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재실(齋室)이라할 때 '재(齋)'자의 뜻은 '가지런히 한다.' '깨끗하게 한다.' '정성스럽게 한다' 라는 것이다.
옛날 들판에서 제사지낼 때 거처하며 자는 곳을 가지런히하기 위해서 보관하는 곳이 있었고, 제상에 올릴 제수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 보관하는 장소가 있었고, 철따라 지내는 제사를 정성스럽게 하기 위한 장소가 있었다.
이런 점들이 묘소(墓所)가 있는 사람에게 재실이 없을 수 없게 된 까닭이다.
남양주(南陽州) 금대산(金臺山)아래 도곡리(陶谷里) 해좌(亥坐 : 정남향보다 동쪽으로 15도 방향)의 언덕에 근재(謹齋)선생의 묘소가 있다. 을축년(乙丑 : 1985) 가을 묘사(墓祀)를 지내던 날, 후손 여러분들이 재실을 지어서 제사를 지내자고 일을 계획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다 동의하였다. 수년이 지나 공사를 끝 마쳤다.
건물의 구조는 모두 다섯 칸인데 앞쪽에 공간을 두고 가운데는 마루로 만들었으니 제사를 받들기 위한 것이다. 좌우의 깨끗한 방은 재계(齋戒)하고 숙박하기 위해서다. 집 이름은 대산재(臺山齋)라고 현액을 걸었다.
아아! 공은 광릉(光陵 : 세조) 병자(丙子: 1456)년에 생원시험에 합격했고 경진(庚辰 :1466)년에 문과의 장원(壯元)에 올랐는데 임영대군(臨瀛大君 : 세종의 넷째 아들 이구(李璆))의 집에서 잔치를 내리고 5일동안 유가(遊街 : 문과급제자가 축하하는 의미에서 거리에서 풍악을 울리고며 행차하며 즐기는 행사)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감찰(監察)로 옮겼다가, 중국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형조좌랑(刑曹佐郎)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임금님이 직접 출제한 책문(策問)에 답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승진되었다.
병술(丙戌 : 1466)년 종학도선(宗學導善 : 왕의 친척과 종친들 교육을 위하여 설립한 학교)으로 옮겼다. 발영시(拔英試 : 현직 관리를 특별 승진시키기 위하여 시행한 시험)에 합격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예문관(藝文館) 응교(應敎), 전한(典翰) 등의 자리로 여러 번 옮겼다.
정유(丁酉 :1477)년에 직제학(直提學)에 승진하였다가 통정대부(通政大夫)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형조(刑曹), 예조(禮曹), 이조(吏曹)의 참의(參議)를 역임하고 외직인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다시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계묘(癸卯 : 1483)년에 특별히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병오(丙午 : 1486)년 정미(丁未 : 1487)년 모친상과 부친상을 잇달아 당하였다가 춘주 52세 되던 정미(丁未)년 음력 9월 10일에 함안의 대대로 살던 집에서 별세하셨다. 임금님이 공의 부고를 듣고 나라에서 장례를 도울 관원을 보내어 후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
공은 단정하고 고상하면서 법도에 맞고 무게가 있었고 들뜨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토론하여 깊은 경지에 나아갔으므로 홍문관(弘文館 : 임금의 학문적질문에 자문하고 임금을 가르치는 기관) 예문관(藝文館 : 나라에서 필요한 글을 짓고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기관, 양관원은 대부분 겸직하였는데 학문이 깊고 문장을 장하는 문과 급제자 만이 임명될 수 있었기에 아주 영예롭게 생각하였다) 등의 관직을 떠나지 않았다. 여러 대에 걸쳐 국왕에게 경연(慶筵)에서 강의하였는데 국왕의 총애가 깊고 융성하였다.
세상에서 청백리(淸白吏)로 칭송하였는데, 나라를 위한 간절한 정성은 상소문 가운데 절로 나타나 있어 백대(百代) 이후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데 하물며 자손된 사람이겠는가?
지금 묘소아래 있는 서너칸 재실은 공의 수많은 후손들이 조상을 위한 지극한 정성으로 여러 해동안 신경을 써서 비로소 잘 이룩한 것이다. 지금 이후로 국을 마실 때는 국속에 담장을 쳐다볼 때는 담장에 조상이 나타나 보일 정도로 추모하는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되고 서리나 이슬이 내려 계절이 변하면 조상을 생각하는 감회가 있게 될 것이다.
제사를 받드는 자리;에서 우리 일가들이 즐기고, 제사지내고 남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면 묘사를 지내는 예절이 다 갖추어질 것이고 일가들과 화목하게 지내야하는 도리도 지극해질 것이다. 어짜 아름답지 않겠는가?
어느날 후손 누구 누구가 나에게 그 사실을 기록해 줄것을 요청하여 왔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글도 잘못하기에 감히 할 수 없다고 했으나 사양할 수가 없기에 대략 전후 사실을 서술하여 보낸다.
성종(成宗) 정미(丁未 1487 : 근재공 별세한 해)년 뒤로 511년 되는 정축(丁丑 : 1997)년 중추(仲秋: 8월) 16일에
진성(眞城) 후인(後人) 이동은(李東恩)은 삼가 짓다.
[原文]
臺山齋記
夫齋者 齋也, 潔也, 誠也
古者, 祭於野, 齋其居宿而有室. 潔其奠品而有藏. 誠於烝嘗而有所, 此有墓者之不得無齋者然也.
南陽州金臺山下陶谷亥坐原, 謹齋先生李公劒舃之阡也. 歲乙丑秋履霜之日 後孫諸公 謀欲建齋,
以行祀事 詢謨僉同 閱數載而工告訖 制凡五架 前退中堂, 而爲奉祭, 左右淨室, 以爲齋宿,
扁之曰 臺山齋 又構四間守者所居.
嗚呼! 公以光陵丙子, 中生員試, 庚辰 登文科壯元, 賜宴于臨瀛大君第, 遊街五日. 遷司憲府監察, 赴京, 還爲刑曹佐郎知製敎 以對親策, 加朝奉大夫 .
丙戌 遷宗學導善. 中拔英試, 累遷 司憲府掌令, 禮文 應敎 典翰.
丁酉, 陞直提學, 拜通政副提學, 遷歷 刑禮吏三曹參議, 出爲黃海道觀察使, 復拜 弘文副提學
癸卯 特拜羅州牧使. 丙丁兩年 連遭內外艱, 以五十二春秋之丁未九月十日, 歿于咸安世第
上問訃 遣禮官厚葬之
公, 端雅典重,, 不喜浮華, 討論經史, 造到蘊奧, 不離館職, 累朝經幄 禮眷冞隆, 世稱淸白
其懇懇爲國之誠, 自見於疏章之中, 百世之下, 令人起敬不已 況子孫乎
今數間墳菴 其不億遺昆, 至誠惻怛, 積歲心匠, 始克成就, 自玆以往, 羹墻有寓慕之所,
霜露有興感之思, 將事之席, 樂我諸族 同我餘餕 則祭墓之禮 備矣 睦族之道 至矣 烏不休哉!
曰 後孫某某氏 求余記其事 自顧耄廢無文 不敢 而亦不能辭, 略敍 前後實蹟 而歸之
成廟丁未後 五百十有一年 丁丑 仲秋旣望日
眞城後人 李東恩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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