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들은 미군종 포토 저널리스트인 돈 오브리안(Don O"Brien)이 1945-46년까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한국에 진주한 미군과 함께 한국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한국노인과 사진작가 O'Brien
일본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출발전 미통신대.
찦차앞 범퍼에 세워저 있는 도구는 찰조망을 자르는 장비.
유럽에서 기록사진을 촬영하던 미통신부대(미군은 통신부대가 기록사진 찍는 업무를 담당)는 히틀러의 패망으로 배를 타고 58일간의 긴 항해 끝에 유럽의 반대쪽에 있는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일본이 항복을 하고 그해 9월 이들은 오키나와에서 배를 타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상륙하는 미군과 함께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항에 도착한 기록사진 요원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
악의가 없는 천사 같은 어린아이의 눈을 가진
한강 뜬 돛단배 한 척
핵폭탄 두 발을 맞고 항복한 일본에서 귀국한 동포들의 모습.
나는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귀국했는지 항상 궁금했다.
해방 직후 아버님 친구도 일본에서 돌아왔으나 그들은 고위직에 있었는지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서 내렸을 정도로 일본에서 잘 살았었다.
이야기는 1960년초 아버님 친구들이 모여서 식사할 때 직접 그분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래도 감이 잡히지 않았으나 윗사진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옷을 입고 돌아왔는지 상상을 할수가 있게 되였다.
일본군 무장 해재를 위해 진주한 연합군 환영 행진.
이들이 신은 군화와 복장이 아마 일본군의 군복이 아닐까 추정을 해본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인과 사진작가
이북에서 남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로부터 6.25 전쟁 휴전 후 이들이 저지른 만행을 정말 많이 들어서 이들이 나는 어릴 때 괴물같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북한에 진주한 많은 소련군인들이 형무소에 갇혀있든 죄수들도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나이들어 문서를 검색해서 알게 되였다.
평양에서 피난온 연세 많은 이웃으로 부터 소련어로 다와이(내놔), 호로쇼(좋다), 니엣(No)라는 말을 배울 정도였으니 나는 수많은 소련군의 만행을 들으며 자랐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을 통칭해서 로스케로 불렀다.
사진작가 Don O'brien의 집차 앞에서 사진을 찍은 로스케.
내가 들은 소련군의 만행 한 토막, 시계를 가져 보지 못했든 소련군은 길에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팔을 검사해서 차고 있는 시계를 모조리 뺏어서 자신의 양팔에 차고 다니다가 태엽을 감을지 몰라 작동하지 않는 시계는 버렸다고 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들의 모습.
밀기울이나 곡물 껍질로 만든 검은 빵을 가지고 다니며,베개로 이용해 잠잘 때 사용하다가
배가 곺으면 비고 있는 검은 빵을 뜯어 먹으며, 영하 30도의 한 겨울에도 철길에서 철로를 베고 잠을 잔다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군표(점령지에 주둔한 군대가 발행하는 돈, 현지에서만 통용 가능)를 찍어 들고 다니며
가위로 잘라 가며 사용한 소련군의 영향으로 북한 경제에 큰 혼돈을 주기까지 했다.
내가 상상했든 괴물의 모습 못지 않게 이들에게서 야비함과 잔인함 마져 느껴진다.
일본군의 장갑 무장 열차
상륙하는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특별 제작한 장갑 열차의 모습이다.
장갑열차를 끄는 장갑 증기기관차의 위용.
존 하지(John R Hodge) 미육군 중장.
하지 중장이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모습이다.
군정장관 하지 중장에게 화환을 증정하는 소녀들
서울 근교에 있는 작은 기차역.
시가행진을 지켜보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
연합군 환영 가두행진하는 보이스카웃과 구경하는 시민들
짚신 신은 촌노
강원도 동해안에서 찍은 사진에서 보이는 노인은 눈길에서 비록 집신을 신고, 기운 두루마기를 입었으나, 눈에서 발산하는 무서운 눈빛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보이며, 일제의 압제에도 끄떡없이 버터낸 무서운 저항력을 간직한 기가 느껴진다.
