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재(德山齋)
참판공(參判公 휘 介智)의 유적지는 모곡에서 좀 떨어진 가야읍 북쪽의 법수면 향동에 있다.
참판공의 묘역은 손자이신 처사공(휘 琠)을 위시하여 모촌선생(휘 瀞) 주부공(갈촌공의 장자 휘 而檀)의 묘소가 함께 모셔저 있다. 덕산재(德山齋)는 참판공의 묘재사(墓齋舍)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황사리 향동
참판공 묘갈명(參判公墓碣銘)
공의 성은 이씨이고, 휘(諱)는 개지(介智)이며, 본관은 재령이시다.
아버지의 휘는 오(午)이니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이고 조부의 휘는 일선(日善)이니 증 통훈대부 종부시 정(正)이고,
증조부의 휘는 소봉(小鳳)이니, 순성보조공신 광정대부 상호군이시다.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증 숙부인이시며, 가선대부 공조전서 남의(南毅)의 딸이다.
영락(永樂) 을미년(1415년 태종15년) 5월 정미일(丁未日 : 11일)에 함안 모곡리 자택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였고 만년에는 향리에서 농인(農人)을 밝히 가르치고 벼슬하지 않았다.
성화(成化) 정미년(1487년, 성종18) 4월 무인일(戊寅日:9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이 73세이다.
홍치(弘治)원년 무신년(1488년 성종19) 기유일에 부인의 무덤과 합장하였다.
기유년(1489년 성종20) 2월에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는데 3대를 추증(追贈)한 것은 아들 맹현(孟賢)의 공로 때문이다.
공은 천성이 온유(溫柔)하고 순진(淳眞)하며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시례(詩禮)로 자제를 가르쳐 가업을 성취하게 하였다.
그래서 자제가 귀하게 되자, 남방(南方)에 사명을 받들고 오는 이는 반드시 공에게 술잔을 올려 헌수(獻壽)하므로 거마(車馬)가 골목에 붐비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여겼다.
부인의 성은 하씨(河氏)이니, 진주의 망족이다. 아버지의 휘는 경리(敬履)이니 통정대부 병조판서이고
조부의 휘는 승해(承海)이니 증 정헌대부 병조판서이고, 증조부의 휘는 을부이니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이다.
어머니는 강씨(姜氏)이니 봉익대부 개성부윤 수명(壽明)의 딸이다.
영락 정유년(1417년) 4월15일 태어나셨다. 천성이 온순하고도 굳세었다.
아들을 의방(義方)으로 가르치고 치가(治家)에 부지런하였으며 집안이 정숙(整肅)하였다.
성화병오년(1486년) 5월 9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이 70세이다.
1487년 1월 1일에 함안의 대산리 덕산(德山)에 장사지냈다. 증 정부인이다. 4남 4녀를 낳았다. ------ 중략
명(銘)은 다음과 같다.
기품은 엄하면서 방정하고/
천성은 순수하면서 후하였네./
자기 몸 이미 경계하고/
아름다운 배필 또 얻었도다./
현철한 자제 휼륭하게 낳으니/
세상에 앞설 이가 없네./
덕 있으면서 쓰이지 않았으니/
그 후손 창성하여 마땅하리
가선대부 행이조참판 양천(陽川) 허침(許琛)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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