗學導善)에 승진되었다.
이듬해(1467) 세조의 명에 따라 편전(便殿)에서 정인지(鄭麟趾) 강희맹(姜希孟) 양성지(梁誠之) 성현(成俔)등과 함께 시경(時經)의 구결(口訣)을 교정(校正)하였다.
1469년( 1)에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재직하면서 당시 경상감사(慶尙監司) 김종순(金從舜)과 함께 경상도 속찬지리지(續讚地理誌)를 편찬하였다.
1472년( 3)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서, 당시 전라감사 오백창(吳伯昌)의 탐학을 밝혔으며,
1474년에 예문관(藝文館) 응교(應敎)로 전직됨과 동시에 시강관(侍講官)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선생은 사원에서의 승려의 비행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으며, 또 고려시대부터 이어오던 기곡(祈穀)과 적전(籍田)을 부활케 한것도 이때이다.
1477년(성종 8)에 예문관(藝文館) 부제학(副提學)에 제수되었다가 이해에 다시 형조참의(形曹參議)로 전직되었으며
이듬해(1478)에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제수되었다가 그해 11월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아가 많은 치적(治績)을 남겨 청백리(淸白吏)에 녹명(錄名)되었다.
1480년(성종 11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승진되었으며 이듬해에 는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해에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임명되었다가
1482년(성종 13)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1483) 다시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전직되었다가 이해 12월에 어명(御命)으로 특별히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이 고을 백성들이 화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을 임명케 한 것이다. 이때 공의 춘추가 46세였다.
임기를 마치고 복명하자 성종은 가상(嘉尙)히 여겨 중직(重職)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아버님이신 참판공께서 70의 고령(高齡)이 되셨으므로 돌아가 봉양(奉養)하기를 여러번 청하였다.
성종은 마지 못하여 이를 허락하고 재신(宰臣)인 공의 아버님께 약물(藥物)을 갖추어 하사(下賜)하니 이때 공은 성종의 별다른 보살핌에 깊이 감사하고 대궐을 떠나셨다.
공이 51세때인 1486년(성종 17)에 내간상(內艱喪)을 만나 슬픔을 이기지 못하다가 몸이 수척하여 병이되어
이해(1487) 9월에 경남 함안(咸安)에서 별세하시니 향년이 52세시었다.
부고가 대궐에 전해지자 성종은 슬퍼하면서 부의(傅儀) 사제(賜祭)를 예절에 따라 하고
나라의 풍수관을 보내어 경기도 양주군 와부읍(瓦阜邑) 도곡리(陶谷里) 금대산(金臺山) 해좌원(亥坐原)에 안장(安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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