하지 중장과 통역자
집회에서 통역을 하는 모습. 그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저명 인사인 것 같다. 하지 장군이 남긴 일화가 있다. 그 내용은 한국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자
계란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로 현실을 모른 걸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회자되였다.
한국 철도 종사자들 교육용 자료를 만들기 위해 한강 철교를 촬영하는 사진작가
물통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
한국 어머니의 당당한 모습. 한국 어머니는 어떤 역경도 이겨내는 사랑이 느껴진다. 당시는 무명 옷 한 벌로 1년을 지냈다.
만 4년간 남태평양에서 운행했든 고물이 되여가는 C47 미군 수송기.
화물과 승객을 동시에 수송하는 화물기는 한국에서 미군의 수송 업무를 담당하였다.
부산-서울간 운행하던 객차 (화물 칸을 개조해 승객 운송)
일본에서 귀국한 가족
똥짱군을 이용해 밭에 인분을 뿌리는 농부.
연합군 환영 현수막 걸린 건물 앞을 유유히 지나는 마차
광복 후의 서울은 현재와 달리 일본 처럼 차량은 왼쪽 통행이었다.
갈쿠리로 검불 나무를 해서 지고오는 젊은 여자
개털 목도리를 한 노신사
일제는 만주지방에 주둔한 왜병들의 겨울철 옷을 만들기 위해 돌아다니는 길개를 잡을 수 있는 권한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었다.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개를 잡아 고기는 먹거나 팔고 가죽은 일본 정부에 바쳤다. 개털이나 가죽으로 만든 겨울 목도리는 6.25 전쟁 중에도 주로 만주지방에서 내려온 동포들이 많이 사용했다.
한국 언론 사진 가지들
서울의 홍등가.
영어로 미군의 출입을 금지하는 팻말이 붙어있고 뒷쪽에 미군 헌병도 보인다.
당시 택시인 인력거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든 인력거, 6.25 전쟁수복 후 돌아오니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서울 시내 모습, 전 중앙청 건물만 우뚝할 뿐이다.
잘 사는 집 가정 주부
경복궁 경회루 지붕 위의 잡초
일제는 조선인들만 고통준 게 아니고 문화재까자 돌보지 않았다.
시가 행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세란 간판이 보인다.
일본인들이 두고간 적산 가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
젊은 모자
일본 군대가 남긴 낙하산을 점검해 보는 사진작가
시내 전차
각반을 찬 패잔 일본군 아버지와 아들.
김포비행장에 줄줄이 서 있는 일본군 전투기
일본군의 무장 해재하면서 미군이 접수한 군수품 중 일본군의 99식 소총은 회수해서 한국 국방 경비대가 사용했으나 그외 군수품의 행방은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 볼수가 없다.
연합군이 Code Name Sonia로 불렀던 전투기들은 Mitubishi K1-51 Type99 기종이다.
20여대로 보이는 이 전투기들은 건국후 들여온 10대의 연습기 창랑호 보다 백 배나 전투력을 갖춘 기종이다.이 전투기들 다 어디갔지?. 진주한 미군은 일본 열도와 한국내에 남은 일본군의 모든 전투기나 탱크와 각종 무기는 모조리 잘라내거나 아니면 불도저로 깔아뭉개 고철로 만들어 한 대도 남기지 않았다. 2차대전 후 나치 독일이 남긴 무기도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살아남은 장비는 미군이 연구용으로 선택된 몇 개의 무기는 예외였다.
삼척에 있는 한 탄광
미군이 접수한 마약.
아편 등 마약은 일본이 한국인을 이용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증거물이다.
일본군 각반 차고 도끼질하는 이 남자는 일본군에 징집되였다가
나뭇짐 진 노인
남산의 일본 신사 입구
남산에 세워진 신사 앞에 서 있는 미군과 미군의 짚차 모습에서 조선이 해방 되였다는 사실을 읽을수 있고, 소녀가 신고 있는 게다짝과 신사의 생생한 모습에서 일본이 남긴 잔재가 무엇인지를 읽을 수가 있다. 사진의 신사가 있던 대지는 현재 도서관과 공연장으로 변했다.
원래 남산에는 두 개의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진에 보이는 남산 위 신사와 현 동국대 근처에 또 다른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